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활약한 진보 기독교뿐만 아니라, 예장 통합, 합동, 고신 등 주류 교단도 6월 항쟁의 현장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조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27-28)는 말씀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 담론은 상황에 따라 저항의 논리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서술이 인권이라는 가치가 성서에 부합하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수 교단의 교회에서도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는 예배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일상화된 인권 탄압과 고문이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반하는 크나큰 범죄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본문 중)
강성호(『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저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엄한 파노라마를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3․1운동(1919)과 4․19혁명(1960), 그리고 6월 항쟁(1987)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강력하게 전개된 사건이었습니다. 민중은 역사의 전환기마다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이런 저항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어떻게 한 사회를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최근에 필자는 서울 출장을 가면서 남영동에 있는 민주인권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과거에 치안본부의 밀실수사가 이루어진 장소였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남산’과 보안사의 ‘서빙고’와 더불어 고문으로 유명했던 공간입니다. 최근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일반 시민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날, 책으로만 보았던 ‘대공분실’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민주인권기념관은 고문이 자행된 대공분실의 흔적을 최대한 많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몇 층에 있는지 위치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나선형 계단과 문의 모양이 모두 똑같은 5층 조사실은 처음 이곳에 끌려온 사람이 마주칠 냉기와 공포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한계를 알 수 없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위협하는 고문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515호는 故 김근태가 3주간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곳입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수사관들은 얼굴에 노란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가며 그를 고문했습니다. 이때 수건에서 나던 ‘다이알 비누 냄새’는 그의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평생 다이알 비누 냄새를 맡지 못했다고 합니다. 509호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 14일)이 발생한 곳입니다. 그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참고인’으로 끌려갔다가 고문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은 누구든 참고인 자격으로도 끌려가 고문을 받고 죽을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경찰은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자 ‘억’하고 쓰려져 숨졌다’라는, 정말 성의 없는 거짓말로 시민들을 우롱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분노한 사람들이 저항의 물결을 이루어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가 시발점이 된다는 면에서 6월 항쟁은 제주4․3사건과 유사합니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방 전후의 모순이 집약되어 발생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제주도 인구 중 1/10에 해당하는 1만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세 명의 제주 청년들이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는 제주4․3사건이 발발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고문치사 사건이 저항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제주4․3사건과 6월 항쟁은 비슷합니다.
한편,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3․1운동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동시다발적 시위는 6월 항쟁의 길목에서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2․7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1] 2․7추도대회는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추도식을 전국 각지에서 거행한 행사였습니다. 이때 시위 현장에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습니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로 아주 보기 드문 현상이었습니다. 故 박종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저항의 행렬은 3월 3일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날은 故 박종철의 49재에 해당되는 날이었습니다. 2․7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에서는 야당과 재야, 종교 세력과 학생 세력이 연대를 이루었고, 행동지침에 따라 시위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의 기본 틀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2]
이 두 대회를 통해 용기를 얻은 이들은 6․10국민대회를 통해 민주화의 주체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이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6․10국민대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대통령 간접선거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 국가권력에 맞서 일어난 시민불복종 운동이었습니다. 행사 하루 전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저항의 행렬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6․10국민대회는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3․1운동 이후로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국 37개 도시에서 일어난 6․26평화대행진은 6월 항쟁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군부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3일 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특별선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6월 항쟁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여는 어떠했을까요? 특기할 점은 6월 항쟁 때 보수적인 교단과 교회의 참여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활약한 진보 기독교뿐만 아니라, 예장 통합, 합동, 고신 등 주류 교단도 6월 항쟁의 현장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조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27-28)는 말씀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 담론은 상황에 따라 저항의 논리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서술이 인권이라는 가치가 성서에 부합하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수 교단의 교회에서도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는 예배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일상화된 인권 탄압과 고문이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반하는 크나큰 범죄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운동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87년 6월 항쟁 전후로 신앙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다양한 결들이 있었습니다. 거칠게는 명망가와 교역자로 대변되는 ‘온건파’와 소수의 대학생들로 형성된 ‘급진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3]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신학에 대한 입장에 따라 노선이 갈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6월 항쟁은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와도 맞물리면서 전개되었습니다. 6․29선언 이후 관심의 초점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로 옮겨졌습니다. 16년 만에 유권자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으니 대통령 선거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공명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청년학생의 자발성, 광범위한 대중동원력, 치열한 활동 등을 보여주면서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정치 혐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정치 혐오는 제도권 정치에 역겨운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정치를 경멸하는 정서입니다. 정치 혐오는 언론 매체를 통해 만들어지고 널리 확산된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정치 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애를 쓰곤 합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정치를 멀리하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무관심할수록 자신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낮은 투표율은 정치 혐오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여기에는 정치를 더럽다고 여기는 혐오증, 정치가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리감,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과연 세상이 바뀔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비관론,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양비론이 포함됩니다.[4] 하지만, 정치 혐오가 지속되고 강화될수록 권력은 최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방관하는 악순환도 이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이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로 정치 혐오를 꼽았다는 사실입니다.[5] 역대 정권이 정치혐오를 부추겨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다고 분석한 것입니다.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정치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총동원하였습니다.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이는 시민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이때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정치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논리로 ‘차선의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공정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후보들이 출마하여 당선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한 실망이 정치 혐오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실망하지 말고 패배주의에 휘둘리지 말자고 얘기합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에게 표를 주자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여러 의미를 내포합니다. 저는 그중 하나가 ‘불의에 저항하는 주체로의 부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저항의 몸부림을 하며 절망과 싸우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가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월 항쟁 전후로 등장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의 커다란 변화와 마주하면서 한국 교회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실천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 1987년 6월 항쟁 전후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1] 서중석, 『6월 항쟁: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돌베개, 2011), 76쪽.
[2] 서중석, 『6월 항쟁』, 99쪽.
[3] 김민아,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운동이 한국 시민운동의 형성에 끼친 영향」(서울대 종교학과 석사학위논문, 2013), 51쪽.
[4] 김형원, 『정치하는 그리스도인』(SFC출판부, 2012), 12-13쪽.
[5] 공명선거실천기독교대책위원회, 『공선기위 활동보고서』(1991),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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