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현시대를 “대홍수”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중략) 홍수의 정체는 바로 탈기독교 시대를 가져온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는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붕괴시켰다. 따라서 이제는 이 세속주의와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략) 정치적 협력이나 사회 운동을 통해 세속주의와 맞서려는 태도는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태도다. 오히려 일찌감치 싸움을 포기하고 우리만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홍수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주의에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충고한다.(본문 중)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베네딕트 옵션』 서평
로드 드레허 | 이종인 옮김 | IVP | 410면 | 19,000원 | 2019.3.15
최경환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속에서 다양한 감정이 올라왔다. 예전 같으면 상당히 감동하며 읽었을 책인데, 이제는 나이도 먹고 세속적인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적 생활 방식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보수주의 논객인 로드 드레허(Rod Dreher)는 쉽고 직설적인 문체로 탈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위기를 서술한다. 그의 진단과 대안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 같다. 일단 그가 뭘 말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요약하고, 그의 진단과 처방을 비판적으로 읽어보도록 하겠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장과 2장은 현대 사회를 총체적 위기로 진단하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분량도 적지 않고 내용도 충실한 편이다. 어쩌면 저자가 나중에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베네딕트 옵션”이 얼마나 적절한지에 대한 평가도 이 진단이 얼마나 철저했는지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저자는 현시대를 “대홍수”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이 홍수는 정부, 공적 광장, 학교는 물론 대부분의 교회까지 휩쓸었다. 홍수의 정체는 바로 탈기독교 시대를 가져온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는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붕괴시켰다. 따라서 이제는 이 세속주의와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홍수가 일어나면 싸우고 저항할 것이 아니라 피하고 도망쳐야 한다. 정치적 협력이나 사회 운동을 통해 세속주의와 맞서려는 태도는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태도다. 오히려 일찌감치 싸움을 포기하고 우리만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홍수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주의에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충고한다.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은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 알려진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문예출판사 역간)에서 근대성의 위협을 상당히 길게 서술하면서 그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길과 니체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본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하면서, 이야기, 공동체, 덕의 함양을 통한 전통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6세기 무렵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던 성 베네딕투스를 통해 보여진 새로운 삶의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로드 드레허는 매킨타이어의 대안에 영감을 얻어 오늘날 기독교가 살아남을 길은 “베네딕트 옵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 세속주의의 독소와 더불어 상대주의가 초래한 파편화 현상을 인식하면서, 베네딕트 옵션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베네딕투스의 규칙’에 의지해 관례와 공동체를 가꾸는 길을 모색한다. 그들은 전전긍긍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체제는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맞닥뜨리며 살아야 하는 현실임을 인식한다. (39쪽)
로드 드레허와 같은 공동체주의자에게 기독교가 게토화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공동체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면 게토화의 위험을 지적하면 극구 부인하며 자신의 신학을 변호하겠지만, 드레허는 그렇지 않다. 드레허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게토화가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속 문화와 기성 교회에 대한 드레허의 진단은 철저하고 그 대안 역시 급진적이다.
저자는 이런 세속주의의 기원을 중세 말 유명론의 발기로부터 찾는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실이 “하나님에 의해 질서 잡히고 의미를 부여받은 조화로운 전체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50쪽), 자신의 모든 상상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었다. 반면 유명론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 그 어떤 내적 의미나 실재를 갖지 않는다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이 유명론이 중세를 무너뜨리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가져왔다. 드레허는 이 유명론으로 말미암아 이후에 전개된 근대 학문은 세속주의의 물꼬를 열어주었고,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고 진단한다. 과학혁명, 근대 자유주의 국가 체계, 성 혁명 모두 유명론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
이런 세속주의에 대한 대안은 “반정치적 정치학”(antipolitical politics)을 실천하는 것이다. 기존에는 기독교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함으로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세속 영역에 기독교가 참여하면, 결국 국가의 정책에 협조, 동조, 혹은 대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선택을 종용 당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정치적 선택들로 해소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사회 속에서 유배된 자들처럼 살아야 한다. 이 사회에 창조적인 소수로 남아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반정치적 정치학이란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만들어 감으로써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행동들이다(154쪽).
