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고통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존엄한’ 죽음이 과연 그런 죽음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죽음은 죽음 권세를 파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무기, 우리를 해방하신 자유의 깃발이 되었다. 예수는 친히 말씀하셨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이것이 기독인이 꿈꾸어야 하는 존엄한 죽음이다.(본문 중)

강석범(국립암센터 정밀의학연구부장)

 

법률상 연명의료란 1)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2)치료 효과 없는 의학적 시술로 3)임종과정만을 연장하는 것이다.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인에 의해 임종 과정에 있다고 판단된 환자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계획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보호자 2인의 일치되는 진술(환자의 의사 추정이 가능할 때) 또는 보호자 전원의 일치되는 진술(환자의 의사 추정이 불가능할 때)에 의해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의 별칭은 ‘존엄사법’이다. 무의미한 치료 대신 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하는 게 뭐 그리 이상할까. 어느덧 시행 8개월 만에 2만 명 이상, 1년 만에 3만 6천명의 환자가 이 법에 의해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거부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중 삼분의 이가 환자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들에 의해서 결정된 죽음이었다.

 

 

법을 시행하기까지 논란이 많았다. 특히 기독교계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현상[1]이 우려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안락사마저 허용하게 될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불편한 규제 장치가 덧칠된 현재의 법이 태어난 배경에는 이러한 우려와 논란이 있었다. 여러 가지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 법에 의해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사례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것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 거절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법 시행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으나 이와 관련한 사회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이 법에 대해 우려의 소리를 내왔던 단체들도 이제는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법이 기독교 생명윤리, 특히 생명존중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훼파하고 있는가에 대해 그동안 반복되었던 논점을 되풀이하여 설명하는 대신, 연명의료에 대한 논란 속에 기독인이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이야기하여 숙의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

모든 죽음은 고통스럽다. 원인 제공자는 인간이지만 세상에 고통을 소개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태어나는 과정에서부터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었다. 산모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좁은 산모의 골반뼈 사이를, 채 닫히지도 않은 머리뼈가 짓눌려가며 질식의 위험 속에서 통과하는 과정도 태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이다. 인생의 수고도 고통이다.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단절되어 쫓겨난 인간에게 내려진 고통은, 형벌인 동시에 인간이 누구를, 어디를 떠나왔는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고통을 매개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절대자 창조주를 어렴풋이 기억하며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작일 수 있다. 오해하지 말라. 산모에게 무통분만을 시행하고, 암환자에게 마약성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이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고통을 피하는 죽음이 ‘존엄한 죽음’이라는 명제가 기독인에게는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나 고통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존엄한’ 죽음이 과연 그런 죽음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죽음은 죽음 권세를 파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무기, 우리를 해방하신 자유의 깃발이 되었다. 예수는 친히 말씀하셨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이것이 기독인이 꿈꾸어야 하는 존엄한 죽음이다. 양화진에 갈 때마다 루비 켄드릭의 무덤 앞에 멈춰 서게 된다. 25세의 나이로 불모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와서 불과 8개월 만에 사망한 그녀는, 생전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면 이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라고 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네팔 선교를 가는 도중 비행기 사고로 죽은 홍사옥 전공의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팀을 이끌다가 죽은 배형규 목사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모두가 고통 없는 죽음을 꿈꾸는 시대에, 기독인은 진정 존엄한 죽음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자기희생’임을 기억해야 한다.

 

(좌)루비 켄드릭(Rubye R. Kendrik)의 묘비, (우)비석에 새긴 유언.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고,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는 것이 죽음을 존엄하게 해준다는 세상 생각에 대해서 저항해야 한다. 요즘처럼 ‘인권’이라는 단어가 전가의 보도가 되는 때는 없었다. ‘인권분만’이 나오더니 ‘인권죽음’이 나왔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헌법 10조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속지 말자. 시편 8편에서 기자가 말하듯이, 인간의 삶이든 죽음이든 그 존엄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목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잃은 양을 찾아다닐 때, 그 잃은 양의 존엄성이 드러난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죽음이 오히려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 죽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이고, 그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존엄의 상실이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존엄의 회복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회당장의 딸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이 들었다고 하셨다.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신다. 만일 이 표현이 예수의 시적 감성 과잉이 빚어낸 부적절한 은유가 아니라면, 죽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기나긴 수면과 다름없다고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 존재가 죽음을 끝으로 소멸된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든 1개월이든 3개월이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끝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 죽은 자나 산 자나, 성도나 불신자나 최후의 심판대 앞에 다시 설 것이며 이후 신자들에게는 부활의 삶이 있다. 그렇다면, 가용 수단을 총동원하는 생명의 연장 자체가 지고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과 의료진은 왜 환자를 살리려고 애를 써야 할까? 그 이유는 고통에 대한 연민, 즉 사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니까 낫게 하고 싶은 것이고, 사랑하니까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지고의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윤리의 구현을 법의 권력에 의탁한다. 물론 기독교적 관점에서 윤리적이지 않은 법이 입법되려 할 때, 우리는 반대의 입장을 표시할 수 있다. 투표할 기회가 오면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치 특정한 법 때문에 시대가 죄악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 거꾸로,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 우리 사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윤리적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 반기독교적인 입법을 막거나 또는 기독교적 권세를 세움으로써 세상 혹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기독교적 가치를 세상에 반영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전부인 양 거기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이고, 이 변화를 통해 드러난 우리의 선한 행실만이 세상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 우리를 이끌고 있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범법자가 된다면, 우리는 신앙에 따른 불복종과 자기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가이사의 법도,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무너질 것이지만 사랑은 끝까지 남을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1] 미끄러운 경사면에서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가게 되는 것처럼,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행위가 계기가 되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현상. 한편, 흔한 논리적 오류의 한 유형으로서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가 언급되기도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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