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기윤실 공동대표)
기윤실은 2022년 올해 슬로건을 ‘공감하는 한국교회 정의로운 기독시민’로 정했습니다. 선거가 부각되고, 코로나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와 공감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분열된 사회에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번 주제를 정해보았습니다.
시민사회란?
위 슬로건 문구 중 ‘기독시민’ 관련한 내용으로 먼저 시민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려 합니다. 시민사회의 당연한 전제는 시민입니다. 시민의 의미는 ‘해방된 개인’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강원돈 교수에 따르면 해방 이전에 계몽과 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개인은 자기가 이성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 시대에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스스로 깨우쳐서 무지에 해방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며 계몽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자기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주체의식을 가지는 것, 자기의견, 자기생각을 가지는 것, 사회나 사회가 주장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념에 매이지 않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들이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에 비해 개인주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이성적’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공감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의 ‘지,정,의’ 중 ‘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가 이성적인 부분이고, ‘정’이 감성적인 부분이고, ‘의’가 윤리라고 본다면, 우리는 ‘정’인 감성 쪽에 더 가깝습니다. 따지는 것을 싫어하고, 정을 나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계획보다 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성적인 설득보다 선동에 사람들이 너무 쉽게 움직입니다. 한국의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종편뉴스 앵커나 기자 옆에 패널이 존재하는 부분입니다. 패널들은 주로 어떤 기사에 대한 해석을 해줍니다. 뉴스를 보고 시청자가 자기 생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패널들이 대신 해줍니다. 그렇지만 그 패널들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를 다루고 설명을 해주기보다 같이 흥분해서 선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의 전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민 사회가 구성되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시민의 참여, 시민의 자발성, 시민의 헌신성입니다. 먼저 시민의 참여입니다. 시민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당연히 참여가 필요합니다. 이 참여는 강요가 아닌 자발성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은 헌신성에 의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종종 강의를 하며 시민의 참여, 자발성, 헌신성을 얘기하다 보면 이 덕목들이 목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목회할 때 교인들이 교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교회가 이해하기 참 좋은 방법이고, 실은 교회에서부터 이 부분들이 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와 기독교
시민사회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의 서신은 계속해서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인사제론(Allgemeine Priestertum)을 보면 사제들에 의해서 배분되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사제가 되어 누구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해방된 성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루터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부분은 평신도들을 교육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사제가 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지식과 생각을 길러줄 수 있는 사제 수준의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루터가 성주들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중 하나인 「독일 귀족에게 고함」을 보면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강조합니다. 스스로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교리 문서를 직접 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과학에서 이야기하는 ‘해방된 개인’과 맞물린, ‘해방된 성도’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은, 해방된 개인과 비슷한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시민
한국교회와 시민으로 넘어오겠습니다. 약 100년 전에 조선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한 일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잔존하던 양반, 상민, 천민과 같은 계급을 타파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백정출신 박성춘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 선교사들과 함께 백정운동을 벌였던 인물입니다. 이 영향으로 백정들이 교회에서 자신들도 사람 취급해준다는 복음을 듣고, 몇백명씩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 부흥한 교회가 승동교회입니다. 그래서 기존에 교회에 있는 양반들이 도망가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교회는 안국동에 안동교회입니다.
박성춘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벌였던 백정운동의 결과로 고종황제는 백정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백정들도 상투를 틀고, 집에 지붕을 이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반이 지나가면 엎드려야 하는 부복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백정들도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박성춘 본인도 아마 그 때 본인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된 일화도 유명합니다. 1908년도에 세브란스에 첫 번째 의사 7명이 나오는 데 박서양은 그 7명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는 성차별 타파에도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정규교육을 받게 하고, 여성 리더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또 성경 보급과, 한글 교육에도 기여했습니다. 일례로 교회에서 성경을 직접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예배를 시작하기 두 시간 전에 글을 가르쳐주었고, 사람들이 글을 배우기 위해 교회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배움의 한’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한글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쉽고 좋은 글을 만들어 놓고 왜 500년 동안 쓰지 않았는가?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면서 자답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복음의 때에 이것을 들어서 쓸 수 있도록 숨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을 가르쳐주고 자기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 이를 통해 계급을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한국 초기 기독교의 시민운동이었습니다.
