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비혼 사이, 청년과 교회 사이
김현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무처장)
1. 비혼 담론의 등장과 확산 배경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미혼(未婚)이라는 단어는 ‘혼인은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나 아직 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습을 깨고 비혼(非婚)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혼인 상태가 아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음’이라는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미혼’을 대체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비혼 담론과 비혼주의자들을 다양한 매체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체감상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비혼’은 낯선 것이었고 인생에 결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교회 전통과 문화 안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거스르는 불순종한 일로 여겨졌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결혼은 누구든 당연히 거쳐가는 관문이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비혼’은 나라 전체의 화두가 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비혼 담론에 동의하며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고려하고 있다.
지난 십여년에 걸쳐 우리 사회에 비혼이 확산된데에는 분명한 맥락과 배경이 존재한다. 여러 요인들 가운데 두가지 축을 꼽자면 ‘여성주의의 확산’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다. 젠더 갈등, 고정된 성역할과 위계의 문제, ‘정상가족’ 신화가 야기하는 소외와 편견 등 지금의 20~30대들은 이러한 사회 환경의 위기, 가치관과 생활양식 변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1997년 IMF사태 이후 등장한 비혼 1세대가 그러했듯, 사회적 지위 획득 및 성평등의 관점에서 여성에게 불합리한 제도와 문화를 거부하며 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 중 하나로 스스로 경제적, 정서적 자립을 이루어 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남성들 또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주입해온 가부장제와 고정된 성역할의 편견 하에서 막중한 부담과 고충을 떠안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전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삶의 모양, 취향, 경제력,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며 점차 개인화되고 비혼을 선택하고 있다.
2. 청년과 한국사회 : 전망, 이생망, 관망
이 시대 비혼 담론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1980~1990년대생에게는 몇 가지 이름표가 붙었고, 이를 통해 요즘 청년들이 처한 현실과 행동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2007년에 등장한 <88만원세대>이다. ’88만원’은 당시 20대(1980년대생) 중 비정규직 노동을 하는 이들의 평균 월급으로, IMF사태 이후 불안정-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버텨야 하는 청년세대의 현실을 상징한다. 게다가 심화되는 세대 간 소득 격차와 기회 불균형으로 인해 전문가들은 당시 20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청년들에게 붙여진 대표적인 또 하나의 이름표는 ‘N포 세대’이다. 2011년, 장기화되는 취업난, 치솟는 집값 등으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거나 기약없이 미루는 청년들을 일컫는 말로 ‘3포세대’가 처음 등장했는데, 극심해지는 양극화, 무한경쟁, 각자도생, 수저계급론 등으로 벼랑끝에 몰리며 점차 5포 세대, 7포 세대도 모자라 N포 세대에 이르렀다. 청년들은 내집마련, 꿈, 인간관계 등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고, 심지어 삶까지 포기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청년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와 2019년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와 가치관의 붕괴, 자유와 기회의 박탈을 경험한 청년들이 인생의 의미와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본디 청년들에게는 푸르름, 반짝임, 뜨거움과 같은 설레는 수식어가 붙었다. 자신의 젊음과 개성, 자유와 주체성을 세상에 펼칠 잠재력과 용기를 가진 청년들은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획득하고 생애주기 과업들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며, 기대받는 세대였다. 그런데 그러한 역할과 과업, 즉 진학, 취업, 창업, 독립, 결혼, 출산, 부양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순차적으로 이행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생애 과업의 이행이 지연되거나 생략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에 청년들은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다. 자신의 노후 안정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을 만들고 책임진다는 것이큰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청년 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 급변하고 복잡하며 불확실한 사회 환경에서 어떻게든 생존해보려 몸부림쳐 온 청년들은 정서적, 경제적 기반을 다질 기회와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청년의 위기는 끝나지 않고 중년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청년들은 이처럼 홀로 버티며 서 있다. 청년들에게 ’88만원세대’, ‘N포세대’라는 비참한 이름을 붙이고 각종 어두운 전망들을 쏟아낸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대비책을 내놓거나 청년의 생명과 존엄을 지켜주지 못했다. 대신 잘 팔리는 청년 세대 담론을 우려먹으며 청년들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칠 때에도 관망하기만 했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기’ 위해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은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닌가. 그런데도 청년들이 일종의 저항이자 생존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며 고생하기 싫어해서 그런다’고 손가락질하고 말아버린다면, 그렇게 승자독식, 각자도생 사회를 만든 기성과 구조의 책임을 회피해버린다면, 청년의 삶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3. 결혼과 비혼 사이 : 통계가 보여주는 것, 삶이 말하고 있는 것
최근 십여 년간 민관에서 실시한 ‘혼’에 대한 다양한 통계자료들을 살펴보면 청년들의 인식 변화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평균 혼인 연령은 매년 높아지고 있고, 20~40대 1인 가구 비율과 미혼자 비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30~34세 여성의 증가 추이가 두드러진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고 응답하는 비율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인데 여기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30대보다 20대가 더 낮은 비율로 나타난다. 2024년 9월 조사(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에서는 20~49세 미혼자의 53.2%만이 ‘결혼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는데, 남성은 ‘경제적으로 불안해서'(20.1%)라는 답변이 1순위였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아'(18.9%), ‘현실적 결혼 조건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서'(15.8%) 등 순이었다. 여성은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아서'(17.6%), ‘가부장제 및 양성불평등 문화'(16.2%), ‘결혼하고 싶은 인연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12.4%)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결혼을 하지 않거나 기피하는 주된 이유로는 결혼자금, 주거비, 자녀교육비 부족 등 경제적 문제와 출산과 양육의 부담 및 경력 단절 우려, 가부장제 및 양성 불평등을 주로 꼽고 있다. 최근에는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응답이 늘고 있다.
