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100℃>

만화로 배운 민주주의

멍탱(기윤실 이명진 간사)

 

 

6월 항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덕에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이 시기를 직접 겪지 않은 이들에게 생소하거나 무관한 역사로 여겨질 때가 많다. 광주에서 자라고, 망월동 구 묘역에 묻혀계신 할아버지 덕에 5·18 광주항쟁과 가까웠던 나에게도 87년 6월 이야기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 대학생 때 좋은 기회로 5·18 민주화운동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고,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 놓인 6월 항쟁 이야기도 자세히 배울 기회가 생겼다. 지금도 해당과목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으나 2014년 당시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엔 교양과목으로 ‘5·18 민주화운동’ 수업이 편성돼있었다. 커리큘럼은 동학농민혁명부터 광주학생독립운동, 5·18, 87년 6월로 이어지는 민중의 역사를 톺아보는 것이 주 내용이었으며, 들불야학 출신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 수업 중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우며 부르기도 했으니 요즘(?) 수업치곤 상당히 이질적인 분위기에 많은 학생들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었다. 반면 국정교과서 논란의 도화선이 된 2013년 교학사 역사 교과서 논란 덕에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수강생들이 꽤 있기도 했다. 나 역시 해당 강의에 흥미를 느꼈었는데, 이 수업을 통해 만화 『100°C』를 처음 읽었다.

 

 

『100°C』는 가정으로부터 입신양명의 소명을 부여받고, ‘나쁜 사상’에 빠져 ‘데모’나 해대는 이들을 갱생하려는 꿈을 가졌던 주인공 영호가, 대학생이 된 후 5.18의 진실을 목도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며 시작한다. 이후 만화는 영호와 그의 가족 그리고 주변 동지들이 87년 6월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그린다. 개인이 감당하고 겪어내야 했던 수많은 역경 속에서 ‘보도연맹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사건’, ‘6·10 민주항쟁’, ‘6·29 선언’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함께 등장한다. 소위 ‘최루탄 냄새’ 한 번 맡아보지 않고 대학생활을 보낸 나로선 고문과 폭력이 난무한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지금은 586 용퇴론1)이 거론될 만큼 87년 세대에 대한 비판도 거센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희생 덕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다.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다만 지금의 586세대가 청년세대와 적지 않은 갈등을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도 그런 기류가 있었던 것을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이트칼라 선배들이 술집에서 박종철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자, 이를 지켜보던 한 후배가 “더러운 입에 함부러 종철이 이름 올리지 말아달라” 항의하고, 그 말을 들은 선배는 격분하며 “니가 구구단 욀 때 나 돌던지고 있었어! 니가 유신을 아냐, 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라고 응수한다. 최루탄 냄새는 모르고 화염병은 던져보지 않았지만, 물대포와 차벽을 경험하고 촛불을 들었던 지금의 청년세대와 중년세대의 갈등도 이와 유사할까 싶다. 앞서 이룬 업적을 후대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들과, 불완전한 업적으로 으스대며 안주하는 모습을 고까워하는 이들의 대립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그래도 87년 6월, 100°C 끓는점을 만들었던 순간은 셔츠와 구둣발, 택시 경적 소리, 선뜻 음식을 건네준 손길과 학생들이 함께 만들어 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날의 단결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때의 끓는점이 너무도 빨리 식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양김분열로 민주화 세력의 표가 갈리고, 애써 쟁취한 직선제 열매를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선점했을 때, 당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5년 전 탄핵당한 세력이 너무도 빠르게 복귀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분열해 있다.

초판 표지

 

35년 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평하고 끝내기에는 여전히 민주주의가 필요한 영역이 산재해 있다. 이럴 때 일수록 민주주의의 오래된 속성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100°C』 초판인 2009년 버전은 6월 항쟁 이야기 후에 부록으로 민주주의 학습만화 「그래서 어쩌자고?」를 수록해두었다. 해당 내용에 민주주의 특징 중 하나로 정당성(Legitimacy)을 ‘집단적으로 결정한 바에(동의하지 않아도) 그 합법성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따르게 만드는 이유’라 정의한다. 이는 다수결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개념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통해 다름의 공존을 배워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정책제안과 입법 활동은 불가능하더라도, 소수자와 소수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론의 장을 계속해서 열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예전처럼 거시적이고 거국적인 끓는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1987년 민주화 세력이 생각하지 못했던, 2017년 촛불세력이 놓쳤던 다양한 영역의 많은 이들도 본인의 자리에서 연대하며 각자의 99°C를 살아가고 있다.

언제 끓어오를지 알 수 없고, 이름 없이 사라지는 이들도 허다해 절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이 우리에게 있고, 역사가 그 증거가 되고 있으니 오늘도 냉소를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1) 50대 정치인, 80번대 학번, 60년대생을 뜻하는 586세대가 관직 따위에서 스스로 용기있게 물러나라는 주장이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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