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학교는 능력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배경’일 뿐입니다. 출신학교가 능력이라면 차라리 입학에 영향을 끼친 수능 점수로 뽑으면 되겠네요. 수능 점수는 부모의 사회 경제적 배경과 관계가 많다지요? 그럼 부모님 직업 배경을 보고 뽑으면 되고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물론 출신학교는 인종, 성과 같은 선천적 배경은 아니며, 개인이 그 배경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 애를 쓴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후천적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후천적 배경도 배경일 뿐이므로, 배경을 보고 그 사람을 뽑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본문 중)
송인수(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기윤실 이사)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다. 2011년 3월이었다. 사교육 문제의 핵심 원인이 출신학교를 보고 차별하는 기업의 채용 관행에 있다고 보고, 우리는 채용 관련 연속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기업과 민간기업, 비영리 영역, 중소기업 등의 채용 현황을 살피며 토론하던 중, 한 가지 문제로 우리와 일부 토론자들 간에 논쟁이 붙었다. 그분들은 “민간 기업이 채용하는 과정에서 지원생의 출신학교를 참작해서 채용 결정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라는 입장이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였다. 첫째, 출신학교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기업체에서 SKY 대학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런 대학에 들어간 것은 내신과 수능에서 고득점을 해야 하므로 개인이 노력한 결과이고 따라서 SKY 대학 입학은 자격증과 마찬가지로 능력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출신학교에 따른 채용 관행을 법률로 막는 것은 기업 운영의 사적 자율권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민간 기업이 채용을 잘못해서 망하면 기업의 책임이고 흥해도 기업 책임이니 기업은 자기 기업에 이익이 되는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고, 따라서 채용 문제를 국가가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들으니 화가 났다. 토론회에서 해당 기업 소속 직원이 자기 기업을 변호하기 위해 흔히 하던 말이었지만, 소위 변호사 및 전문가들, 그것도 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분들의 이런 생각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꽤나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지 않지요. 만일 그렇게 출신학교가 능력이고 채용 과정에서 출신학교 등급표로 지원자를 선별하는 것이 기업의 재량권이라면, 왜 떳떳이 공개적으로 그 기준을 밝히지 않습니까? 출신학교는 능력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배경’일 뿐입니다. 출신학교가 능력이라면 차라리 입학에 영향을 끼친 수능 점수로 뽑으면 되겠네요. 수능 점수는 부모의 사회 경제적 배경과 관계가 많다지요? 그럼 부모님 직업 배경을 보고 뽑으면 되고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물론 출신학교는 인종, 성과 같은 선천적 배경은 아니며, 개인이 그 배경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 애를 쓴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후천적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후천적 배경도 배경일 뿐이므로, 배경을 보고 그 사람을 뽑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출신학교 차별 관행이 기업의 자율권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왜 떳떳하게 드러내지 않느냐는 나의 비판에 일부 토론자들은 “그건 ‘국민 정서’ 때문일 뿐”이라고 대꾸했다. 토론회는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끝났고, 토론장에서 오고간 논쟁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이 나라에 이런 폐단을 바로잡을 법 하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출신학교로 차별받는 아이들을 지켜낼 법이 없으니 빨리 법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로 얼마가 지났다. 우리 정책실 연구원이 채용 관련 자료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법 하나를 찾아냈다. ‘고용정책 기본법 제 7조 1항’. 내게 전달한 그 조항을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 채용할 때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학교, 혼인 임신 또는 병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균등한 취업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 1항)
아니, 출신학교로 차별하는 것을 막는 법이 이미 있었다니! 고용정책 기본법 7조 1항은 ‘출신학교’로 채용 과정에서 차별하는 것은 위법임을 명시했다. 그것도 공기업만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사업주가 대상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2011년 토론회 때 우리가 상식에 근거해서 고집스레 주장한 것이 법률적으로도 옳음을 보여주는 근거였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이런 법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 토론장에서 변호사나 전문가들과 논쟁할 때 한결 수월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때 그 변호사들과 전문가들은 왜 이 조항을 몰랐을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기업들이 출신학교로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들을 차별해도 이를 떳떳하게 밝힐 수 없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구나”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퍼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이 법이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했다. 이 법은 20년 전, 그러니까 1994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제정된 것이었다. 부당한 채용 관행에 눌려온 우리 사회와 기업 문화를 쇄신하려는 목적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 법률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수많은 채용 비리가 여전히 활개를 치는 이유가 뭔가 하는 점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이 법률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위반 기업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었다. 처벌 조항이 없으니 무력한 법률로 방치되었고,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기업들은 소리 없이 온갖 위법적 행태를 지금까지 반복한 것이다.
2016년 4월 24일, 5년간의 조사와 연구 과정을 거쳐 ‘출신학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운동’을 시작했다. 출범식 때, 2011년 토론회에 참석해 나와 논쟁했던 변호사가 참석했다. 출범식 끝나고 나는 그에게 “변호사님, 출신학교로 기업이 지원생을 차별하는 것이 위법이었더라고요. 기업의 자율권 보호 대상도 아니고 출신학교가 능력도 아니었어요. 우리 법률에서 출신학교는 배경이지 능력이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죠?” 그분은 나의 말에 이번에는 반론을 펴지 못했다.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20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더불어민주당은 (사교육) 민생 대책 특위를 조직하고 출신학교 차별 관행을 법률로 막는 일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오영훈 의원을 비롯해 김해영, 나경원, 심상정 등 여야 6명의 의원이 유사 법안을 발의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새 정부도 이 법률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법률은 발의된 지 3년간 국회 교육위원회에 묶였다. 새 정부는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를 법률 제정으로 확정지을 의사를 보이지 않고 더욱이 민간 기업으로 대상을 확대할 의사는 아예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정치가들이 침묵하니 딱 그 지점에서 멈추어 불 꺼진 운동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올해 4월, 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이 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의원실로 찾아갔다. 그는 이런 차별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 말하면서 20대 국회가 끝나기 전, 가급적이면 올해 6월에 처리할 수 있도록 힘쓰자고 했다. 그는 즉시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 국장과 통화하고, 또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장인 한국당 김학영 의원과 통화하면서 법률 제정 통과를 요청하기도 했다. 의욕이 식어 불 꺼진 잿더미 같은 상태였는데, 다시 불기운이 솟았다. 반갑고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시작한 2008년, 욕 들어먹을 일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 몫의 십자가라 여겼고 비난과 공격받을 일은 각오했다. 그 후 수많은 이해당사자들과 언론, 우리와 입장이 다른 일부 국민들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니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아프게 한 것은, “당신들이 시작한 운동으로 인해 교육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이다. 상처가 가득해도 그 질문에 할 말이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이다. ‘출신학교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면 나는 나를 아프게 한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하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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