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기독교 세계관, 영역주권, 일반은총.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들은 처음부터 무엇을 위해 등장했을까요? 그리고 오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이 사상들을 어떻게 읽고 실천해야 할까요?

지난 10월 19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숭실대학교 가치와윤리연구소가 공동주관한 「아브라함 카이퍼 세미나 — 아브라함 카이퍼와 한국기독교(운동)」가 열렸습니다. ‘포이동 ― 카이퍼 ― 광주’를 주제로, 카이퍼의 사상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한국의 기독교 시민운동이 나아갈 길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아브라함카이퍼세미나(261019)

카이퍼는 왜 싸웠을까?

발제를 맡으신 김정기 연구원님(네덜란드 위트레흐트신학대학교 신칼빈주의연구소)은 카이퍼가 활동했던 19세기 네덜란드의 상황부터 이야기를 풀어 주셨습니다. 당시 국가는 교육과 교회에 깊이 개입했고, 기독교 학교는 재정 지원에서 배제되는 등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카이퍼는 이러한 국가의 통제에 맞서 정치·사회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역주권은 단순히 사회의 여러 영역에 역할을 나누어 주는 개념이 아닙니다. 국가가 교육과 교회, 시민사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권한에 한계를 두고, 각 영역의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일반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를 넘어, 사회와 국가에 나타나는 악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일에 시민과 여러 기관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끄는 개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머물지 않고,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함께 행동하도록 만드는 실천의 지침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상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정기 연구원님은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과 광주민주화항쟁을 통해 그 가능성을 살펴보셨습니다.

포이동 주민들은 오랜 시간 쌓아 온 삶의 터전과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지만, 국가의 이주 정책과 개발 과정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주민들의 삶을 과도하게 통제하는 동시에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 역시 국가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 시민의 영역을 침범하고 폭력을 행사했을 때, 시민들이 이에 저항한 역사로 조명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카이퍼 자신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에 맞서던 카이퍼는 총리 재임 시절 인도네시아 아체인에 대한 군사적 폭력과 철도 파업 진압에 관여했습니다. 기독교인이 권력을 잡는다고 국가가 저절로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엇에 맞서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

이어진 토론에서는 발제의 문제의식이 한층 넓어졌습니다. 국가 권력의 남용에 맞서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박현철 대표님(청어람ARMC)은 국가가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할 때뿐 아니라 돌봄과 양육, 노동자 안전, 장애인 인권 등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에도 시민의 삶은 위협받는다고 짚으셨습니다. 기독교 시민운동은 국가를 견제하는 데서 나아가 당사자들과 함께 권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회의 자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과 보편적 인권을 지키는 일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항의 과정에서도 상대를 혐오하거나 악마화하기보다 사랑의 힘이 드러나야 한다는 제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손은정 목사님(영등포산업선교회)은 국가를 넘어 거대 기업과 시장 권력도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2024년 쿠팡 택배노동자 정슬기 씨의 과로사 사건을 계기로 기윤실과 영등포산업선교회, 복음주의 교회, 시민사회가 함께한 기독교 시민사회 대책위원회의 활동도 소개해 주셨습니다. 국회 청문회와 재발 방지 약속을 이끌어 낸 연대의 경험은 기독교 시민운동이 기업 권력과 노동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성신형 교수님(숭실대학교 가치와윤리연구소)은 카이퍼의 사상을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에 맞게 읽어야 한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일만큼이나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대와 대화 역시 중요한 윤리적 실천이라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정병오 대표님(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카이퍼의 사상이 실제 정치와 사회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서로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적대시하는 현실과 시민단체의 권력화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국가 권력뿐 아니라 시장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사회를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 스스로는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도 남겨진 과제입니다.

한국의 현장에서 다시 읽는 카이퍼

참석자들의 질의와 토의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와 특혜를 기대하는 크리스텐덤의 환상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청년과 여성의 참여 및 문화·예술 영역의 자율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장애인권 현장에서는 당사자의 경험과 주체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정기 연구원님은 카이퍼의 영역주권이 기독교인의 사회 지배를 뜻하지 않으며, 각 영역에서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카이퍼의 사상은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며,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좋은교사운동 등 우리 현장에 축적된 실천과 경험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이퍼가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에서 기독교를 보호하는 정부를 지지하는 논리로 소비되는 현실도 논의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국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저항하고 각 영역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카이퍼의 유산, 우리 시대의 실천으로

이번 세미나에서 모든 질문에 하나의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대신 기독교 시민운동이 무엇에 맞서야 하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질문들이 남았습니다. 국가 권력의 남용뿐 아니라 공적 책임의 방기와 시장 권력의 독점에도 맞서야 한다는 것, 교회의 자유를 넘어 모든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저항의 과정에서도 환대와 대화, 연대의 가능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이퍼의 사상을 아는 것과 그 사상을 오늘의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다시 묻는 일은 결국 우리가 오늘 무엇을 위해 행동할 것인지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을 더 깊이 이어 갈 자리가 내년에 열립니다.

2027 한국 카이퍼 컨퍼런스

카이퍼의 유산, 공공영역, 그리고 한국 사회

2027년 2월 25일(목)부터 27일(토)까지, 숭실대학교에서 열립니다. 기윤실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에 열리는 이번 컨퍼런스는 카이퍼의 신학적·사회적 유산을 오늘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기독교 신앙과 공공영역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과거의 사상을 배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사회를 고민하는 자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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