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개신교회들이 3.1운동에 관한 합리적인 역사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론을 포함한 공공의 장에서 표현되고 공유되지 않으면 그 기억은 공적 기억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적어도 기억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3.1절 구국기도회’가 전체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비판만 하는 것으로는 한국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에 입각한 기독교적 3.1운동의 역사 인식과 기억의 실천이 공공의 장에서 더욱 더 필요한 이유이다.(본문 중)

김상덕(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상임연구원)

 

기억은 사회적 산물이다. 개인은 기억을 통해 사회적 자아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며, 집단 구성원 간에 공유된 기억은 구성원들에게 소속감과 연대감을 준다.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 유지, 전승하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형성된다. 특히 3.1절 기념식과 같은 국가 기념식은 과거 역사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을 넘어 특정한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집단의 독특한 정체성을 강화, 변형, 혹은 약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기억과 국가주의의 관계를 주목한 많은 학자들은 기억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쉽게 왜곡되거나 조작될 수 있음을 경고해 왔다.[1]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과거 역사에 대한 다양한 기억의 방식들이 재현되는 것은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주장하고 결속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태지호(2014)는 기억과 사회의 관계를 가리켜 “사회는 기억의 장이자, 기억의 조건인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조건들은 개인들의 기억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과정 속에서 회상과 망각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면서 특정한 기억만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2] ‘기억의 정치’는 현대사회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 중 하나이다.

기억 연구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억이 집단 결속력을 강화하여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기억과 정체성이 갈등 해결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갈등 문제는 정체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인식과 기억은 결국 갈등의 핵심인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인일 뿐 아니라 갈등의 근원적 원인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한국 사회 갈등의 근원적 이유는 과거 사건에 대한 정보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 해석의 차이, 즉 기억의 차이 때문이다.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차이는 곧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로 이어지며, 이 차이는 3.1운동을 어떻게 기억(기념)하는가로 표면화된다. 한국 사회의 갈등 가운데 이미 역사적 평가가 (적어도 법률적 정의에 따르면) 끝난 사안과 관련해서도 끊임없이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되는 이유는 한국 사회 구성원 간의 정체성 논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단 간 정체성의 차이가 존재하며, 각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부적 기억 내러티브를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림: 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교수)

 

1919년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선언, 임시정부 수립과 해방으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역사상의 의의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인의 참여 및 연대, 그리고 비폭력 운동 등의 종교사적 가치를 가진다. 이 운동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며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만열 교수는 3.1운동 70주년 특별 기고문 서두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탐구함에 있어 ‘교회’가 지닌 ‘민족’과의 관계와 위상이 그 역사적 섭리를 푸는 가장 중요한 고리라고 인정할 때, 3.1운동사가 지니는 중요성은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크다 하겠다”라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3]

기독교사적 평가의 측면에서는 3.1운동에 대해 많은 논의와 합의가 이뤄진 반면, 이에 대한 현대사회의 기억의 방식들은 극단적 분열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특별히 2016년 이후로 매해 광화문 광장에서 모이고 있는 ‘3.1절 구국기도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3.1절 구국기도회’를 일부 기독교 세력의 행사로 규정하고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기독교 내 다양한 집단 정체성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실제로 기억하고자 하는 내용의 실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기억연구는 한 사회의 복잡한 내면(의미체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3.1절 구국기도회’ 현상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 ‘3.1절 구국기도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1 독립만세를 외치던 100년 전 태극기와 오늘 광화문 광장의 극우 집회에 등장한 태극기는 어떤 의미들을 가지는가?’ ‘3.1절 구국기도회에 등장한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는 어떻게 3.1 운동과 결합이 가능한가?’ 등을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최근 이지원(2018)은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피기 위해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사를 분석한 바 있다.[4] 이 연구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의 3.1절 기념사에서 나타난 ‘친미 반공’ 민족주의는 오늘날 극우보수 세력의 구호와 맞닿아 있다. 특별히, 한국전쟁을 십자군전쟁으로 비유한 이승만의 역사 인식은 하나의 기독교적인 인식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파악하던 냉전체제 시대의 인식이며 사고체계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과 (북진흡수식) 통일관은 21세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시대적 요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과거 자유 수호를 명목으로 삼아 허락된 반공주의가 얼마나 자주 오용되어 비참한 폭력적 억압과 사회 갈등을 낳았는지도 우리는 되새겨야 할 것이다. 기독교(특히 개신교)는 이러한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1절 구국기도회가 보여준 모습은, 일부 극우보수 개신교 세력들이 여전히 이승만식 역사 기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3.1절 구국기도회에 등장한 박정희, 박근혜 사진이 담긴 피켓들은 이른바 배타적 민족주의를 비롯하여 ‘국력증진’과 ‘민족중흥’으로 표상되는 박정희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5.16 쿠데타와 유신으로 이어진 독재정권이었음에도 “나”와 “내” 나라가 배부를 수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와 내 가족만 배부르면 독재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과연 옳은가 물어봐야 한다. 이는 개인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태도는 공동체를 깨뜨리고,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또한 개발우선적 경제관념은 자칫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성경적인 경제정의와도 어긋나며 그 밑바탕에는 물질만능주의, 즉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도사리고 있다. 섬뜩하게도, 우리는 박정희를 마치 우리 민족에게 경제적 부를 허락한 풍요의 신으로 신격화하는 모습들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상)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박정희, 박근혜 사진. (하)박정희 대통령 92회 탄신제.

