기윤실은 지난 4월 매주 월요일  <코로나와 한국교회 연속토론회 시즌1>를 개최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교회의 민낯까지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왜곡된 자기중심적 신앙과 교회의 비상식이었고, 이것은 집단 감염을 일으킨 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만연한 행태였음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와 청년들이 한국 교회에 요구하는 목소리를 바로 듣고 성찰하며 개혁해야할 필요를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웨이브레터에는 연속토론회 1주차 발제 중 신하영 교수(세명대, 기윤실 상임집행위원/청년위원)의 원고를 싣습니다. 어쩌다 교회는상식과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집단이 되어 이렇게 사회와 청년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을까요? 신하영 교수의 진단과 제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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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가 ‘교회’에 말해주는 것들

신하영 교수(세명대, 기윤실 상임집행위원/청년위원)

 

들어가며

이번 토론회에서 코로나19와 한국교회라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를 다루게 되는 것에 부담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요청해주준 발제 제목이 더욱 심상치가 않았다.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신앙,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그렇다.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은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 혹은 그 지도부는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명제는 정말일까?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세상의 변화와 상식과는 엇나간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세상의 모든 변화와 상식에 교회가 맞추어야만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20년 봄부터 꼬박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국교회가 그동안 한국사회 내에서 가지고 있던 신망과 목소리, 그 자리가 송두리째 흔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회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코로나 19앞에서 국가와 시민 간의 관계, 필수노동과 돌봄노동, 학교와 교육, 안전과 자유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이 의심되고 흔들리는 엄청난 집단적 경험을 하고 있다.

이렇게 모두들 각자 할 말이 잔뜩 생기는 상황에서 사회학자들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1)을 다루면서, 코로나 상황에서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노동자, 세 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 동선 공개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확진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분석하기도 했다. 어쩌면 본 고는 코로나 상황에서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의 교회판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곧, 코로나 상황으로 학교도 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교회학교에서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사회 전체의 고령화를 더 일찍 맞이해서 이미 출석 교인의 대부분이 고령화된 교회는 고령층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어떻게 ‘모이기에 힘쓰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세상 권력의 구실로 치부하고 지금의 상황을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환란과 핍박’으로 여기고 있다. 코로나19는 그 온도와 무게가 코로나19 이전에 각 사람이 처했던 배경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 ‘코인’으로 이 위기가 기회로 작용했다. 국내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는 ‘코로나’로 검색되는 단행본만 485개에 달하고(2021년 4월 3일 기준), 심지어 이중에는 68개가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생존하는지, 전략을 설파하는 책들이다. 비대면의 언택트 시대를 ‘온택트’(on+contact)라는 한국인만의 신조어를 만들어서 새로운 기회로 창출하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배제와 혐오에 앞장서는 한국교회?

왜 교회는 이 상황에서 비난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을까. 필자는 그 이유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새롭게 혹은 새삼스럽게 고개를 든 배제와 혐오에 대해 한국교회가 보여준 입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안의 혐오와 배제를 드러냈다. 코로나19 감염증은 2020년 2월에만 해도 한국에는 ‘우한폐렴’으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인수 공통감염으로 일어난, 박쥐에게서 옮은 이 병에 대해서 당시에는 많은 국민 뿐 아니라 공영방송에서도 서슴지 않고 우한폐렴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한국인들의 중국인 혐오의 불씨에 우한폐렴이라는 장작이 더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미국 질병관리국(CDC)과 UN을 중심으로 우한 지역과 이 감염증을 연결시키는 것을 지양하기 시작했고, 곧 팬데믹 선언이 이어졌다.

