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는 미국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다. 미국의 백인들은 일상의 삶에서 흑인들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거기에서 이 세상의 “작은 자”(마 25)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보았다.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했던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들과는 달리 ‘작은 자’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흑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본문 중)

본회퍼의 생애와 신학, 다시 읽기②

본회퍼, 미국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다[1]

 

고재길(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

   

본회퍼(1906~1945)는 39년의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미국을 두 번 방문했다.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 간 신학연수를 했고(1930-1931), 1939년 여름에 뉴욕에 잠시 체류했다. 1931년 9월에는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뉴욕에 머무는 동안 할렘에서 복음과 열정이 가득한 흑인교회를 만난 것은 본회퍼의 신학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변화는 장차 고난받는 유대인을 변호하는 그의 저항적 삶을 형성하는 기본 동인이 되었다.

 

본회퍼와 유니온 신학교

본회퍼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신학생들과 여러 번의 토론을 한 후에, 막스 디스텔 관리감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본회퍼는 자신의 실망과 걱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곳에는 신학이 없습니다. … 그들은 실질적인 근거나 명백한 길을 제시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떠들어댑니다. 신학생들은 보통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 살 정도인데 교의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더군요.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도 모른답니다. 그리고는 진보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표현에 흠뻑 취한 나머지 근본주의자들을 비웃지요. 하지만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2]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들은 신학적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보다는 실제 문제의 해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본회퍼는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목회를 제대로 하려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신학적 작업과 지적 준비를 경시했다. 그들은 ‘진짜 신학’을 외면했고, 정치와 경제 이슈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심지어 복음을 우리 시대와 상황에 맞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루터의 ‘노예의지론’이 강조하는 복음의 본질, 즉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회퍼의 경험에 의하면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들은 “약간의 이상주의와 약간의 솜씨”만 가지고 있으면 목회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

본회퍼가 옳게 관찰한 바와 같이 유니온 신학교는 미국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신학생들은 신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진지함을 잃어버렸고, 복음의 본질적 내용을 경시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현장을 어둡게 만들었다. 뉴욕의 백인교회에서는 사회단체와 유사한 집단이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인 교회를 밀어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본회퍼는 뉴욕의 대형교회에서 진행되는 주간 프로그램과 일간 프로그램을 보면서 교회가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교회 안에서 쉬지 않고 열리는 다과회, 강연회, 연주회, 자선 행사, 각종 운동 경기, 오락, 볼링, 세대별 댄스 모임이 교회로 하여금 자선과 사교에 주력하는 것을 정체성으로 삼는 집단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4]

 

유니온 신학교 시절의 본회퍼, 세번째 줄 맨 왼쪽이 본회퍼. ⓒ에큐메니안

 

본회퍼와 흑인교회

본회퍼는 1939년 6월 12일에 미국을 두 번째로 방문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곧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행을 결정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징집을 피하고 싶어했던 그를 위해 그의 친구 폴 레만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와 다른 신학교에서 본회퍼가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보았다. 레만은 본회퍼를 “젊은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신학자이고, 독일의 위태로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충실히 밝히고 영속화하는 일을 해온 젊은 목사들 가운데 가장 용기있는 목사”로 소개하였다. 본회퍼의 일기장에는 26일간 짧게 미국에 체류했지만 그 기간 동안 배운 것이 지난 1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회퍼는 첫 번째 미국 방문 중이었던 1931년 뉴욕 할렘의 아비시니안 침례교회의 파월(A. C. Powell)목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에게 신학의 방향성과 목회의 중심을 배우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참된 성도의 교제로 가득한 역동적인 예배를 경험했다. 이것은 유니온 신학교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적 영향 아래에 있었던 뉴욕의 백인 교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었다.[5] 또한 본회퍼는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열띤 토론을 했다. 본회퍼는 실제로 전차, 선로, 버스가 인종에 따라 분리된 워싱턴 남부에서 인종차별의 증거를 보았다. 흑인과 함께 작은 식당에서 식사하려고 했지만 주인으로부터 거부당했다. 본회퍼는 1939년 7월 5일, 남부 출신의 신학생 두 명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면서 흑인교회의 현실에 대해 토의했다. 본회퍼는 ‘인종차별 문제(question)’를 미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실제적인 문제(problem)’로 생각했다. 미국교회는 흑인과 백인을 말씀과 성찬에서 서로 분리시키고 있었고, 그들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흑인교회에 대한 본회퍼의 사랑과 열정이 다음의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가 흑인교회에서처럼 그와 같이 역동적으로 살아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구원에 대한 복음이 여기에서 실제로 죄인들에게 선포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몸으로 확실하게 느끼면서 설교를 받아들이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흑인 문제는 백인교회가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결정적인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6]

본회퍼가 방문했던 아비시니안 침례교회. ⓒcelebratingchrist.

 

결론의 자리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본회퍼는 미국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다. 미국의 백인들은 일상의 삶에서 흑인들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거기에서 이 세상의 “작은 자”(마 25)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보았다.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했던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들과는 달리 ‘작은 자’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흑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최근 우리는 ‘작은 자’들의 고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지난해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던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를 기억한다.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 작업을 하던 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이후 수년이 지났지만 ‘위험의 외주화’는 고쳐지지 않고 있다. 또한 지난 1월 29일 94세의 일기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는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세상은 김복동 할머니를 또렷이 기억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일생 여성 인권 운동에 기여했던 할머니를 ‘여성운동상’ 수상자로 결정했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자’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약한 자에 대한 공격”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던 본회퍼에게는, 기억이란 이웃에 대한 ‘책임지는 삶’에 속하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미국 생활의 기억을 독일에서 유대인을 변호하는 책임지는 행동으로 이어갔다. 우리는 언제쯤 본회퍼처럼 ‘작은 자’들의 아픔을 기억하며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삶을 살아내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본다. 다음 글에서는 본회퍼의 평화운동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참된 평화는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는 본회퍼의 고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아래의 글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고재길,『한국교회, 본회퍼에게 듣다』(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18-24, 78-91.

[2] 에릭 메테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옮김(서울:포이에마 2011), 162. D. Bonhoeffer, Barcelona, Berlin, New York: 1928-1931, vol. 10, Dietrich Bohoeffr Works, ed. C. Green, trans. D. W. Scott(New York: Fortress Press, 2008), 265-266.

[3] 에릭 메테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167.

[4] 위의 책, 169.

[5] 에릭 메테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168.

[6] D.Bonhoeffer, Dietrich Bonhoeffer Auswahl Band 3., Entscheidungen 1936-1939, Hg. C. Gremmels/W. Huber (Gütersloher: Güterloher Verlaghaus 2006),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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