친구들, 청년들과 결혼과 비혼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에서 위 통계조사들에 나타난 숫자와 응답 이면의 구체적인 사연와 정서적 문제를 마주하곤 한다.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부모님의 결혼생활이나 선배들과 친구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도 결혼을 선택하는 것을 보며 딱히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 친구가 있다. ‘저런 결혼생활이라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주는 커플이나 결혼과 관련된 대화를 나눌만한 롤모델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앞으로도 아버지를 부양해야하는 상황 때문에 연인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렵다는 친구도 있다. 넉넉하지 않고 화목하지 않은 가정환경이 자신의 흠으로 느껴지고 결혼 상대로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친구는 두가지 이유에서 비혼주의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는데, 첫번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정형화 되어있는 결혼 과정과 결혼 생활의 허례허식과 성평등하지 않은 문화, 프라이버시의 경계가 없는 생활이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의 문제로 인한 남성에 대한 불신과 공포라고 했다.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이러한 정서는 연애에서도 장벽이 되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의 삶과 고민의 아주 일부 단면이겠지만, 위 이야기는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통해 생애를 구성하는 이야기, 결혼에 관한 관행과 기준들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끼거나 저항한 이야기, 비혼 상태로 마주한 문제적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들은 전통과 정상이라는 이름 하에 암묵적으로 강요되어 온 생애주기의 질서를 더 이상 마냥 따르지 않는다. 불안하고 막막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 우선시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래서 청년들은 복잡다변화된 세상에서 각자 나름의 살 방법을 모색하며 자신만의 생애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 친구들에게 나는, 그리고 교회는 어떤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을까. 비혼을 둘러싼 숫자들, 그리고 숫자 너머의 현상을 제대로 직시해야만 청년의 삶의 질과 깊은 정서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고 사회 문제로써의 ‘혼’ 담론을 전환시키고 성숙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이 진리는 아니지만, 반드시 메시지를 내기 마련이다.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말해왔고 기성세대가 보여준 결혼의 삶과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삶과 사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모순 앞에서 청년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선택하지 않는 것에 있어 얼마나 많은 고려를 했으며 또 얼마나 두렵고 힘겨웠을지를 가늠해보자는 것이다.
4. 청년과 교회 사이 : 정직하게 묻고 답하기, 공존하며 연결되기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 옅어지고 있다. 그것은 ‘비혼이 맞고 결혼이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생애주기’를 오롯이 통과하는 것과 ‘정상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갈수록 더 환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났다. 비혼 담론은 사회 변화에 따른 대안적 길을 내는 하나의 운동이자 권리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황과 환경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청년들, 그리고 ‘정상성’을 따르지 않는/못하는 청년들은 오히려 더욱 진중하고 치열하게 삶의 의사결정 앞에서 숙고한다. 그리고 이 때 기독 청년은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사회적 환경, 개인의 고민, 담론적 이해 위에 성경과 신앙이라는 한 겹의 기준을 더 고려해야 하는 형편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얼마나 성찰하는지, 지금 고민하는 것의 출발이 어디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신앙적 가치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등등 떠오르는 질문과 주어진 질문에 정직하게 임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고유함을 발견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고,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는 그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을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결론을 만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결혼과 비혼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언어와 대답이 생겨날 것이다.
비혼주의자들과 학자들은 비혼을 고려하는 사람이 준비해야 할 필수적인 것으로 경제력(직업)과 친구(공동체)를 꼽는다. 비혼을 고민하는 기독 청년에게 교회 공동체가 든든하고 안전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을 상상해본다. 왜 상상이라고 하냐면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 교회에서 ‘비혼’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생애주기 담론, 전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개인과 혼인에 대한 무수한 논의들과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는 와중에도 교회가 하는 말이 겨우 “애인은 있냐”, “언제 결혼 할거냐”, “더 늦어지면 큰일 난다”,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된다”는 등 프라이버시 침해와 차별성이 다분한 언어에 멈춰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는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들이 먼저 이야기 꺼낼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훈계없이 경청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는 결혼 전통을 고집하며 훈계하고 압박해서는 안된다. 기다려주고 같은 편에서 고민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백번천번 낫다. 그렇게 청년과 교회가 공존할 수 있고, 서로 안심하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청년부 예배 후 결혼을 앞둔 한 청년이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면서 “나 먼저 갈게, 너희도 할 수 있어!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장년부로 올라와!”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러움과 어색함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청년들, 승자의 미소를 머금은 예비신부. 청년을 결혼대기자 취급하며 소위 결혼적령기를 넘긴 청년들에게 눈총을 주는 목회자까지. 그 완벽한 기괴함에 친구는 그 교회를 탈출했다. ‘결혼=신분상승, 미혼=낙오자’로 여기는 분위기는 비단 그 교회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비혼은 교회 안에서 금기시하거나 근절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회자되어야 하고 공동체의 것으로 끌어안아 다듬고 가꾸어야 한다. 결혼과 비혼을 양자택일해야하는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결혼과 비혼 사이에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 청년들이 만들어 낼 다채로운 삶의 모양과 갈래들에 주목해야 한다. 청년들의 고민과 도전과 선택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의 가장자리를 확장시킬 것이다. 해서 보다 평등하고 인격적인 관계맺기를 도모하며,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교회는 비혼 청년을 포함한 그 누구도 ‘소외’와 ‘고립’을 느끼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 전통과 신학을 근거로 교회 ‘강단’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메시지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한 사려깊은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의 의미로 청년과 교회가 연결 될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위 글은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의 인카운터포럼 ‘핵개인시대 혼을 말하다’에서 김현아 사무처장이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