팬데믹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이 병은 전 인류가 함께 헤쳐 나가야 할 공존공영의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는 “우한 폐렴과 중국 기독교 박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카드뉴스가 생성되어 예의 ‘교회 내 카톡방’으로 떠돌기까지 했다. 박쥐를 먹는 중국인의 야만적 식생에서 인수감염의 병이 시작되었다는, 나름의 ‘과학적 추론’도 아니고 시진핑 정권의 중국에서 기독교인이 겪는 박해, 한국인 선교사의 강제 추방이 우한폐렴이라는 재앙의 원인으로 등장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는 바로가 겪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인류의 팬데믹이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한 목회자 인터넷 카페에는 “중국 시진핑이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우한 폐렴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같은 느낌이 든다.”는 글이 올라왔다2). 비단 이 교회의 사례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수많은 목사와 교계 지도자들은 우한폐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그 논조는 선교를 탄압하는 중국의 공산당 정권 비판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사회와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혐오표현이 무엇이 문제일까? 특정 사안을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잘못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혐오표현이 소수의 막말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적이 표현으로 자리 잡고 그에 대한 비판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혐오표현의 대상, 소재가 되는 집단과 개인은 언제든 공격의 대상이 된다. 혐오표현이 곧 혐오범죄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코로나19로 한국인은 중국인을 혐오하는데, 이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중국인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다양한 인종이 섞인 미국이나 서양의 다른 국가라면 어떨까? 동양인을 세세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에게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마찬가지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실제로 미주와 유럽지역에서는 동양인을 향한 인종혐오와 폭력이 들불처럼 거세졌다. 그 피해자 중에 상당수는 당연히도 한국인이었다.


약자 보호 – 재난 앞에 선 교회의 역할

그렇다면 재난 앞에 선 교회의 역할은 어떠해야 했을까.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했고, 그 기대가 어떠했기에 실망하고 교회를 비난하게 되었을까. 심지어 교회 안에 있던 신자들 중에서도 이번 코로나19 상황에서 교계가 드러낸 ‘약자에 대한 혐오, 방역수칙 거부, 계속되는 사회 공공선과의 대치’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전염병 상황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민낯이 되지 않도록, 고칠 수 있는 교회의 잘못과 바로잡을 수 있는 인지 오류로 생각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려면, 세상과 화해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전염병과 기독교는 어찌 보면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약시대부터 나병의 존재는 계속해서 성경 속에서 다루어졌다. 예수님은 공생애기간 동안 나병환자를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자주, 많이 고치셨다. 나병환자의 믿음과 고침을 받은 이후의 행동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비유로도 사용된다. 많은 예화와 설교에서 전염병은 인류가 겪는 고통 혹은 죄의 메타포로 소환되어 왔다.

기록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전염병은 중세시대의 흑사병일 것이다. 흑사병의 발원은 1347년 이탈리아 제노아의 선박에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선박은 아시아 대평원에서 무역 물자를 날라 시칠리아 섬으로 향하던 참이었고, 그 무역 물자는 동방의 희귀한 귀중품을 이탈리아 지역의 귀족들에게 전해지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를 잇는 무역과 침략 전쟁과 흑사병이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흑사병은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과 재난이라는 해석 이면에 지극히 인간의 욕심과 탐욕, 진귀한 것을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추론이 일반적이지 않던 중세시대에는 흑사병의 징후로 나타는 출현 반점을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God’s Mark)라고 부를 정도로 흑사병 =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중세시대 유럽 사람들의 인식구조, 가치관을 지배하던 것은 교회였다. 교회가 사회를, 권력을, 자연현상을, 그리고 전염병을 해석하는 방식은 곧 사회의 인식이 되었다. 그만큼 전염병 시기 교회의 역할은 지대였다. 흑사병 시기 유대인들은 손을 자주 씻어서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병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이 유럽인들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넘어 공포와 증오로 이어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병을 퍼뜨린다는, 지금으로 치면 ‘가짜뉴스’가 난무했다. 이로 인해서 유럽 내 유대인의 학살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청소는 독일의 경제 붕괴, 국가적 어려움을 당시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유를 누리던 유대인에게 책임 전가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중세시대 흑사병 창궐 당시 유대인 학살에 대한 교회의 회개와 쇄신이 있었다면, 끔찍한 홀로코스트가 반복되었을지 가정해보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흑사병 창궐의 시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 루터는 ‘사람과 장소를 피하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루터가 남긴 글을 보면, 루터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창시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생각이 든다.

