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의 한 줄기와 충남 홍성의 작은 마을이 만나서 세워진 학교가 풀무학교입니다. 한국전쟁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에 세워진 풀무학교는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될 평민을 기르고자 했습니다. 오산학교가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면, 풀무학교는 ‘나라는 되찾았으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혼돈에 빠진 우리 사회를 일으킬 건전한 시민을 기르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으로 삼았습니다.(본문 중)

정승관(꿈틀리인생학교 교장, 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

 

1907년 여름 평양 을밀대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후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교육을 통한 길밖에 없다’는 ‘교육입국론’을 강조하는 강연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이에 감명을 받아 그해 12월 25일 자신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합니다. 이 학교는 개인의 입신출세를 위한 교육을 하는 학교가 아니라 나라를 구할 건실한 동량을 길러내고자 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 학교의 교육에 참여했던 이들(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비롯하여 류영모, 조만식, 이광수, 김억, 함석헌 등)과 이 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이중섭, 김소월, 주기철, 한경직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연 이후 독립된 나라의 근간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1회 오산학교 졸업생

 

이 오산학교의 한 줄기와 충남 홍성의 작은 마을이 만나서 세워진 학교가 풀무학교입니다. 한국전쟁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에 세워진 풀무학교는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될 평민을 기르고자 했습니다. 오산학교가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면, 풀무학교는 ‘나라는 되찾았으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혼돈에 빠진 우리 사회를 일으킬 건전한 시민을 기르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작은 학교가 개교한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시골의 한구석에서 학생 수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로 묵묵히 지낸 세월이었지만,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국사의 고비고비마다 선도적인 역할을 해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개교와 함께 학교에 도입했던 각종 협동조합 운동은 이후 소비자 협동조합, 생산자 협동조합을 거쳐 1980년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현재 홍동면에는 다양한 협동조합이 설립되어 주민들의 경제, 사회 활동의 뿌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1975년 일본 애농회 대표 고다니 준이치 선생은 일본의 과거사를 사죄하고자 한국을 방문했고, 일정 중 풀무학교와 당시 풀무원 농장에서 유기농업에 대해 강의를 하였습니다. 증산만을 외치던 1970년대 중반에는 유기농업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시작한 유기농업은 현재 홍성군의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필자가 풀무에 처음 발을 딛던 1977년에는 재래식 화장실 옆에 시멘트 벙커가 지어져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기만 했던 메탄가스 표집 시설이었습니다. 또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VIA(Volunteers in Asia) 일원으로 파견되어 풀무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던 케빈 갤리거 선생은 작은 봉급을 쪼개어 주말마다 천안에서 동판을 구입해 오곤 했습니다. 태양열 온수기 제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집약되어 1980년대 초 홍동에는 대체에너지 연구소가 세워졌습니다. 그 밖에도 농산물 직거래 운동, 귀농 귀촌 운동, 상황 중심 어린이집 설립, 본격 지역신문 발간 등은 이미 학교와 지역을 넘어 전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 중반 우리 교육에 새바람을 일으킨 대안 교육 운동의 밑바탕이 되어 준 풀무학교의 교육 시스템, 문당리 마을을 필두로 진행된 마을 만들기 운동, 마을 교육공동체, 의료생협 등은 일찍부터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 일들입니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6월 모내기 활동 사진.

 

지난 60여 년 동안 풀무가 시작하고 홍동 지역에 뿌리를 내린 다양한 마을 교육공동체의 과정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학교와 마을의 협력 관계는 ‘학교가 마을이고 마을은 학교의 교실이다’라는 원칙 아래 학교와 마을이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학교생활 자체를 하나의 작은 마을로 가상하여 시작된 각종 실험들에 점차 마을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했고, 이어서 마을에 하나둘씩 정착시키는 과정을 밟아 온 것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학교는 늘 새로운 과제를 찾아내고 시도해 왔습니다. 개교 초기 우리 사회가 극심한 빈곤 상태에 있을 때, 학교는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실행하고 전수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마을이 성장하여 마을의 주도로 다양한 활동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럴 때 학교는 다시 더 큰 과제를 발굴하고 시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1년 전공부(2년제 주민대학) 설립, 2009년 밝맑도서관 건립, 2010년 생태 연구소 건축 등이 그러한 사례들입니다.

지난 60여 년 동안 풀무학교와 홍동에서 진행된 일들은 대부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실행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제는 이런 과제들은 풀무학교나 홍동 지역을 넘어 더 많은 지역으로 확장하며 폭과 내용을 넓히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풀무학교 졸업생과 또한 이러한 흐름에 함께 해온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풀무학교가 발전시킨 역사적 가치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나누고 실천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2일에는 ‘(가칭)사단법인 풀무재단’의 창립총회가 있었습니다. 사단법인의 설립은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보다 적극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연구하며, 우리 사회에 적용할 실천적 과제를 해결하는 활동을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는 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늘 그랬듯이 풀무와 홍동은 새로운 과제를 찾아 나섭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요구와 현안, 그리고 보다 발전적인 사회변혁의 패러다임은 어느 때든 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2008년 풀무 개교 50주년 행사를 마친 후, 정리하는 글 말미에 저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풀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해주시던 많은 분들이 풀무 교육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략) 세상에서는 풀무학원이 불안을 느끼는 요인들을 다 해결한 것 같이 말하니 우리 마음속에는 더 큰 두려움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제 학교와 마을에서 나날의 과제에 충실하면서, 풀무의 선배들이 늘 그랬듯이 새로운 마음으로 앞을 내다보며 시대의 과제를 찾아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풀무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시도하고 진행해 왔다면, 더욱 복잡다단해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나온 것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세밀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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