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깨비>가 던지는 신의 질문 앞에서,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 앞에서 上
샤인(기윤실 청년위원 우미연)
<욥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텍스트(Text)는 해석이 필요한 모든 것이고, 텍스트의 해석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컨텍스트(Context)라 한다. 텍스트가 ‘글’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다수의 정보가 문자로 이루어져 있던 과거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글은 텍스트의 한 종류인 ‘문자 텍스트’이다. 최근에는 그 어떤 것보다 영상 컨텐츠가 주된 텍스트로 부각되고 있으며, 크리스천 청년으로서 영화나 드라마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를 통해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 더욱 고민하고 묵상하게 되는 것 같다.
몇 달 전부터 욥기를 묵상해오다가 38장~41장에서 하나님께서 수많은 창조 질서와 피조물의 신비에 관해 욥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그 ‘신의 질문’ 앞에서, 문득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가슴 묵직하고 따뜻해지는 드라마로 기억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명대사 중에서 ‘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가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었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이다’,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 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라는 문장들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었다. 욥기를 읽으며 신의 뜻과 마음과 질문의 의미를 찾아가던 여정에서, 나는 다시금 드라마 <도깨비>를 다시금 정주행했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전보다 더욱 큰 울림과 감동 안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게 되었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는 도깨비, 도깨비 신부, 저승사자, 삼신할매 등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리고 4번의 생이 반복된다거나(전생과 다음 생의 존재) 자살한 자들이 지옥을 거쳐 기억을 지운 채 저승사자로 살아간다는 등의 설정은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의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사 내지 내러티브(narrative)의 측면에서는 크리스천으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깨닫고 이해할만한 기독교적 진리가 많은 장면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보며 묵상하고 은혜받은 모든 내용을 전부 나누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기에 그 중 일부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하시는 신의 은총>
– 김신(도깨비), 왕여(저승사자), 김선(써니)의 재회와 화해
자신을 질투한 왕의 칼에 죽은 도깨비 김신(공유 역)은 신의 뜻으로 다시 살아나 누군가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약 935세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 불멸의 생을 끝낼 인간 신부를 기다리던 도깨비 앞에 도깨비 집을 임차한 저승사자(이동욱 역)가 나타나고,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같은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도깨비 삼촌이 당분간 해외에 나가 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카 유덕화(육성재 역)가 삼촌 집을 허락 없이 몰래 임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후반부에 유덕화를 통해 신이 말하기도, 행동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무려 도깨비 집터를 부동산에 내놓는 아이였다’는 대사에서, 도깨비와 저승사자를 한 집에 살도록 한 것은 바로 ‘신’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같은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투닥거리다가 서로 돕기도 하며 그렇게 울고 웃으며 우정을 키워나가던 도깨비 김신과 저승사자는 기막힌 진실을 알게 된다. 과거 900년 전, 김신에게 칼을 하사하고 김신의 여동생이자 나라의 왕비였던 김선(김소현 역)을 죽인 왕인 왕여(김민재 역)가 바로 저승사자였다는 것. 무려 900년의 원한과 분노를 간직한 도깨비 김신과 전생을 기억하게 된 저승사자의 갈등과 반성과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그려진다. 왕여에게 죽임당한 김선의 다음 생인 써니(유인나 역) 역시 저승사자(이동욱 역)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하지만, 전생의 진실 앞에서 결국 헤어져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노인이 되어 임종을 맞게 된 써니는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참회하며 살았던 저승사자와 함께 손잡고 저승으로 향한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뼈아프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결국 자신의 생명을 버린 왕여에게도, 충성된 신하였던 자신을 질투하여 죽게 한 왕에 대해 사무친 원한과 분노를 씻지 못하던 김신에게도, 오라버니 김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왕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죽어갔던 김선에게도, 저승사자와 도깨비와 써니로 다시 마주한 모든 순간들은 신의 은총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알고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설령 내가 피하고 싶은 누군가와의 만남까지도 하나님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리라고 믿음의 고백을 드려본다.
<죄로부터의 자유, 죄사함의 은총>
자신의 참혹한 죄를 마주해본 사람은 안다. 그 무겁고 무서운 죄책감이 사람의 온 생애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는 것을, 사람의 온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죄로부터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죄사함의 은혜’가 진리라는 것을. 그래서 주님께 용서받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그렇게 무섭고도 무거운 죄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용서가 얼마나 강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 ‘탕감받은 빚이 많을수록, 죄가 많을수록(죄를 깨닫는 만큼), 빚을 탕감해 준 이를, 죄를 용서해 준 이를 더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누가복음 7:47)이 진리라는 것을 안다.