 

“만일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하신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루터의 이웃 지키기와 이웃에 대한 책임, 약자에 대한 보호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 곳곳에서 전염병 시기, 전염병이 존재하는 사회(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구약성서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사회 소수자를 거의 편파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싸고도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일은 주로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에, 성서 전통은 그런 일을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그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고, 이들을 각별히 보호하는 일이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는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3). 안식일 제도와 희년 제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신약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는 곳곳에서 관찰된다. 예수님은 당시에 백성들을 억압하던 기득권 세력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문자주의로 해석되고 외식하는 행위로 악용되던 안식일, 성전세 등을 비판하셨고 – 물론 이로 인해서 민족해방운동가, 정치가로 오해 받고, 군중들이 이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 당시에 소외받던 이들을 제자로, 친구로 곁에 두었다4).

그렇다면 현대 사회는 어떨까. 사람이 수단으로 다뤄지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소외되는 일은 너무나 자주, 합리와 효율의 가면을 쓰고 일어난다. 한국사회에서 코로나19의 방역수칙이 ‘감염병 논리’로 기존의 모든 원칙과 관행을 압도해버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감염병으로 인한 건강의 위험보다 더 절체절명의 생존과 생계의 위협을 마주했다. 장애인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그야말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코로나 19 이전에는 장애인 중 일상생활에서 활동지원(생활보조)을 받아야 하던 이들이 사회복지 이용시설에 매일의 일과처럼 일정 시간 동안 머물면서 집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일괄적으로 시설이 폐쇄되거나 대면 서비스로 이루어지는 의료진단, 재활치료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면 서비스가 곧 일상의 유지와 직결되던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최근 어디를 가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을 너무나 답답해하던 발달장애인이 모친과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장애인 자녀가 다니던 시설을 가지 못하게 되어, 하던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부모가 생계가 곤란해지자 가족이 동반자살을 기도한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장애인들에게는 K-방역의 영광스러움은 너무나 먼 이야기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미덕으로 설명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 펼쳐지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구성원은 아동과 노인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해 오던 여성들도 기존의 돌봄노동의 괴로움을 곱절로 떠안게 되었다. 돌봄의 수요자인 아동은 비대면 상황에서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 학교를 단순히 교과내용을 학습하는 곳으로 제한한다면 온라인 수업으로 학교가 ‘대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아동들이 건강하게 신체발달을 할 수 있고, 친구를 사귀면서 사회성을 발달시켜야 하는 곳이고, 무엇보다 급식이 주어지는 생활공간이다. 취약계층 아동은 학교에서 주어지는 급식이 사라진 이후 결식이 증가했다. 인스턴튼 식품섭취의 증가는 취약계층 아동 뿐 아니라 전 계층 아동들에게서 빈번히 나타났다. 초등학생의 운동량도 급격히 줄었고, 아동의 주간 활동량이 줄면서 영양소 섭취와 합성, 정상적인 신체발달에도 지장이 생기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돌봄 격차와 학습격차다. 주중 5일 내내 어른 없이 일과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41.6%에 달해, 우리 사회에서 ‘돌봄취약계층의 아동’의 존재를 인식하게 했다.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학습 돌봄이 필요하다. 일과시간에 학습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경우의 아동은 65%나 되었고, 이는 늘어난 한국의 맞벌이 가정 비율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5).

코로나19는 독거노인들에게 더 깊은 고립과 소외를 가져왔다.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으로 인해 국내 고령인구는 일차적으로 감염 고위험군으로 건강의 위협을 느낄 뿐 아니라, 심리정서적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비대면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디지털 기기를 통해 서비스와 재화를 이용하는 것에 어려움을 경험하는 노인이 증가하고 있고, 이중 독거노인은 “하루에 몇 마디도 못 할”정도로 극심한 고독을 느끼고 있다6).

