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광주기행을 준비하며, 우리는 사전모임에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고
5‧18 관련 현대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단순한 역사 답사가 아닌,
문학과 기록, 그리고 서로의 질문으로 5월 광주의 기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광주를 직접 걸으며 마주한 아픔과 연대,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우리의 고민과 다짐―
이 후기는 그 걸음에서 나온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2025잇슈ON] 광주기행: 소년이 남긴 질문 후기
19800518, 그날을 오늘로 묻다
글: 광주기행 참여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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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245 – 인수
![]() (이혜경, 민주의 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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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탄환은 아니었을까?”
헬기에서 전일빌딩에 있던 광주 시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쐈던 군인은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시민들이 떠오르기는 했을까. 사격 후 전일빌딩에 올라가 시체를 발로 차고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 꿈속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마주했을까.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일빌딩을 다시 방문해 남아있는 총탄 자국을 보며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성하고 있었을까.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고 생각과 말을 나눴을 때부터 당시에 시민들을 학살한 계엄군에게 몰입됐다. 그들은 어떻게, 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계엄군 내부에서 일어났던 폭력 및 구타 행위와 너희들이 이렇게 맞는 이유는 광주에 있는 ‘폭도’들 때문이라는 거짓 선동과 가스라이팅 때문일까. 광주에 ‘빨갱이’들이 있다는 말을 믿고 이들을 처단하는 것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당시에 계엄군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너무나도 거대한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집단 학살 행위에 참여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가? 민주 시민 사회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갖는 명예가 무저갱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계엄군 한 명 한 명의 반성과 참회가 모여야 한다. 사이버 내란, 윤 어게인과 같은 ‘집단 광기’에 잠식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폭력과 증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살인 행위의 최전선에 있었던 당사자들의 고백이 절실하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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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방문할 때 때마침 <소년이 온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글로 만났던 동호를 광주에서 여러 모양으로 보게 되었다. 동호가 마주했을 총과 진압봉, 잔인한 시신과 태극기로 감싼 관. 중학생이 마주하기에는, 인간이 마주하기에는 지독히 잔인한 것들뿐이었다. 동호의 실제 인물인 고 문재학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앳된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전시 공간을 돌아다니며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가장 많이 떠올랐다. 기록되어 있던 여러 증언들을 보면 당시 광주 시민들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 없이 폭력에 쓰러지는 이웃을 보자, 두려움보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시위에 가담했다고 한다. 또한 그곳에는 당시 민주화 운동을 위해 학생들이 쓴 전단지와 사망자 인적 사항, 한 학생의 일기 등 실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불의한 사건 앞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함께 움직였는지 알 수 있었다. 기록관 담당자분과의 대화도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이 일을 하시게 되었냐’는 질문에 담당자분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광주 사람이면 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의 연대와 민주화 운동은 지금 우리에게로 온다. 불의에 맞서고, 이웃의 아픔에 연대했던 외침 앞에 서게 된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518민주광장 분수대, 시계탑, 구상무관, 구전남도청 – 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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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광장에 발을 내디뎠다. 상무관과 도청은 복원 작업 중이었고 가려 놓은 펜스에는 ‘오래 기다리신 만큼 제대로 복원하겠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찰나에 몇 가지 의문이 일었다. 광주 시민들은 오래 무엇을 기다려야 했을까. 그들은 왜 끊임없이 기다려야 할까. 기다림의 끝에 단 하나라도 그들을 온전히 보상해 줄 수는 있는 걸까.
광장을 쭉 걸어 분수대 앞을 지났다. 분수가 평온히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평온함이 이상한 기분을 주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목숨을 다한 각오와 항쟁 의지의 뜨거움이 가볍고 청량한 물줄기와 대비를 이루어서였을까. 가느다란 물줄기의 다채로움에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그 아름다움을 어느 것과도 연결 지을 수 없었다. 물줄기는 길을 잃어, 무엇도 축하하거나 기념할 수 없어 보였다. 중심을 잃은 채 빙글빙글 떠도는 철없는 멜로디 같았다.
오후 5시 18분, 광장 가운데 우뚝 솟은 시계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전자 종소리 같은 음색으로 멜로디만 울려 퍼졌는데, 환청처럼 사람들의 울분 섞인 합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힌츠페터 기자의 ‘시계탑은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 맴돌았고, 그래서 그 시계탑이 5.18의 변치 않는 진실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단단히 고정된 시계탑의 모습은 사건이 일어났음을 묵묵히 증명하는 듯 든든했지만, 동시에 그 굳건함이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슬픔을 불러왔다.
