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 기독교 가족주의라는 경계

글_데르메(기윤실 윤신일 간사)

 

“청년은 뉘 집 아들이래? 일 열심히 하니 보기 좋네!”

어느 교회 어린이부 교사로 섬기던 시절 들었던 말(이하 ‘그 말’)입니다. 벌써 십수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때 ‘그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만약 ‘그 말’을 모 교회, 그러니깐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자랐던 교회에서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네. 저는 윤 집사님 아들입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자기소개와 가족 소개, 성장 과정과 배경 등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쉬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교회는 어려서부터 다닌 곳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우리 가족’과 함께 다니지 않았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교회에서 어머니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초신자의 심정이 이렇겠구나’하고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이 같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이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는 왜 이렇게 가족주의적인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왜 유난히 혈연 중심의 ‘화목한 가정’을 신자의 최고의 덕목으로 삼으며, 가정 내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1)의 역할을 강조하는 걸까요? 그리고 이러한 ‘가족의 가치’라는 상(image)에 반하는 것을 그리도 반대하는 걸까요? 요즘 저는 이 질문에 꽂혀 있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2018)을 보면서 문득 그때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가족 영화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어느 가족>은 빈부 격차의 확대로 인해 나타나는 일본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그리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발휘되는 ‘가족애’를 보여준 영화입니다.

마트와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오사무)와 소년(쇼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처럼 물건을 훔치고 귀가하던 도중, 길가에서 떨고 있는 아이(유리)를 발견하고는 안쓰러운 마음에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입니다. 알고 보니 유리는 매일 가정폭력을 당하던 아이였지요. 이를 알게 되면서 친부모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함께 살기로 합니다. 생계형 도둑과 같이 살다 보니 유리도 자연스럽게 도둑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도둑질을 하던 유리가 적발될 위기에 처하자 쇼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 잡히게 됩니다. 수사를 받던 도중, 쇼타와 함께 살았던 이들이 모두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매체를 통해 알려집니다. 쇼타 역시 친자식이 아니라 오사무가 입양하여 키우던 아들인 것이 밝혀졌지요. 또한 언론은 폭력과 학대에서 유리를 구한 행위를 ‘유괴’로 보도했습니다. 수사당국과 복지 전문가들은 그저 법과 규범대로 그들을 친부모에게, 그리고 수용시설로 보내고 가족처럼 함께 살던 그들이 모두 흩어진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작중에서 혈연관계의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혈연관계의 가족은 아이와 엄마가 하루도 빠짐없이 폭력과 학대에 시달립니다. 반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감정적 연대로 실제 가족과 다를 바 없이 사는 이들은, 수사기관과 복지 전문가들에 의해 강제로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대조되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하게 합니다. 흔히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상(image)은 혼인이라는 법적 절차를 통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가족은, 그간 보편적으로 이해했던 가족이라는 상(image)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듯 하면서도 비슷하게 소외당하는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마치 가족처럼 사는’ 그들의 모습을 엽기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그 상(image)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제도권을 상징하는 국가(수사기관, 복지전문가)는 친부모의 학대에서 피난처를 제공했던 이들에게 “아이에게는 낳아준 엄마가 필요해요”라며 아이를 다시 친모에게 돌려보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다시 학대를 당하던 곳으로 강제 이송을 당하는 것이지요.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감독은 ‘정상 가족’이 학대를 방관하거나 정당화하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가족·가정에 대한 상(image)이 폭좁게, 그리고 매우 견고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가족이라는 제도의 안과 밖을 살펴보자는 이 영화의 의도를 보면서 그 당시 들었던 ‘그 말’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족주의가 교회 신자들 사이에 짙게 그어버린 경계로 인해 소속될 곳을 상실한 이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왜 그토록 가족과 가족적 가치를 정형화하려고 하며, 그것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길까요? 다시 말해, 왜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외에 새롭게 등장하는 가족의 형태2)를 부정적으로 볼까요? 이 의문에 대한 힌트는 기독교적 연애관과 결혼관을 가르치는 이들의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청년기 사이에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많이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연애나 결혼에 관한 소위 ‘세상적 관점’을 경계하라고 가르치면서 기독교적으로 건전한 연애관을 가르치는 강사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요. 지금은 과거보다 인기가 식었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그들의 강의가 있는 곳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저서는 대부분 기독교 서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그들의 강의 내용과 저서를 살펴볼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결혼과 가족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3)

 

먼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완전한 삶”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독신은 불완전한 상태이며 그들을 불행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외롭지 않고, 행복해지고, 안정된 삶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4) 심지어는 성적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권하는 예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이라면 이런 담론이 교회에서 매우 흔하게 공유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결혼을 일종의 진급이나 통과의례로 여기기 때문에, 결혼 여부로 교회 내 부서나 교구, 그룹을 구분 지으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 내에서 교구장, 구역장 등과 같이 평신도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의식은,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미성숙한 사람으로 또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결혼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아무나’ 엮어주려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당사자로서는 사생활에 관한 질문도 ‘원치 않게’ 많이 받게 되지요(심경미, 2019).