장애인, 아동, 노인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의 삶은 이전에도 정서적, 신체적 소진으로 지쳐있었는데 코로나19 상황은 이들의 현실을 더 척박하게 만들었다. 사회서비스(social service)로 공공화 되던 장애인, 아동, 노인에 대한 서비스는 대부분 대면 서비스였고, 이를 제공하던 기관이 모두 폐쇄(lock-down)되면서 이들은 다시 가족의 일차적 돌봄의 테두리로 돌아왔다. 돌봄 수요자의 가족이 모든 돌봄의 책임을 지던 시대로부터 오랜 시간 투쟁과 연구, 제도화를 거쳐 만들어진 공공의 사회서비스와 복지가 한순간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돌봄 제공자 중 절대적 다수는 여성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여성의 삶도 피폐해 졌다. 지난 1년 동안 일을 그만뒀거나 해고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고, 가정폭력이 급증하면서 여성은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다. 각국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코로나로 인해 여성의 위상이 10년, 아니 30년은 후퇴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7).

 

 

포스트(post) / 위드(with) 코로나 시대,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코로나19 재난 앞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기존에 겪고 있던 차별은 더욱 굴절되고 공고해진다. 그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던 자원은 차단되고, 돌봄을 제공하던 이들에게 전가되던 부담은 배가되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교회는 새로운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기에 앞장섰던 신앙 공동체의 모습은, 성문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고대시대에 이례적인 약자 보호의 모습이었다. 중세시대 루터의 이웃 사랑 실천 역시 농노들이 더 많이 죽고 고통 받았던 중세시대의 사회적 지형도와 연결 지어 해석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계셨고, 어린아이를 안아주시고 여성들의 눈물을 닦아주셨다.

교회는 성경의 도와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사회적 약자 편에서 이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복리를 증진하는 활동을 해왔다. 한국의 빈곤계층 아동의 보호와 학습권 보장은 ‘공부방’을 통해서 민간영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골목마다 있던 공부방 중에 다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사회사업 시설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법제화되고 현재의 공적 자원이 투입되기 전까지 지역사회에서 결식아동에게 밥을 주고, 낮 시간에 방치될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피난처가 되어주던 곳은 교회의 사회적약자 보호의 실천 현장이었다. 장애인과 노인 복지 역시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오랜 시간 리더십을 보여주던 분야다. 공공서비스로 장애인, 노인시설이 편입되기 전까지 교회는 구제와 선교의 통로로 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했다.

돌봄의 흐름이 차단되어 고통 받는 이들이 제도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이때에, 교회는 돌봄의 공간 돌봄 제공자로 다시 나서야 한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다시 평일 낮에 교회 문을 열고 ‘공부방’을 제공하고, 갈 곳이 없어진 장애인들이 일상을 회복할 공간으로 지역사회에 촘촘히 자리 잡은 교회가 개방되면 어떨까? 그럼으로써 갑자기 사라진 국가의 자리, 공공서비스의 자리로 고통 받는 이들이 일상을 회복하게 되지 않을까. 직접적으로 돌봄을 제공받는 아동, 노인, 장애인 뿐 아니라 이들의 가족과 이들의 소외를 우려하는 사회 구성원들도 교회가 채워주는 빈자리를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빨간 십자가’로 여겨지던 지역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교회가, 촘촘한 사회 안전망으로 그리고 도피성으로서 다가오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남은 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미가서 2장 12-13절에 등장한다.8) 이들은 비록 소수지만, 하나님의 심판 때에도 은혜와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노아 홍수 때의 노아가 그랬고, 소돔과 고모가 심판 때의 롯이 그러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 때 여호수아와 갈렙 역시 소수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나아가서, 신약시대에는 성도 그 자체가 남은자로서 존재한다9).

1)공성식,김미선,김재형,김정환,박해남,백영경,오하나,유현미,장진범,추지현 저. 돌베개. 2020년작.
2)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21012194641855&type=1
3)http://dabia.net/xe/study1/315568
4)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9617
5)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Print/A2021011417160004272
6)”하루에 몇 마디도 못 해”…독거노인 ‘비대면의 그늘’ JBTC 뉴스. 2021.01.15. 방송자료
7)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0319027001
8)스바냐 서에서는 “하나님만을 겸손히 의지하고 의를 행하는 자”(습 2:3)로 나타난다.
9)https://www.duranno.com/bibleco/bibleco_view.asp?bbs_id=2843&ca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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