 

3.1운동이 남긴 기독교적 유산은 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랑의 모범과 용기, 폭력과 억압에 맞서되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평화의 가치와 실천이었음을 되새겨 본다. 애석하게도, 위에서 살펴본 일부 보수 기독교의 기억과 기념방식은 오히려 일부 극우적 정치논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물론 ‘3.1절 구국기도회’가 기독교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공적 현장이나 언론에 비추어진 개신교의 이미지는 ‘3.1절 구국기도회’로 대표되는 극우 보수적 이미지가 지배적인 것이 현실이다. 대중매체의 재현은 비록 그 수가 다수가 아니라고 해도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빈도수에 따라 더 큰 파급력을 갖기 마련이다. 반면, 일반 대중들은 그 외의 기억(들)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다수의 개신교회들이 3.1운동에 관한 합리적인 역사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론을 포함한 공공의 장에서 표현되고 공유되지 않으면 그 기억은 공적 기억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적어도 기억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3.1절 구국기도회’가 전체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비판만 하는 것으로는 한국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에 입각한 기독교적 3.1운동의 역사 인식과 기억의 실천이 공공의 장에서 더욱 더 필요한 이유이다.

이에 3.1운동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의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글을 맺으려 한다. 첫째,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에 저항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이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와는 전혀 다른 민족주의로서 인류의 보편적 인권과 존엄함을 근본적 가치로 삼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3.1운동의 기억은 초-민족주의(trans-nationalism)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핵심주체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는 종교(교회)의 공적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촉구한다. 특히, 3.1운동 중 종교 간의 연합운동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인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나아가 타자에 대한 폭력성 문제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3.1운동의 기독교적 기억은 포용와 연대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3.1운동의 특징인 비폭력 만세운동의 경험은 미래의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3.1 만세운동 이후 이어진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3.1운동의 비폭력 운동 정신에서 볼 때 독립운동은 큰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작은 폭력이거나 폭력을 줄이기 위한 감폭력적 표현이며, 이는 평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잠재적 폭력의 가능성을 줄이고 적극적 평화의 문화를 세워 나가는 것은 3.1운동이 말하는 비폭력 평화 정신의 실천이다. 이는 3.1운동이 오늘날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이며 실천되어야 할 기억임을 보여준다.

3.1운동 100주년을 지나며 한국교회는 새로운 물음과 도전 앞에 서 있다. 교회가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신앙과 애국심의 표현인가 아니면 배타적인 국가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표상화된 정치적 행위인가? 21세기 동북아시아와 지구공동체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손에 쥐어야 할 것이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여야만 하는가? 한국교회가 망각하고 있는 약소국과 억압받는 민족들을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 한 형제인 북한과의 과거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3.1운동과 기억의 문제는 교회가 과거를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곧 교회의 소명임을 일깨워준다. 이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1]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단일한 기억’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기억의 가능성들을 배제하고 단일한 국가 정체성을 위해 망각을 강요해 왔다고 비판했다. 에르네스트 르낭, 신행선 옮김 『민족이란 무엇인가』 (서울: 책세상, 2001) 참조.

[2] 태지호, 『기억 문화 연구』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6.

[3] 이만열, “3.1운동에 대한 기독교사적 이해”, 「기독교사상」 33(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13.

[4] 이지원, “역대 한국 정부의 3.1절 기념사를 통해 본 3.1운동의 표상과 전유: 정신적 측면을 중심으로” 「서울과 역사」 99호 (서울: 서울역사편찬원, 2018. 6). 24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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