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 즉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거부했던 신학자는 20세기 초의 칼 바르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 개신교회에 반대하여 1934년에 발표된 바르멘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다. (중략) 바르멘 선언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모든 하나님 인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는 인간 안에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브루너의 견해를 거부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계시를 수용할 능력도 없다. 접촉점은 필요 없고 성령이 필요한 것을 창조하신다. (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성서는 자연세계가 창조자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증언한다. 시편 저자는 우주가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히브리서 저자도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3). 자연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보다 이 인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 시편과 히브리서 저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연세계가 하나님을 증언한다는 고백을 했다.

그러면 이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없다. 시편과 히브리서의 저자들은 인간이 자연적 본성 안에서 자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고유한 본성을 부여받았으며,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물론 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과 특권은 창조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의 본성과 특권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주어졌다기보다는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종말론적 운명으로 주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창조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nature)과 하나님의 은혜(grace)는 결코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이 진선미의 기준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 직관은 비록 희미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정신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빛이다. 한편, 아퀴나스는 창조된 우리의 정신적 능력 안에 있는 창조된 빛을 강조했다. 즉,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인 직관을 갖기보다는 논증적 사고를 통해 비록 암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실재를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관계와 아울러 인식론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긍정했다.

존 칼빈은 인간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 문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자연적인 하나님 인식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즉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 또는 종교의 씨앗이 있다. “인간에겐 자연적 본성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다.”[1] 그러나 다른 한편 칼빈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감각이 죄로 인해 약화되고 모호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나아가서 그는 자연세계와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을 통해 인간에게 드러나는 하나님 지식이 종종 부패해 있고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 즉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거부했던 신학자는 20세기 초의 칼 바르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 개신교회에 반대하여 1934년에 발표된 바르멘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다. 당시 독일 개신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지배와 그 지배하의 독일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멘 선언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모든 하나님 인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성서 외에 역사, 이성, 자연에서 계시의 근원을 찾으려는 모든 자연신학의 시도를 거부했다. 그는 인간 안에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브루너의 견해를 거부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계시를 수용할 능력도 없다. 접촉점은 필요 없고 성령이 필요한 것을 창조하신다.[2]

 

1934년 5월 31일, 독일 고백교회의 총회는 히틀러와 그의 지원을 받고 있던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Deutsche Christen)에 대항하여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다. 위는 그 선언문의 일부.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모호한 종교성이 바르트 당시 나치 지배하의 정치 상황에서처럼 자연신학이란 이름으로 이데올로기화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연신학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1930년대의 독일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바르트의 반자연주의적 계시신학이, 신학의 지평이 인간의 역사를 넘어 자연세계, 즉 전 지구와 우주로 확장된 오늘의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시대에 무시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계시신학과 자연신학은 결코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적군이 아니다. 자연신학에는 바르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자연신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신학과 조화될 수 있는 자연신학도 있다. 특히 오늘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 신학은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통해 범우주적인 자연신학의 전망을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인간의 본성과 자연세계에 의존하는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연계시가 특별계시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자연세계만으로는 무한한 창조자 하나님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고, 단지 희미하게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분을 향해 갈망의 손을 뻗을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인간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자연세계를 보고 그 세계 너머에 계신 창조자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모든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원죄 교리를 발전시킨 이유이다.

그렇다면 원죄 교리는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고대 교부들 이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신학자들은 거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근거해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6-29). 이와 같은 성서적 근거에서, 자신의 본성과 자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죄로 인해 심대한 손상을 입었지만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라는 자연신학 전통이 고대 교부시대 이래 교회의 신학 전통의 한 부분으로 계승되어 왔다.[3]

물론 교회는 죄로 인해 인간의 하나님 인식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세계 이외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을 또한 강조해 왔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찾아오셔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계시하신 이스라엘의 역사를 증언하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기독교는 특별계시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창조자 하나님임과 동시에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다.

여기서 다시금 기억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계시신학이 자연신학과 반드시 양립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자연세계를 통한 하나님 인식은 불충분하고 모호하며 더욱이 인간의 죄로 인해 심하게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으며, 이 형상이 죄로 인해 완전히 파괴될 수 없다면, 자연신학의 가능성은 희미하게나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우주에 관해 연구하던 천체물리학자가 우주의 신비에 경탄한 나머지 우주를 통해 우주를 창조한 창조자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의 하나님 인식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 아직 매우 희미하고 불충분한 하나님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과 대립되는 환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계시(특별계시)를 통한 믿음 안에서 기독교 자연신학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자신의 자연적 본성과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 안에서, 우리는 자연세계 안에서 자연세계 너머의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들을 더욱 분명히 발견할 수 있으며, 자연세계를 단지 죽어있는 물질이나 인간의 역사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살아 있는 창조세계로 인식할 수 있다. 자연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은 창조세계로 이해할 때, 인간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자연을 임의로 변형시키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자연세계를 통해 그리고 자연세계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2018), 1. 3. 1-3.

[2] Emil Brunner, Karl Barth, Natural Theology, 김동건 역, 『자연신학』, pp. 99-106, 133.

[3] 유명한 영국의 기포드(Gifford) 강좌는 기독교의 자연신학 전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강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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