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극장가(街)는 또다시 어벤져스 열풍으로 뜨겁다. 이 영화는 마블(Marvel) 엔터테인먼트사(社)가 제작하는 시리즈 영화로 현대과학이 밝힌 넓고 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각종 히어로와 외계인을 등장시킨다. 여기에 양자역학, 핵에너지, 생명공학 등 각종 과학 지식을 가미해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극대화시킨다. 공상과학영화 같지만 사실은 신적 존재나 선과 악 등 과학을 넘어서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략) 과거부터 ET, 스타워즈, 에일리언, 맨인블랙 등 지구를 넘어서는 외계인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본문 중)
성영은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올봄 극장가(街)는 또다시 어벤져스 열풍으로 뜨겁다. 이 영화는 마블(Marvel) 엔터테인먼트사(社)가 제작하는 시리즈 영화로 현대과학이 밝힌 넓고 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각종 히어로와 외계인을 등장시킨다. 여기에 양자역학, 핵에너지, 생명공학 등 각종 과학 지식을 가미해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극대화시킨다. 공상과학영화 같지만 사실은 신적 존재나 선과 악 등 과학을 넘어서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영화에 대한 인기가 최근의 마블 시리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ET, 스타워즈, 에일리언, 맨인블랙 등 지구를 넘어서는 외계인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작년에 타계한 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유작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까치, 2019)에서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현대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10가지 거대 질문들을 던진다. 그중 하나가 ‘우주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가’이다. 호킹은 이 질문에 대해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의 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보다 진화한 외계 문명을 만나는 것은 비극이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현재 국제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찾거나 생명체가 살만한 행성을 찾는 이런저런 과학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정말 외계인은 있을까? 크리스천들은 외계인과 같은 주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학시대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주는 대신 많은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 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인정하는 과학의 특성상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 인간의 영혼, 천사나 마귀 같은 영적 존재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추방해 버린 것이다. 과학의 사고방식은 성경 해석에까지 영향을 미쳐, 성경 내용 중에서도 과학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것만 받아들이고 기적 이야기 같은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편으로 과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더 풍성하게 보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풍부하고 깊은 창조 세계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된, 작고 좁은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이 시대의 정신은 신앙인인 우리에게조차 깊은 영향을 미친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믿지 못하므로, 한편으로는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대비책을 찾으려 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렇다면 이 과학시대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우리를 눈에 보이는 좁은 틀 속에만 가두고, 신령한 세계나 하나님의 존재, 온갖 추상적인 것들의 깊이와 풍성함을 잊게 만들어 우리의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과학시대의 정신에 맞서는 길이 있는가? 그 방법 중 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이런 보이지 않는 실재들을 다시금 불러오는 독서나 영화 감상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신화나 외계인이 등장하는 공상과학 작품들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며 터무니없는 것으로 쉽게 단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넓고 넓은 창조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마블 시리즈 영화 한 편 보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사람이지만,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C. S. Lewis, 1898-1963)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그가 쓴 공상과학소설 ‘우주 3부작’은 과학시대의 우주관과 외계인 문제에 대해 상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1] 이 소설 속의 우주에는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오늘날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가 잘 느껴보지 못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서려 있다. 이 소설에는 또한 화성(말라칸드라)과 금성(페렐란드라)에 사는 외계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아직 타락을 경험하지 않은 이성과 영혼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장차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 대해 상상해 보게 만든다. 주인공 랜섬은 화성으로 끌려가면서 우주선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우주가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어둡고 춥고 황량한 불모지’가 아니라,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늘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랜섬은 다른 데서, 곧 정신적인 데서 마음이 가볍고 신나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는 과학의 발전 이후 현대인의 마음에 생겨난 악몽을 벗고 있었다. ‘우주’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그의 마음 한편에 우주는 어둡고 추운 진공 상태라는 우울한 공상이 생겼다. 우주는 완전한 죽음이고, 세상들을 갈라놓는 것 같았다. 그런 공상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빛의 최고천(고대우주론에서 가장 높은 하늘-옮긴이)에 비하면, ‘우주’라는 이름이야말로 신성모독 같았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랜섬은 매순간 생명력이 안으로 쏟아져 드는 기분을 느꼈다. 이 바다에서 세상과 모든 생명체가 나왔으니 왜 안 그러겠는가? 그는 우주가 황량한 줄 알았다. 이제 이곳이 세상들의 자궁이며, 타오르는 수많은 자손들이 수많은 눈으로 밤마다 지구를 내려다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곳은 얼마나 더 많은 눈으로 볼까! 아니, ‘우주’는 틀린 이름이었다. 옛 학자들이 ‘천상’-영광을 선포하는 천상-이라고 붙인 이름이 더 현명했다.(p.46-47)