왕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했지만 자기의 목숨을 버렸고, 이는 스승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버렸던 가룟 유다의 행보와 같았다.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했으나, 이는 온전히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죄인의 몫은 자기의 죄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침상이 눈물로 떠내려갈 정도로 죄를 자복하고, 그로 인해 고통하는 이에게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죄에서 떠나 회개하는 것이다. 저승사자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게 된 후 죄책감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반성하지만,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기에 차마 쉽게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김신과 김선에게 악을 행하도록 조종하였던 악귀 박중헌에 대한 심판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10년 뒤, 도깨비 김신이 무(無)의 세계로 갔다가 돌아오자, 진심을 다해 김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너는 내게 사랑받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죽음의 걸음을 내딛었다. 사랑받았으나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죄를 용서해줘.” 저승사자가 된 왕여는 결국 용서받은 자로서 참 자유를 얻고,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면서 다시금 인간의 생에 대한 갈망과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된다. (물론, 반성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간신배 박중헌(김병철 역)은 악귀가 되었고 결국 심판 받고 지옥에서 벌을 받는다.)
<용서와 화해, 원수까지도 품어내는 찬란한 사랑>
인간에게는 용서보다는 복수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용서해야 할 필요도, 그 어떤 동기도 스스로 찾아낼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 스스로에게는 용서할 능력 자체가 없음도 물론이다. 그렇기에 용서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고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신’ 사랑이자 의로움이고, 이를 위한 희생 제물로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바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제 내가,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그 십자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바로 ‘내 피를 흘려 남의 죄를 사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용서라고 생각한다. 용서는 죄인 된 인간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거룩함의 발현이기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모범이다. 그리고 이 죄사함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어 생명을 잃었던 우리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골로새서 1:20), 다시금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되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나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고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이다.
도깨비가 된 김신은 약 900여년간 신적 능력을 부여받고 불멸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목도하고 누군가의 수호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본래 충직함과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던 김신이었고, 그렇기에 신이 축복으로서 그러한 능력을 부여하고 수호신의 역할을 맡겼던 것으로 보이는데(도깨비 신부 지은탁의 대사 중), 그 과정에서 김신은 더욱 성숙했고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과거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우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기도 했고, 처음 불멸의 존재가 된 직후 행악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배를 뒤집고 풍랑을 일으켜 죽이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주로 누군가를 돕거나 살리기 위해 또는 악행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능력을 사용할 뿐,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았다. 생명의 무게를 언급하는 여러 장면들과 함께, 목 매어 자살하려던 한 남자에게 샌드위치를 건네주며 딸과 함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기는 도깨비 김신의 모습에서, 대체불가능한 생명의 의미와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한 인간으로서 신의 뜻을 하나씩 깨달아가고 신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조금씩 닮아가는 김신에게서, 하나님 안에서 성화되어 가는 성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결국 도깨비 김신은, 900년의 원한과 분노와 적개심을 뛰어넘어 신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한 ‘용서’라는 것을 해내고, ‘원수를 선대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범을 보인다. 김신은 저승사자의 전생이 바로 왕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분개한 상황에서도, 자신과 함께 사는 저승사자가 미안함에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먼저 집을 나가 다른 곳에서 지내기로 한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동안의 우정과 추억에 기반한 사랑이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원수의 처지와 마음을 생각한 배려였고 선행이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하신 신의 은총이 결실하는 순간이다. 도깨비 김신은 가슴에 꽂혀진 검을 뽑아 박중헌을 심판하고, 무(無)의 세계로 가게 되었다가 10년 후(현실에서의 시간) 도깨비 신부 지은탁과의 약속에 기초해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역시 신이 미리 마련해 둔 기적의 문이었고, 혼돈과 공허로 가득한 무의 세계에서 도깨비 김신을 구원한 방법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늘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따른 구원이 강조되는데, 김신과 지은탁이 서로 언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김신이 다시 현실로 소환된다는 내용에서, 언약을 중시하고 이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도깨비 김신은 자신의 전생의 죄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저승사자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와 화해한 후, 평생 함께 지내며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미 도깨비 김신은 용서의 싹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의 세계에서 홀로 지내며, 자신과 함께하면서 시간과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수많은 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안에는 저승사자와의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도깨비 김신은 왕여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에서 참 자유를 얻었다.
사람은 무지하고 연약하며 악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로 용서하고 용납함이 없이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너그러움과 사랑 덕분에, 그 용서와 이해 덕분에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다. ‘용서’라는 신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신적 언어이고, 이 ‘공동체’는 바로 ‘교회’라는 모습으로서 이 땅에 실재한다. 인간의 능력과 의지 밖에 있는 ‘용서’를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성령이 ‘교회’와 함께 그 화해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그 용서의 몫을, 화해의 사역을, 교회라는 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명을 내가, 그리고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분량대로 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22년 4월 20일에 발송될 33호의 下편에서 계속 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