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들이 각자의 국익을 위해 경쟁하고 때로 이 경쟁이 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흔히 있어 왔다. 우리의 최대 관심인 지금의 한일 분쟁이 그러한 사례이다. 문제는 한일 분쟁 중에 나타난 우리나라 안의 혼란과 무질서이다. 당파적 이해관계와 엮여서 지혜로운 해결은 고사하고 사태의 진실조차 찾기 힘든 형편이다. 논점을 왜곡하는 가짜뉴스와 억지 논리들이 횡행하고 있다.(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기윤실 이사장)

 

최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피해자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 분쟁이 발생했다. 한국의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일본 기업이 일제시대에 강제 동원했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하여 한국 정부에 대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무역규제를 가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들이 각자의 국익을 위해 경쟁하고 때로 이 경쟁이 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흔히 있어 왔다. 우리의 최대 관심인 지금의 한일 분쟁이 그러한 사례이다. 문제는 한일 분쟁 중에 나타난 우리나라 안의 혼란과 무질서이다. 당파적 이해관계와 엮여서 지혜로운 해결은 고사하고 사태의 진실조차 찾기 힘든 형편이다. 논점을 왜곡하는 가짜뉴스와 억지 논리들이 횡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나라를 지향해야 할 한국의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가짜뉴스와 억지 논리들이 유포되고 있다.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를 해소하기 위해 이미 잘 알려진 자료들을 중심으로 한일 분쟁의 핵심 내용을 네 가지 명제로 알기 쉽게 정리해 본다.

 

<제1명제> 일제 강제 동원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일본 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있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정당하다.

최근 한일 분쟁의 핵심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며 모든 논의는 먼저 이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친일/반일 논쟁은 대표적으로 현 사태를 오도하는 방향이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지극히 정당하다. 이 판결의 결론을 인용하자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배상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개인과 기업 간의 배상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양국의 법조계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법적 논리이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시위하고 있다. 이들은 본 판결에서 승소하였다.

 

‘외교보호권포기설’이라고도 부르는 이 법리는 개인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과 개인의 피해청구권은 서로 다르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주로 일본 측에서 제시한 해석으로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이에 따른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정통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1년 8월 일본 의회에서 일본의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청구권으로 양국의 외교적 보호권은 상호 포기되었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도 중국인 강제징용피해자가 일본 기업에 제기한 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 간의 합의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소멸될 수 있지만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변호사협회의 2010년 공동선언도 일제강점기의 피해자 보상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개인적인 구제 조치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제징용자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제2명제> 그러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한일 정부의 태도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각 정부가 바라보는 국가 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이미 한일청구권에 미래에 발생할 모든 개인적 보상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아베 수상이 부실하게 체결되었던 한일청구권협약의 일부 자구를 활용하여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권리와 보상을 거부하고, 두서없는 경제적 협박으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미 소개한 바처럼, 국가의 외교보호권과 개인적 배상청구권의 분리를 설파한 것은 도리어 일본 측이었다는 게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피해 일본의 국익 보호를 위한 방어논리를 개발하다 보니 사뭇 옹색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7년의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을 들 수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강제징용피해자 개인의 실체적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지만 “소송 청구의 권능”은 소멸되었다는 어정쩡한 판결을 내렸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에 피해가 가는 판결을 일본 법원이 내릴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입장으로 본다면 일본 기업들이 끼친 개인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따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다. 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청구권협정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의 전력을 본다면 이승만과 같이 지독한 반일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그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들에게 한푼이라도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다행히 일본 측에서 개발한 외교보호권포기설이라는 법리가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개인적 청구권의 행사를 지지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함으로써 민주적 삼권분립을 강화하고, 개인적 피해보상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부응하고, 일본 정부의 부당한 압력을 극복하는, 소위 돌팔매 하나로 세 마리 참새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사라져버린 “소송 청구의 권능”을 한국 법정에서 되살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최근에 개방된 자료들을 보면 일본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흔적이 발견된다. 일본 외무성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게 강제징용판결이 일본 기업에 불리하게 나올 경우 한일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당황한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늦추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응하였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면서 판결은 더 이상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에게도 동일한 압력을 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베 정부에 타협책으로 양국의 기업들이 기금을 마련해 개인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 기업에게 개인 배상의 선례를 만드는 게 일본의 이익에 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선택은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일본 이익의 심대한 손실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한국의 내정에 과도하게 간섭함으로써 한국민의 분노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반도체 핵심 품목 수출 규제 조치를 하루 앞두고 열린 일본 여야의 당수 토론회에서 아베 총리는 이번 조치가 양국 역사 문제 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출처: KBS1 Youtube 캡쳐)

