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닥치는 운명이나 짐승에게 닥치는 운명이 같다. 같은 운명이 둘 다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가 죽듯이 다른 하나도 죽는다. 둘 다 숨을 쉬지 않고는 못 사니,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전도서 3:19, 표준새번역)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채식일 것이고, 개도축 반대 일 수도 있고, 유기동물 보호이거나, 야생동물 보호일 수도 있다. 각자의 부르심대로 나의 마음, 나다움이 있을 것이며, 내가 닿는 현실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 당면한 현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동물혐오 때문이라는 분명한 인식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내 능력 의지하는 적금이나 보험을 들기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알아보면서, 내 주변에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문제에 더 관심이 가는지, 어떤 단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데 그렇게까지 소극적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지를 돌아보자.
죽어서야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퓨마 호롱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호롱이는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습니다. 이 무거운 마음도 잠깐이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동물 쇼를 보고 있으며 동물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명을 누리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습니다. 국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 이른바 ‘펫팸족’의 인구는 1,20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휴가철이나 명절마다 수만 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진다는 보도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기윤실은 이런 사회 이슈를 기독교윤리학적으로 접근하여 포럼을 열었습니다. 동물신학과 동물윤리, 기독교적 동물권의 개요와 흐름을 확인하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계에서 자행된 동물 학대와 차별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주도해야 할 동물윤리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기독인이 어떤 것을 실천할 수 있을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때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서구의 이성 중심적 사고와 이분법적 철학과 신학,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동물신학의 궁극 과제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간혹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들먹이며 이의제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신본주의야말로 가장 인본주의적인 것이다.”며 일갈했습니다. 하나님의 채식 명령 근거를 성경에서 확인시켜 주시며, 육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숨결이 곁든 피조물’을 향한 학대와 폭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물푸레생태교육센터 활동가로 재직하신 이박광문 활동가는 생태학을 전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생태학자로서 4대강 사업, 공장식 축산, 동물실험 등의 현실을 마주하며 ‘책상’이 아닌 ‘현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본인의 경험을 소개했습니다. 그간 우리에게 어쩌면 생소할 수도 있었던 동물권을 층위에 따라 ‘종 내 동물권’, ‘전일적 동물권’, ‘관계적 동물권’으로 나누었고 그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런 동물혐오가 만연함을 분명히 알지만,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윤택한 삶을 위해 적금이나 보험은 열심히 알아보면서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피조물의 비극은 관심 갖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기윤실 기독교윤리연구소장이신 장신대 고재길 교수는 그간 기독 시민운동 단체와 기독교윤리학계에서 동물신학과 동물권을 함께 놓고 대화한 사례가 거의 없었기에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간 참여한 어떤 세미나보다 뉘우침이 많은 시간이었다고 하며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 작은 것부터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생태계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했다고 봅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파괴와 유린을 거부하는 길을 걷는 것이 훗날 주님 앞에서, 후손들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지 않을까요?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동행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