루이스는 우리가 잊지 말고 다시 되찾아야 할 것으로 초자연을 말한다. 그는 초자연을 때에 따라 신화, 기적, 영적 세계 등 다양한 여러 용어로 표현한다. 루이스가 말하는 신화는 말 그대로 신의 이야기, 즉 기적을 말하고 기적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루이스는 초자연의 회복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천명하고자 했다. 이 일이 곧 성경을 성경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루이스는 우리에게 《우주 3부작》에서 다시 찾은 것들을 우리 일상에서 나타내며 살라고 권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다. 과학을 빙자해 초자연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악한 자’의 음모라는 것이다. 초자연은 우리의 삶과 신앙을 풍부하게 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알고 행하고 표현하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루이스는 우리가 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면 자연스럽게 성경을 풍부하게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성경은 결코 과학시대의 한계에 갇힌 책이 아니다. 모든 시대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풍부함을 결코 이 시대의 편협한 눈으로만 볼 수는 없다. 루이스는 자신의 공상과학소설을 통해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초자연의 세계를 잊지 말라는 따듯한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도 비록 그 안에 비기독교적 요소들이 있을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과학시대의 정신 때문에 자칫 놓치게 되는 것들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우리가 사는 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더 넓은 시간과 더 넓은 공간 속으로 펼쳐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외계인에 대한 C.S. 루이스의 견해[2]
제가 보기에는 (우주에서) 지적 존재들이 발견될 경우 생길 수 있는 신학적 추론이나 난제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지적 종족에 관한 가설에 대해 우리가 현재 알 수 있는 것-현재로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으므로-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처럼 지적이지만 우리와 달리 무죄한 종족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도 없고 아무런 사악함도 없이 오직 평화와 좋은 친구 관계만 있는 종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종족이 성육신이나 구원의 이야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해도, 심지어 그들이 우리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조차 힘들어한다 해도 당혹스러워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세계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종족으로부터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을 터이며 그들에게 가르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그들의 발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멸절시킬 이유를 만들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p.321).
아니면 우리처럼 선과 악이 모두 있는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어떤 구원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 역사의 어느 시점엔가 그들을 개선시키기 위한 위대한 간섭이 있었을 것이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초자연적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pp.321-322)
우리는 우리처럼 구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구원이 주어지지 않은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어느 그리스도인이든 그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새로운 야만인 부족을 처음으로 만나는 경우보다 근본적으로 더 어려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입니다(p.322).
마지막으로, 우리는 극도로 악마적인 종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선함이 조금이라도 빛을 발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불꽃도 감지될 수 없고, 모두가 철저히 뼛속까지 왜곡되어 치료 불가능한 종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존재가 있다는 말을 늘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런 존재는 모두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라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그 사소한 부분만 조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환상적 추측의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다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심지어 다리를 놓아야 할 강이 있는지 알기도 전에 다리부터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p.323)
[1] ‘우주 3부작’은 『침묵의 행성 밖에서』(1938), 『페렐란드라』(1943), 그리고 『그 가공할 힘』(1945)을 말한다.
[2] “보는 눈”(1963), 『기독교적 숙고』(양혜원 역, 홍성사, 2013). 3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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