주류에서 문화적으로 탈퇴하라.
텔레비전을 끄라. 스마트폰을 치우라.
책을 읽으라. 놀이를 하라. 음악을 만들라.
이웃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라.
교회를 시작하거나, 당신의 교회 안에서 그룹을 만들라.
고전적 기독교 학교를 열거나, 이미 있는 그런 학교에 동참하고 학교를 강화하라.
정원을 가꾸고, 지역 농산물 직판장에 참여하라.
5장부터 10장까지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하나씩 제시하며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설명한다. 교회의 예전적인 형식을 회복하고, 금욕주의 영성을 실천하며, 자녀를 위한 기독교 고전 교육에 힘쓰라고 조언한다. 힘들더라도 동시대의 성문화와 타협하지 말고 자녀의 성교육에 집중하라고, 또 스마트폰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하라고 조언한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딴죽을 걸려고 하면 핑곗거리는 끝이 없을 것이다. 드레허의 제안과 대안은 변화한 시대에 부적응한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고집스러운 대안학교 교감 선생님의 훈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굳건히 지키려는 그 태도는 일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레 겁을 먹고 너무 쉽게 세상과 타협한 것은 아닌지, 그의 행동 지침과 같은 일들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 것이라고 여겨 도전조차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을 적어봤다.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다.
- 드레허가 세상과의 접촉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베네딕트 공동체에서 환대는 중요한 실천 중 하나였는데, 드레허도 공동체를 방문하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외부의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찾아오는 손님만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였다. 교회가 세상을 포기하면 결국 교회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공적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지 방어의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 그렇다면 드레허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 혹은 직장생활 윤리는 무엇일까? 책의 8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학교와 직장에서 LGBT[1]를 피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행동과 실천으로 모든 기독교적 행동이 수렴하는 것처럼 보인다. 드레허는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생활을 하거나 직업을 선택할 때,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거나 그들을 거부함으로써 받게 되는 불이익을 언급한다. 예전에는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들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행동이 그리스도인들을 순교자로 만든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과 신념을 확고하게 표현할수록 그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테고, 핍박은 거세질 것이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것이 순교에 버금가는 고귀한 가치란 말인가?
- 그런 관점의 결과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드레허는 그리스도인이 가내수공업을 우선하고, 가능하면 약사나 의사 혹은 법조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생산한 제품을 구입하고, 자기들끼리 고용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다시 묻고 싶다. 과연 드레허가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누구 덕인가? 빌 게이츠? 뉴욕타임즈? 사회가 만들고 구축해 놓은 공적 자산과 자본은 우리 모두의 것이고, 함께 만드는 것이다. 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다.
- 하지만 저자에게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이런 실천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만큼 오늘날 미국 사회가 회생 불가능하게 타락하고 망가졌는가?’하는 것이다. 드레허가 그토록 비판하는 미국의 자유주의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좁고 옹졸하지 않다. 드레허가 국가를 강력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도, 기독교 고전을 교육하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자녀를 그곳에서 교육할 수 있는 것도,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세우고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모두 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체제에 의해 보장받는 권리다. 자유 민주주의 입헌주의는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에 부담을 주려 하지 않고, 종교적 소수자의 차별에 반대한다. 자유 민주주의는 드레허처럼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도전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보호한다. 오히려 드레허가 꿈꾸는 대안 공동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더욱 건강하고 단단하게 세워져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기계화된 중립성을 넘어 시민의 덕을 고양시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증진시킬 것이다.
- 마지막으로 드레허가 강조하듯이 우리 자녀에게 더 좋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발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후퇴해 자기들만의 철옹성을 만든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주 실용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옆집 사람들을 돌보고 낯선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어야 나중에 우리의 자녀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그곳을 포기하면, 결국 교회에 그 부메랑이 돌아올 것이다. 아직 이 세상을 포기하긴 이르다. 베네딕트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예수처럼 사는 것이 더 좋다.
[1]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렌스젠더(TransexuaI)를 의미한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