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즉 완전히 선한 인간과 완전히 악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선한 인간과 상대적으로 좀 더 악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함께 있으며, 따라서 때에 따라 선한 행동도 하고 악한 행동도 한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하나님의 형상과 죄는 서로 대립한다. 선과 악이 함께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형상과 죄는 함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 안에는 선과 악이, 하나님의 형상과 죄가 함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생에서는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 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인간, 즉 선은 행할 수 없고 오직 죄만 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생각이다. 아담 이후의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는 생각은 성서적인 생각이 아니다. 창세기 9장 6절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이 본문은 아담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종말론적 미래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며, 지상의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결코 불합리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맥그래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죄가 동시에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위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 즉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하고 그 사랑에 붙잡혀야 할 필요성을 가리키며, 죄는 이끌리고 끌려가는 우리의 어두운 성향을 가리킨다.[1]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죄는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함께 있다.

죄란 무엇인가? 바울은 죄가 육신, 즉 세상적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롬 8:5-14). 죄란 단지 개인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상태를 가리킨다. 폴 틸리히는 타락을 소외의 실존으로 정의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는 죄의 본질을 불신앙, 교만, 정욕으로 보았다. 불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기중심적인 실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부인하고 자기를 높여 하나님처럼 되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정욕은 인간이 세계를 자아 안으로 끌어들여 자기를 확장하려는 욕구를 말한다.[2] 판넨베르크는 죄를 우리의 미래의 운명, 즉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를 이탈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운명 즉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3] 죄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참 목표 성취를 가로막는 인간 본성 안의 결함을 가리킨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하나님과 세상(이웃)과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의 자기초월적 개방성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적하는 죄는 그 세 차원의 관계 속에서의 자기중심적 폐쇄성인 불신앙과 미움과 절망에 있다고 할 수 있다.[4]

구약성서학의 관점에서,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 이야기(J 문서)는 죄의 인과적 기원에 대한 역사적 기술이라기보다는 죄의 비극적 보편성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표현했다. 즉 그는 모든 사람의 죄가 아담의 타락에서 기인한다고 기술했다(롬 5:12). 이 바울의 표현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원죄 교리가 생겨났다. 즉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간은 태생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악을 향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선을 이루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악을 따라가는 인간의 모순적인 이중적 실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키노의 『아담과 이브』(1624).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기 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천사들이 어린 아이부터 청년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맥그래스는 원죄 개념이 폭력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유전학적 고찰과 일치한다고 본다.[5] 유전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지배하는 내적인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죄는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다른 동물과 종들을 제압하고 생존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유전자는 생존투쟁에서 경쟁자들을 이기고 살아남도록 진화하였다. 인간이 철저히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도킨스의 견해는 인간이 원죄의 유전적 영향 안에 있다는 기독교의 원죄 교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6]

우리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즉 완전히 선한 인간과 완전히 악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선한 인간과 상대적으로 좀 더 악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함께 있으며, 따라서 때에 따라 선한 행동도 하고 악한 행동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선한 마음이 악한 마음을 누르고 선한 행동을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누르고 악한 행동을 한다. 또 선한 마음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무의식 속에 악한 마음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공존하고, 선과 악을 교호적으로 행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은 티끌만큼의 악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외 없이 모두 죄인이다.

한 인간이 경우에 따라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한 마음으로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안에 있는 두 가지 의미의 의지를 구별한다.[7] 하나는 ‘아비트리움’(arbitrium)이다. ‘아비트리움’은 여러 가지 대안들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이 의지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볼룬타스’(voluntas)다. ‘볼룬타스’는 행복을 위한 자유로운 사랑의 선택으로서, ‘아비트리움’의 행사를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그런데 인간(아담)은 ‘볼룬타스’로 참된 행복의 기초인 하나님을 자유로운 사랑 가운데 선택하지 않고 피조물(그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했다. 즉 그는 여러 대안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는 ‘아비트리움’은 유지했지만, 이 ‘아비트리움’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자유의지일 뿐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인간의 기형화, 즉 의지가 죄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즉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고 죄의 굴레에 사로잡혀 기형화된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의지는 갖고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의지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과 죄에 대한 이해는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한편으로는 죄를 짓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인간에겐 여전히 자신의 본성 안에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종교성이 남아있으며, 이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구성한다. 그러나 인간 안에서의 영과 육 또는 선과 악의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더욱 자신 안에서의 영과 육 또는 선과 악의 갈등을 민감하게 느낀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탄식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탄식이 아니라 그 이후의 더욱 애절한 탄식이기도 하다.

자신 안에 있는 역설 또는 이중적 모호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외적인 제도적 개혁은 결국 실패할 뿐이다.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만든 제도의 결함은 결국 인간 본성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다.[8] 20세기에 인류는 근대를 지배했던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와 역사에 대한 진보주의 신화가 무참하게 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자신을 미신에서 벗어난 이성적 인간으로 자부했던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비극이 앞으로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함축한다.


[1] 알리스터 맥그래스, 『인간 Great Mystery』, 오현미 옮김(복있는사람, 2018), pp. 231-32.

[2]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1951-1963), II, pp. 29 이하.

[3]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II, p. 248.

[4] 이에 대해서는 윤철호, 『기독교 신학개론』, pp. 198-200을 참고하라.

[5] 같은 책, pp. 238-39.

[6] 물론 이 유사성은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상실을 초래한 타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해질 수 있다.

[7] 이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H. 켈시, “인간,” 피터 C. 하지슨, 로버트 H. 킹, 『현대기독교조직신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2015), pp. 268-69를 참고하라.

[8] Richard Crouter, Reinhold Niebuhr on Politics, Religion, and Christian Fait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 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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