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하루는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쉼을 가지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복된 명령이다. 그것은 노예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영적 회복을 위한 시간이다. 필자가 성장한 교회 문화에서는 주일성수가 강조되어 주일에 군것질도 못하고 공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중략) 일요일에 공부로부터 벗어나는 직접적 해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고 칭찬받는 행위라 해도 신앙보다 우선적인 것은 아니라는 가치관이 주는 영적 해방감을 느꼈다.(본문 중)
김진우(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 세종과학고 교사)
수업 시간에 행복에 대해 글을 쓰게 한 적이 있다. 그때 나온 한 아이의 글귀가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와서 해를 하도 못 봐서 내게는 봄날 따스한 햇볕을 맞는 것조차 행복이 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한다. 평일에는 밤 11시 30분까지 자습을 하고 금요일 귀가 후에는 주말 사교육을 받는다. 조사를 해 봤더니 주말 사교육 시간이 대체로 10시간부터 30시간까지로 나타났고 평균이 20시간 정도 되었다. 주말에 하루 10시간 정도 학원에 있다는 뜻이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삶이다. 일주일 학습 시간을 계산해보니 약 80시간 정도가 나왔다. 기존 통계에서 일반고 학생들의 경우는 평균 70시간 정도로 나와 있다. 참고로, OECD 평균은 34시간 정도다.
이 수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산재보험이 인정하는 과로사 판정 기준은 주당 60시간 12주를 지속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과로사 기준을 넘어서 있고, 심하게 말하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마당에 주당 80시간 학습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3년만 참으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조건이다.
대책은 있을까? 원인을 살펴보면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 입시 경쟁과 그 뿌리가 되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문화를 생각해 보면 과연 이것이 해결 가능한 문제인가 의심이 든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유효한 대책은 있다. 이미 실행되어 효과를 거두고 있는 정책이 학원 심야교습 제한이다. 밤 10시까지 단축하는 지역이 있고 밤 12시까지 허용하는 지역이 있는데 비교해 보면 10시 제한 지역의 심야 사교육이 눈에 띄게 줄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원집단에서는 이 정책에 반발하여 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 소원을 제출했으나 두 차례 합헌 판정을 받았다. 학생들의 건강이나 휴식이 영업 자유보다 우선하는 가치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쉼이 있는 교육’ 운동은 이와 같은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학원휴일휴무제를 통해 일요일에 학원을 휴무할 것을 제안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일요일 휴무)는 매우 유익한 관습이다. 그리고 이 관습은 근로 계급 사람들 사이의 협정 없이는 준수되기 어렵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는 휴업하자는 일반적 협정이 성립되어야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 따라서 누구 한 명이 휴일에도 일하면 다른 사람들도 일해야 하는 심리적 환경에서는 법률이 어떤 특정한 날에 대부분의 산업 활동을 공식적으로 중지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 법률이 각 개인에게, 다른 사람들도 공휴일을 준수할 것이라는 보장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허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당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중
이 말은 우리의 사교육 경쟁 상황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시의회의 여론조사 결과 67%가 찬성하고 14%가 반대하였다. 학부모들은 일요일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가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에 보내고 있다. 대다수는 이 상황에 피로함을 느끼고 있으며 사회 전체적 합의로 이를 중단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와 같이 정당성이나 실효성이나 국민 인식에도 불구하고 법제화에 난관이 있다는 것이다. 심야교습 제한만 해도 17개 시도에서 5개 지역(서울, 경기, 광주, 대구, 세종)만 밤 10시로 되어 있고, 다수는 12시까지 허용하고 있다. 일찍이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학원 심야교습을 밤 10시로 앞당기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학원집단의 강력한 반발로 국회 입법이 무산되었고 시도 조례로 책임을 떠넘기는 결정이 내려졌다.
쉼이 있는 교육 시민포럼은 여러 차례 국회의원들에게 학원 영업시간 제한법 발의를 촉구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취지에 동의한다는 의원들도 막상 추진하는 것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막은 학원집단의 강력한 반대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아무리 국민 여론이 찬성해도 특정 집단이 강력하게 반발하면 이를 더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 정치인의 생리다.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이후에도 이 부분에는 진전이 거의 없다. 교육감들도 유독 이 문제 앞에서는 소심한 태도를 보였다. 교육감들은 국회에서 통일된 법제화를 해 주기를 바라면서 책임을 국회로 떠넘기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의 생태를 볼 때, 이 숨 막히는 무한경쟁 체제 안에 조그만 숨 쉴 틈 하나 내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암담하다.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의 현실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쉼을 가지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복된 명령이다. 그것은 노예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영적 회복을 위한 시간이다. 필자가 성장한 교회 문화에서는 주일성수가 강조되어 주일에 군것질도 못하고 공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다소 율법주의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것이 주는 영적 교훈이 있었다. 필자는 이 가치관이 주는 해방감을 경험했다. 일요일에 공부로부터 벗어나는 직접적 해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고 칭찬받는 행위라 해도 신앙보다 우선적인 것은 아니라는 가치관이 주는 영적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날 주일성수가 율법주의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는지 아니면 입시에서의 성공이 신앙적 가치를 압도해서인지, 교회가 학원 시간을 고려하여 예배 시간을 잡는다고 한다. 시험 기간에는 교회 빠지는 것을 다 양해하는 분위기라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신앙보다는 공부가, 하나님의 안식의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안식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유를 위해 떼어 놓은 한 날, 곧잘 파괴의 무기로 둔갑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는 날, 자신을 돌아보는 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 형식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날, 기술문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는 날, 돈을 쓰지 않는 날, 이익을 얻고자 동료 인간 및 자연 세력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만큼 인간의 진보에 큰 희망을 주는 제도가 있는가?
어쩌면 악마는 헤셀의 메시지에 대항하도록 웜우드[1]에게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원수의 자녀들이 주일에 쉬지 못하도록 쉬지 말고 움직여라. 그들의 부모를 공략하라. 옆집 아이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도록 하라. 주일에 쉬다가 입시에 실패한 아이에 대해 교회 여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꼭 들려주어라. 반면 주일에 학원으로 달려가서 마침내 명문 대학의 합격증을 거머쥔 아이가 받는 칭찬을 만천하에 알려라. 그것을 위해서는 원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쯤은 눈감아 주어라. 반면 주일에 안식하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했던 ‘율법주의’라는 용어로 멋지게 반격해라. 그러면 그들은 짐짓 놀라며 혹은 내심 반가워하면서 그들의 욕망을 불편하게 했던 계명을 흔쾌히 집어던질 것이다. 명심하여라. 원수의 자녀들이 혹시라도 대학 입시 전투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멈추어야겠다고 이탈하는 순간, 그들 속에 구축한 우리의 왕국은 7분의 1이 아니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쉼이 있는 교육 기독교운동’은 다음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실현할 수 있도록 실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집은 주일에 안식합니다”라는 자석 스티커와 소책자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단체 구매를 환영합니다.
문의: 이호준 목사(010-4898-3454)
[1] C.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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