 

다음으로, “남자는 가정의 리더로, 여자는 돕는 배필로 세우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특정 대상에게 역할을 부여하면서 그의 정체성을 지정해준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정 내에서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기독교적 결혼관을 가르치는 이들은 ‘아내’에게 ‘생명을 품고 자라게 하는 자’라는 상(image)을 부여하면서 식사 준비나 아이의 학업을 돕는 일의 가중치를 ‘엄마’에게 부여합니다. 반면 ‘남편’은 ‘경작하는 자’, ‘가정을 돌보는 자’, ‘가정을 통합시키는 자’라는 상을 부여하면서 가정의 재정과 같은 핵심적인 일에 책임을 지고, 가정의 신앙적 리더로 역할을 제시하기만 하면서 허드렛일은 ‘아내’의 역할로 치부합니다. 아울러 아이와 부모의 역할을 구분하여 자식 된 도리, 즉 ‘효’를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는 체벌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 부모와 아이를 구분 짓는 것을 통해 ‘스테레오타이핑(stereotyping)’, 즉 “~~다움”을 강조한다는 것이지요. ‘엄마다움’, ‘아빠다움’, ‘자녀다움’, ‘가족다움’… 이런 말들을 통해 우리의 의식 속에는 ‘가족’과 그것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상(image)이 정형화·체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집단의 의식에 의해 이미 구분 지어진 것들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영화 <어느 가족>이 한국교회의 현재를 일깨워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기독교 가족주의는 수많은 구분과 경계를 통해 ‘정상 가족’이라는 그들만의 장(field)을 만들고 경계 밖의 이들에게 ‘상징폭력’5)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기독교 가족주의의 가장 큰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하나는 성서문자주의에 입각한 근본주의의 영향이 크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전근대적 유교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미국 근본주의 신학을 비판이나 성찰 없이 수용했던 것이 아직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가족주의는 성서 구절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신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러니 일부 급진적인 교회를 제외하고는 이런 가족주의 담론이 매우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자에는 “아니올시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깐, 기독교적 가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톺아볼 때, 이것이 ‘전근대적’ 유교 가부장제와 같은 역사적 궤적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가족주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근대성’입니다.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가족’이라는 어휘는 물론 그에 따른 관념이나 문화도 없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어휘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일본에서 서구 근대 문화를 수용하던 시기의 관점이 반영되었는데(김경호, 2020), 이것이 명문화되면서 ‘부계 지배적 혈통’, ‘현모양처론’과 같은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이새롬, 2018). 일제는 조선 사회의 이념과 사상의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가족 관념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말살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가족법’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이를 수용하기 쉬웠던 이유는 그 속에 남성 중심적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서구 결혼문화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주는 것이 유교의 삼종지도6)와 비슷했던 것처럼, 당시 조선도, 일본도, 서구도 서로 비슷한 형태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적 문화 의식을 확산시키면서 전통 의례들을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여겼고, 이를 거부하고 타파하는 것을 올바른 신앙으로 가르침으로써 서구 가족제도와 문화가 자리 잡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일제가 차지했던 가족제도와 문화에 대한 헤게모니는 해방 이후 기독교로 넘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저서 『독립정신』(1904)에 담긴 ‘기독교입국론’을 바탕으로 ‘신앙-가족-국가’라는 가족에 관한 기독교 근본주의 담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국가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 드러나는 영역이며, 가정이란 신적 질서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역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인데(강남순, 2003), 이 시기부터 ‘가족’은 한국 사회와 교계에서 ‘성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가족주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상(image)을 남편(아버지)에 대입시킨 “부드러운 기독교적 남성성”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이전까지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억압을 당하던 여성들이 기독교에 호감을 느끼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남성에게 상위의 직분과 역할을 부여하는 ‘착한 가부장제’로 변질된 것이지요(이숙진, 2012). 이것이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기독교 가족주의’를 고착화시켰고, 여기서 발생한 수많은 경계와 구분은 지금도 교회 현장에서 계속해서 교육, 전수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모델이 등장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교회가 이런 서구 근대적 가족주의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는 이유는, 근대성이 가진 ‘효율’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가장 익숙하고 편한 방법으로, 기성세대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가족주의를 소비함으로써 교회 내에서의 소속감과 편익을 제공받는 일종의 교환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해, 기성세대는 교회에서 청년들의 ‘연애-결혼-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소위 ‘작은 하나님 나라로서의 가정을 만들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소싯적’ 향수에 젖어들고, 교회 밖에서는 출생률이 급감하여 구경하기조차 힘든 어린 아이들을 만날 수 있으며, ‘믿음의 짝’을 구하는 청년 세대는 신앙적으로 보증된 짝을 만나 그들의 ‘연애-결혼-출산’ 과정의 정당성과 성도들의 공인을 부여받는다는 이점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구 근대성이 남긴 수많은 폐해가 이미 널리 알려져 지탄을 받는 이 시점에 아직도 가족주의를 강조하고 전수하는 것은, 서구 근대성의 폐해를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족주의가 지배적 담론이 된 교회에 ‘정상 가족’이라는 경계 밖 신자들의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비록 짧은 식견이지만 한국교회에 제안하고 싶습니다. 다문화주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지혜를 빌려 교회 내의 가족주의가 구성한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허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테일러(2002)는 ‘인정의 정치(The Politics of Recognition)’라는 논의를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타자가 (긍정적으로) 인정해주기를 원하며, 잘못된 인정은 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극심한 고통에 빠뜨린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이 가진 존엄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성이라는 범주가 위계와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이 규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온당한 구성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Taylor, 2012). 결혼과 가족이라는 것이 인류에 의해 구성된 문화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차이로 인해 나타난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편향성이나 차별 없이 그들을 교회 내의 온당한 구성원이라는 지위를 부여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져 새로운 교회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가족주의는 이런 정신이 결여된 채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신자들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 자체에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가족문화가 강조하는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범주에 들지 못했던, 한부모, 사별, 조손 가정의 신자에게 상처만 남긴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교회를 뒤덮어온 ‘성과 속’, ‘선과 악’의 이항 대립적 구도에 따라 ‘단일한’, 그리고 일치를 위한 ‘정상성’에 기대어 온 기독교계는 이제라도 찰스 테일러의 ‘다문화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으시고 “그래, 그러니깐 교회가 상처받은 가족 간의 사이를 회복시켜주고, 화목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해!”하고 비장하게 다짐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는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감독이 고발하고자 하는 ‘정상 가족 우월적 사고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가족이 혈연관계의 가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개인이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처럼, 그 개인의 소수 연합체인 가족의 화목이나 불화의 원인은 그 가족 구성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요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화목한 가정이 있는 반면,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불화한 가정도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화목한 가정이 정상적이고, 불화한 가정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가족이 화목하면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화목을 강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관계가 엉켜버려 화목과 결합을 상상할 수도 없는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해결 방안’이 아닌 ‘공감’과 ‘위로’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저 교회는 한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교회 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한 주간 지고 살았던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기쁨을 얻고 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의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이 서로를 돌보고 연대했던 것처럼요.

