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깨비>가 던지는 신의 질문 앞에서,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 앞에서 下

 

샤인(기윤실 청년위원 우미연)

 

<쓸쓸하고 찬란한 도깨비,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도깨비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도깨비 신부, 가슴에 꽂힌 검이 뽑히면 불멸의 생을 끝내고 드디어 죽을 수 있게 되는 도깨비,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도깨비 가슴에 꽂힌 검을 뽑을 수 없는 도깨비 신부,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않으면(검을 뽑지 않으면) 그 존재 의미가 사라져 계속해서 더 자주 죽음의 위기를 맞는 도깨비 신부. 이와 같은 설정들을 통해 결국은 ‘김신이 죽지 않으면 지은탁이 죽게 되고, 지은탁이 죽지 않으려면 김신이 죽어야 하는’, ‘지은탁이 죽어야 김신이 죽지 않고, 김신이 죽어야 지은탁이 죽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신은 말했었다.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 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내가 죽지 않으면 너가 죽고, 내가 죽어야 너가 사는 운명.” 신의 질문은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선택. 신의 장난인가, 신의 저주인가 싶은 그 고약한 상황에서 도깨비 김신도, 도깨비 신부 지은탁도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말한다. 너를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그 선택을 하려고 한다. 결국, 악귀 박중헌을 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깨비 김신의 가슴에서 검을 뽑게 되고 그렇게 김신은 불멸을 끝내고 무의 세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 지은탁과의 언약에 따라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김신과 행복한 나날을 누리던 것도 잠시, 지은탁은 아이들이 탑승한 어린이집 버스 차량을 향해 돌진하는 트럭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한다.

 

 

도깨비 김신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복음 15:13)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도깨비 신부를 살린 도깨비, 그리고 이후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어린 아이들을 살린 도깨비 신부. 이 둘의 관계는, 마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마서 5:8)와 그의 신부 된 교회(고린도후서 11:2, 에베소서 5:25)와도 같다.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것을 결단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신부인 교회의 사명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그리고 윤동주의 <십자가> 시의 한 구절을 읊어본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와 쓸쓸하고 찬란한 도깨비는 어딘가 닮아있다.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 십자가 사랑>

도깨비 김신이 묻는다. “천년 만년 가는 슬픔이 어딨겠어. 천년 만년 가는 사랑이 어딨고.” 도깨비 신부 은탁이 대답한다. “난 있다에 한 표.” 다시 김신이 묻는다. “어느 쪽에 걸건데, 슬픔이야 사랑이야? 은탁이 대답한다. ”슬픈 사랑?“ 그래 맞다, 나도 알고 있다. 그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 바로 십자가 사랑이다. 도깨비의 불멸을 끝낸 것은 바로 도깨비 신부에 대한 도깨비의 희생하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꼭 그와 같이, 이 세상의 죄의 사슬과 저주를 끝낸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하는 십자가 사랑이었다.

신이 그 오랜 900년의 시간동안 도깨비 김신에게 기대하고 배우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품어내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누군가의 수호신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벌과 축복의 중의적 의미가 있었던 불멸의 세월은 검과 함께 지나갔고, 도깨비 김신은 새롭게 신의 일부 권한을 대행하는 영원한 수호신의 역할을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우리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그러한 사랑을 배우고 있는가. 그러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땅을 통치할 수 있을만한 존재인가. 도깨비 김신과 그의 신부 지은탁처럼 사랑을 배우고 행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교회이고, 그 천년 만년 가는 슬픈 사랑을 영원히 지켜내야 할 사명이 교회에게 있다.

 

<생의 매 순간마다 선을 행했던 자, 나의 묘비명은>

도깨비 김신을 모시던 유신우(김성겸 역)가 죽자, 김신은 그를 위해 묘비명을 적는다. ‘생의 매 순간마다 선을 행했던 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그 글을 보는데 정말 부러웠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애를 무어라 평가하실까. 나의 묘비명은 무얼까. ‘생의 매 순간마다 사랑을 행했던 자, 여기에 잠들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나 그 문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운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함께 머뭇거리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로마서 8장을 읽고 암송하기로 한다. 그리고 결국 믿음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

마지막 회에서 도깨비 김신이 말한다. “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가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었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이다.” 내 인생에서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누군가가 내 인생을 지탱해주었고 격려해주었고, 위기의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셨고 내 곁에 머무셨음을 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이 보낸 사람으로, 누군가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어야 함도 알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곁에 머물러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매 순간 말씀해주시기 원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닮아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던 드라마 <도깨비>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숙제가 남아있다. 생의 매 순간마다 사랑을 행하는 것.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죽는 것. 누군가에게 신이 보낸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 거룩한 사명 가운데 성령님께서 힘주시고 나를 견인해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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