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해를 마치며.
기윤실 30년 역사의 유산(legacy)은 존귀한 존재감이라고 생각된다. 기윤실 공동대표를 맡은 지 아직 몇 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외부에서의 기윤실에 대한 신뢰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활동이나 운동의 열매들이 있겠지만, 그런 사역의 결과가 아닌 기윤실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감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유산이다. 존재에 대한 신뢰의 부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본회퍼 목사님은 행위에 대한 존재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악한 존재는 악한 행위보다 더 심각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신뢰가 형성된 이유는 기윤실 창립자들과 지난 역사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참여자들의 정직한 헌신과, 그런 정신을 단체에 녹여 제도화시킨 결과라고 보여진다.
다른 한 가지 유산은 복음주의적 진보 성향이다.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사상은 자유롭고, 개인의 삶은 경건과 절제를 고수하지만 사회적 개혁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것으로 보인다. 양 진영에서 모두 배척될 여지를 안고 있지만, 양쪽에서 말을 걸어오기 쉽고 개방성을 가질 수 있는 점도 있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그 동안 마음으로 섬긴 모든 참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30주년을 앞두고 작년에 기독경영연구원을 통해 컨설팅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수 개월간에 걸친 컨설팅의 결과는 다양한 제안으로 이어졌는데, 기윤실이 지속적인 운동성을 가지려면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기본요지이다. 존재에 대한 긍정적 측면의 유산을 가졌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기윤실의 반성.
지난 상반기 진행되었던 비전컨설팅의 결과를 개인적으로 해석하자면 ‘동력의상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력의 상실을 운동성의 취약과 역량의 결핍으로 구분해서 논의해보려고 한다. 전자는 존재와 행위의 격차이고, 후자는 열망과 역량의 격차이다. 존재-행위의 격차는 존재는 선한데 악한 행위를 하는 데서 오는 격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격차이다. 여러 곳에서 기윤실이 한국 기독교계 여러 단체들을 아우르는 상위(umbrella)조직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채해방운동 컨퍼런스에서도 유사한 요청을 들었다. 혹은 이러저러한 운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존재에 대한 기대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열망-역량의 격차는 사명을 따라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데서 야기되는 격차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된 원인이 그 동안 기윤실에서 시작하여 독립해 나간 여러 기독교 전문단체들로 인해 운동가들이 빠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기독교계 대부분의 전문단체들이 공동으로 겪는 세대교체의 실패를 그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전혀 근거 없는 설명은 아닐것이다. 기윤실은 제도(institution) 구축에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여 아직도 사람 의존적이고, 운동본부별함께 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이 부족하며, 자치위원회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어렵고, 지역기윤실들의 조정과 협력도 원활하지 않다.
새로운 30년을 향하여.
기윤실 30년 역사의 유산은, 큰 자산이면서 이제 큰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10년 주기로 본다면 3세대의 리더십 그룹들이 희생하며 여기까지 일구어 왔다. 우리에게남겨진 이 유산을 잘 관리해 가는 것은 지금의 리더십그룹의 몫이다. 서른 해를 마치며 새로운 서른 해를 기대하며 고민하는 것은 우선, 앞서 지적한 두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먼저 존재-행위 격차를 줄이는 방향의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처럼 되지 않도록 운동을 통해 실천을 지향하는 단체로서 운동력을 확보하는 것이필요해 보인다. 이 운동의 방향은 우리가 선택한 핵심가치인 정직, 책임 및 정의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핵심가치는 운동의 방향을 설정해줄 뿐만 아니라 운동을 펼쳐나갈 때 경계를 설정해주기도 한다. 운동을 결정할 때는 가치적합성과 함께 운동시급성, 기윤실 주도성, 수행역량 및 회원수용성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가지 핵심가치가 개인, 교회 및 사회의 영역에서 모두 적용이 되는 방향으로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두 번째는 열망-역량의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 열망이 있고 운동을 할 마음이 있어도 영적 전투력이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 올해에 운동을 주도할 본부를 다섯 개로 확대했는데, 자발적불편운동, 교회신뢰운동, 좋은사회운동, 바른가치운동, 그리고 청년운동이그것이다. 현재는 본부장과 함께 운동을 펼칠 참여자가 너무 부족해서 함께 운동할 사람을 찾는 것이 큰 과제이다. 그리고 역량확보를 위해서는 기윤실 동력에 도움이 되는 엔진역할을 할 수 있고 운동의 실행력을 높여주는 기반연구가 절실하다. 우리는 운동단체이므로 연구에 집중할 필요는 없으나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지고 있어서 순진한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힘있는 운동을 위해서는 바른 이해가 필수이다.
이렇게 두 가지 격차를 줄이는 작업을 한 후에 할 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의 존재와 열망에 대한 재점검이다. 앞서 두 격차를 언급할 때는 존재와 열망은 주어지고 괜찮다는 가정하에 논의를 하였지만, 우리의 존재와 열망이 과연 향후 30년을 향해 달려갈 그런 모습인지를 반드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후 추가적으로 할일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만물의 통일을 위해 기독교 윤리적 차원의 운동을 펼쳐나가는데 있어서 반드시열매, 즉 결과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운동의 대상과영역이 실제로 회복되고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연간 사업목차가 회의, 준비작업,논의 등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 변화를 주도해내고 있는지를 엄밀히 따지고, 존재-행위-열매로 이어지도록 치열한 싸움에 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61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_ 배종석 공동대표(고려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