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빚진 자를 사랑에 빚진 자로 만드는 교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의 수입은 우리 가족이 생활하기에 늘 부족했다. 거기다가 4남매가 학교에 다니면서 매월 혹은 분기별로 내야 하는 수업료는 가계경제에 큰 부담이었다. 그러기에 때를 따라 요구되는 자녀들의 교육비를 부담하기 위해 어머니는 늘 빚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자가 비싼 사채였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자와 원금을 제 때 갚는 신용을 가졌기에 그래도 필요할 때는 빚을 낼 수가 있었다. 그 덕분에 4남매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지금의 나도 이렇게 있다.

시대가 많이 흘렀고 한국 사회가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가정이 빚을 지고 산다. 물론 주택이나 직장 등 빚을 갚을 수 있는 신용의 범위 내에 있는 빚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신용의 범위를 벗어나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을 경우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빚이 자신의 신용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누군가에 교회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도들의 빚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하고 무관심했다. 이해는 된다. 교회 내 교인간 다양한 형태의 금전거래로 인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내 다양한 분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문제를 수없이 많이 보고 자랐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빚을 지고 살수밖에 없는 교인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교인들 간에 금전 거래를 하지 마라’는 비현실적인 지침만을 고수했기 때문에 음성화되어 더 확산되고 크게 문제가 되는 측면이 크다.

예수를 믿은 우리도 세상에서 산다. 육을 입고 살기에 먹고 입어야 하고 살 집이 있어야 하고 자식을 키워야 한다.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실직이나 질병, 자녀교육, 파산 등의 문제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온다. 당장 빚을 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최선을 다해 빚을 갚았지만 여러 상황에 몰려 파산의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마치 빚을 지고 사는 교인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어떤 개입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무언가라도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떻게든 행동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 사회의 빚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 당연히 국가가 이 문제에 일차적인 책임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 복지를 더 확충해야 하고 빈곤층에 대한 공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선 빚 문제에 대한 대책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나서더라도 빈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또 빚 문제는 단지 돈 문제를 넘어 한 사람의 자존심과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만질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이 부분은 이웃과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교회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확장된 가족이기도 하다.

교회들 가운데는 이 문제에 개입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교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기윤실이 나서기로 했다. 기윤실은 올해부터 가계 부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 부분의 전문가들을 모아 대안을 모색하고, 이 부분에서 나름대로 실천해온 교회들의 경험을 모아 몇 가지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개별 교회의 규모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실천 모델들을 올 하반기 정도까지 제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기윤실의 ‘부채해방운동’에 회원들과 교회들의 더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59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_ 정병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