기행 내내 여러 장소를 거쳤지만, 실제로 겪지 않은 자로서 사건의 주위를 맴돌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래서 때론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광장을 지키는 시계탑처럼, 무거운 진실을 묵묵히 품고 견디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애끓는 마음과 따가운 햇살을 동시에 견뎠던 광장에서의 순간을 간직하여, 그날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고 아파도 내려놓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전남대/조선대 – 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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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다녀왔다. ‘다녀오다’라는 말로 1박2일의 여정을 품을 수 있을까. 그 시간 동안 나는 광주였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에 모였다. 전날 선포된 계엄령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학교를 점령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출입을 막아섰고, 곧이어 진압봉을 휘두르며 거칠게 몰아냈다. 학생들은 도망치며 시민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이것이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나는 대학생으로서, 과연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 그날의 용기와 결단은, 어렵고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역사의 기록으로만 읽던 5월 18일의 광주는, 현실의 공간에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전남대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뛰고, 잔디밭에서는 사람들이 누워 쉬고 있었다. 정문으로 걸어나갔다. 사적지 1호임을 알리는 돌판이 우리를 맞았다. 오늘날 수많은 학생들이 걷고 지나칠 그 자리, 평범해 보이는 그 돌은 여전히 5·18의 정신을 품고 매일 학생들에게 묵묵히 역사의 의미를 건넨다. 나 역시 그 정신을, 그 울림을 마음속에 새겼다.
광주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켜내려 했던 이들의 용기와 희생이 스며 있는 곳이다. 1980년 그날,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광주는 지금도 묵묵히 증언한다. 나는 여러 곳에 메모를 남기고 왔다. 너무 늦게 알게 되어 미안하다고, 이제는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518자유공원(구 상무대) – 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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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위치한 518자유공원(구 상무대)에 함께 갔을 때, ‘상무대는 이름만 들어봤는데 여길 실제로 들어온다니!’라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곳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민간인을 불법 연행·구금하던 상무대 부지를 정비해 만든 공간이다. 역사 현장 자체가 그때의 상황과 아픔을 그대로 품고 있다. 전시관에는 민주화운동 발생 전후 상황이 시기별로 정리돼 있었고, 당시 상무대의 구조와 용도, 피해자들의 증언과 사진 자료가 구체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실제 피해자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과 당시 촬영된 기록물들이 그날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전시를 따라가며 좁은 구금실, 차가운 콘크리트 벽, 쇠창살 박힌 창문을 보며, 그 안에 있었을 사람들의 공포와 답답함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안내문에는 구금자들이 겪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석방 이후에도 이어진 삶의 상처가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역사 견학이 아니었다. 신앙 안에서 인권과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518자유공원은 과거를 기록하는 장소이자,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전해야 할 사명을 일깨워주는 공간이었다.
518민주묘지 –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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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 묘지는 생각보다 거대하고 웅장하고 본격적이었으며 압도감이 느껴졌다. 현충원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히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멀리 중앙에 보이는 추모탑이 정말 높고 거대해서 보통 스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곳이 맞구나, 그래야만 하는 사건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의 분위기는 고요하지만 쓸쓸하진 않았으며,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묘역 안의 봉안소에서는 희생된 분들의 영정사진들을 보았다. 영정사진으로 쓰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사진들이었다.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이 없어서 무궁화 사진으로 대체된 분들도 계셨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을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개인이 아니라 이념에 관련된 거대한 집단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슬프다고 생각했다.
내가 광주에 직접 가기로 결심했던 당시의 동기는 막연하게 ‘역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에서도 공부를 위한 증거 자료나 영상, 사진 등은 원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각각의 사적지에서 전시를 위해 재현되고 새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보며 깨달은 진짜 동기는, 내가 듣고 배운 5‧18 민주화 운동이 이해하기 좋게 편집되고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비극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일이 일어난 곳을 직접 가 보기 전까지는 임진왜란 정도의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겪었던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보다도, 그들이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개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의 얼굴에 내 얼굴을 대입하고, 그 자리에 내가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들도 피 흘리는 육체가 있었고, 다양하게 생각했고, 다른 목소리로 외쳤고, 다른 방식으로 상처 입었고, 각자의 슬픔과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흔적을 찾을 때 슬펐고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안도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선주와 동호 같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에게 이입하며 느꼈던 슬픔과 분노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무언가를 찾은 듯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 흐릿했던 형상들이 멈춘 이미지가 아니라 움직이고 소리도 내는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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