 

<제3명제>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공멸한다.

가끔 젊은이들의 유튜브에서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질문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은 자명하다. 둘 다 망한다. 아마도 중국이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역사를 보면 전쟁을 하는 나라는 망하고 그 전쟁에 물건을 팔아먹는 나라는 흥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세계 전쟁사를 보면 아주 하찮은 일에서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북문제가 아니라 한일문제로 동북아 평화가 깨질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함께 망하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국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언론사가 매년 각 국의 국력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내고 있다. 2019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1위, 일본이 7위, 한국은 10위이다. 경제력과 정치력 그리고 국제동맹 점수는 비슷한데 군사력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8.4점으로 일본의 2.0점에 크게 앞서고 있다. 그러나 국가 리더십에서 한국은 1.9점으로 일본의 6.6점에 크게 뒤지고 있다. 총점으로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약간 앞서 있다. 경제력과 리더십은 일본이 우세하더라도 군사력에서 한국이 압도적이므로 전쟁을 한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다룰 때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미국은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한국에도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다. 한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1945년부터 1985년의 기간 동안 미국의 대외 원조 총량 제3위가 바로 한국이었다. 전후 유럽 전역에 쏟아부은 마샬 플랜 원조 총액이 170억 달러였는데, 이 기간 동안 조그마한 한국 하나에 쏟아부은 돈이 무려 13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은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북아 지역에서 한미일 동맹이 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또 깨어지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긴밀히 하는 한 일본과의 갈등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제4명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각 국가들은 국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국내의 각 당파들도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격렬히 경쟁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당의 목표가 정권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 이익과 당파 이익이 일치하는가에 있다. 때로 당파 이익만을 고려하다가 국가 이익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경우가 있다. 1592년 4월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그러한 사례이다. 일본에 다녀온 조선 통신사들이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성을 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사인 김성일은 정사인 황윤길에 반대하여 왜란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당파의 주장에 동조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파적 분열이 조선왕조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한일 간의 분쟁을 없애는 게 한국인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국가 이익이 서로 다른 데 분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자신의 국가 이익을 협의로 해석하여 무리한 일을 저지른다고 탄식할 필요도 없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 분쟁조차도 한국의 국가 이익 증진에 활용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일 분쟁은 한일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새롭게 정립할 좋은 기회이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한 일본 의존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막대한 국제수지 불균형 즉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이 구조를 정부가 나서서 극복하자니 국제자유무역체제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제 이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긴 것이다. 지나친 대일의존을 극복하여 한일 간의 국제 분업을 호혜적으로 정상화하고 한일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바로 잡는 행위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똘똘 뭉쳐서 함께 노력하면 충분히 성취 가능한 일이다.

각 당파는 권력 쟁취를 위해 노력하되 국가 이익 증진에도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하다. 자신의 당파에서만 인정되는 국가 이익이 아니라 국민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국가 이익이어야 한다. 민주 국가에서 어차피 득표를 많이 얻는 쪽이 정권을 잡게 되니 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당파 이익과 국가 이익을 일치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짜뉴스로 백성을 속이려는 자들이 명심해야할 금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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