 

 

[1] 개인적으로 ‘자녀’라는 용어 자체에 성차별적·가족주의적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후부터는 ‘아이’로 표기하였다.

[2]흔히 ‘정상가족’이라는 범주 외로 보는 부류는 이혼가정, 1인가정, 한부모 가정, 입양 가정, 동성커플, 동거커플, 혼외출산가정, 딩크, 폴리아모리 등이 있다.

[3] 기독교적 결혼과 연애에 관해 참고한 도서 목록은 하단 참고문헌을 확인할 것

[4] 박수웅(2013)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해결해야 할 여섯가지 문제로 거절감, 분노, 사랑의 굶주림, 두려움, 열등감, 죄책감을 꼽았다.

[5]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저서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에서 소개된 이론으로, 사회 모든 분야(또는 장, field)마다 그것을 지배하는 권력이 세운 특정 가치에 그 장의 피지배층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말한다.

[6] “어릴 때는 아버지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전근대 시기 여성에게 요구된 세 가지 도리를 말한다.

 


참고문헌

강남순. 2003. “종교근본주의 담론과 젠더” 『신학사상』 0(123).

김경호. 2020. “한국사회의 ‘가족주의’ 담론과 ‘유교 가족주의에 대한 성찰” 『민족문화연구』 0(86).

심경미. 2019. 『싱글 라이프』. 아르카.

이새롬. 2018. “메이지 일본의 ‘양처현모’론 탄생의 맥락-도쿠가와 시대 여성 담론으로부터의 연속과 단절” 『개념과소통』, 0(22).

이숙진. 2012. “최근 한국 기독교의 아버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착한’ 가부장주의를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2(22).

테일러, 찰스. 2002. 『세속화와 현대 문명』 김선욱 외 역. 철학과현실사.

Taylor, Charles. 2012. “Interculturalism or multiculturalism?”,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38(4-5).

 

기독교 가족주의 관련 참고문헌

김양재. 2017. 『결혼을 지켜야 하는 11가지 이유』. 두란노.

김종원·성민경. 2019. 『결혼을 앞둔 그대에게』. 아르카.

김지수. 2018. 『하나님이 이끄시는 연애와 결혼』. CLC.

마셜 시걸. 2020.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 조성봉 역. 생명의말씀사.

박수웅. 2006. 『우리, 결혼했어요!』. 두란노.

박수웅. 2013. 『독신 탈출, 결혼 정복』. 두란노.

박종혜. 2004. 『진정한 결혼 혼수』. 가정행복학교.

송준기. 2018. 『숨기지 마라: 목사가 말하는 섹스와 결혼 이야기』. 규장.

유동근. 2003.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 벧엘.

이기복. 2011. 『예비부부와 기혼부부를 위한 결혼코칭』. 두란노.

하인즈 쉔호프. 2014. 『다시 듣는 결혼수업』.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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