해방된 개인들의 통합
다음으로, 개인을 해방시키고, 자기 생각과 주체의식을 갖게 한 후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이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은 19세기 말 사회학자 뒤르켐(Durkheim)입니다. 뒤르켐이 자주 ‘통합’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요인으로 통합되지 않은 사회에 발생하는 아노미 현상을 꼽을 정도로 통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해방된 개인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민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시민사회를 정의하면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토론의 장’입니다. 추상적이지만 많은 사회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의입니다. 이처럼 시민사회는 시민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이성의 공적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이성을 가지고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리적 대화’입니다.
합리적이란 말은 나라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곤 합니다. 우선 영어단어 ‘Reasonable’은 이유나 근거가 있는지 묻습니다. 독일에선 이를 ‘로기쉬(Logisch)’로 표현합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영미권에서는 근거의 유무로 합리성을 판단한다면, 독일사람들은 논리적 체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란 단어를 보면, 체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독일 신학자들의 인식이 반영돼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보다 자기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에게 항상 들었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의 logic이 있느냐?” 였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조직신학을 ‘정해진 것을 가지고 연구한다’는 의미로 교의학(dogmatics)으로 이해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가 있다면, 개신교는 개신교를 대표하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점입니다. 개신교는 각 학자들이 자기의 시스템을 가지는 개별의 조직신학은 있어도 이를 통합하거나 대표하는 조직신학은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Reasonable을 번역할 때 합리적(合理的)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치에 맞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은 세계에 대한 이치가 있다고 보고, 그 이치에 맞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때, 자기 생각보다 이치를 깨닫는 여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인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주체가 되어 토론에 참여해야하는데, 그게 아니라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 옳고 그름만 생각하고 있으니 토론이 의미가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가는 문화가 자연스러운 반면 우리는 이런 부분이 약하지는 않은지 문제를 제기해봅니다.
시민사회의 역할 실종
시민사회에서 ‘다양성’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개별 주체들은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며 합의해 가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 토론의 장이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정치와 권력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갑니다. 독일의 경우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 협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경제 영역에서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낼 때 경제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기업과 정부 외에 시민사회와 종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이 윤리적인 틀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시민사회와 종교의 공적 역할이 실종되고, 정치 하나로만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이 사회가 각박해집니다. 정치가 건설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파벌 싸움만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성인 교육 관련된 법 제정과정을 보면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성인 교육 관련된 법이 유럽에 비하면 4-50년 늦게 만들어졌지만 법 자체를 보면 제일 이상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법을 만들 때 대학교수 등 전문가들이 주도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법을 주도하는 전문가들에 이로운 방향으로 만들어 집니다. 실례로, 이 법에 따르면 평생교육기관에는 평생교육사를 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평생교육사란 제도가 없었습니다. 평생교육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기관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학에 이 자격증을 따는 과정을 만들고,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관련된 대학들과 교수들이었습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이상적인 법이었고, 그 이익은 사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법에 대해 누구도 먼저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합의를 주관하는 입법부에서 바쁘다고 싸움만하다 어느 날 갑자기 법안을 일괄 통과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협의과정이 없어진 현실이 이렇습니다.
세월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분명히 시민들이 참여해야 할 바가 있었는데, 그걸 정치가 가로채 갔습니다. 그리고 정치가 가져간 의제는 실종되어버렸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시민윤리: 복음이 주는 자유
코로나 이후 이제는 온라인 시대가 됐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 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민 윤리가 새롭게 필요합니다. 의견을 이야기하고 규합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고, 한편으로 선동도 더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수십만, 수백만 명이 쉽게 움직여지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기에 맞는 시민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이 주는 자유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유대적인 기독교를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기독교로 변모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존 관습과 싸우는 일을 벌였습니다. 기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유대인화 돼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의 규례를 지키게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유대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북부까지 전도 여행을 하며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다른 고민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첫 공의회에서 내려진 결론도 바울에게는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할례와 규례를 풀어주고, 음식 규정만을 남겨두었지만 바울은 이마저도 없애버립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모두 허용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안식일도 무너집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것 하나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시민사회를 만들어갈 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유연성’입니다. 복음이 주는 원칙인 ‘양심’ 하나를 가지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신학과 사역의 중요한 모토가 ‘선한 크리스천이 바른 민주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바른 크리스천이라면, 제대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바른 민주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토론의 장을 만들어가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방된 개인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회에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는 시민들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