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교회사는 개신교가 제사 문제에서 관용이나 타협 대신 처음부터 엄격한 금지 정책을 채택했다고 서술해 왔다. 비록 일제 강점기 말에 총독부의 강압으로 일본 조상신을 섬기는 신사(神社)참배를 종교 의례(우상숭배)가 아닌 국가 의례(시민 의무)로 수용했으나, 해방 이후에는 제사 금지 정책을 견지하면서 초기의 제사 금지론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제사 신학의 역사는 간단하지 않으며, 교회의 정책은 변화해 왔다. 1900년 전후에 형성되고 1920년대 보편화된 추도회만 보아도 개신교는 제사 문제에서 천주교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제사가 예배(worship)인가 추모와 숭경(reverence)인가를 놓고 동아시아 기독교는 400년 넘게 토론해 왔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사에서 제사 문제와 신사참배 문제는 배교와 순교, 혹은 적응주의와 배타주의가 맞물리는 갈등의 자리였다. 조선의 주자학을 배경으로 하는 제사나,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신사참배는 의례를 통한 정치·사회적 헤게모니의 통제 기제였다. 현존 교회사는 개신교가 제사 문제에서 관용이나 타협 대신 처음부터 엄격한 금지 정책을 채택했다고 서술해 왔다. 비록 일제 강점기 말에 총독부의 강압으로 일본 조상신을 섬기는 신사(神社)참배를 종교 의례(우상숭배)가 아닌 국가 의례(시민 의무)로 수용했으나, 해방 이후에는 제사 금지 정책을 견지하면서 초기의 제사 금지론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제사 신학의 역사는 간단하지 않으며, 교회의 정책은 변화해 왔다. 1900년 전후에 형성되고 1920년대 보편화된 추도회만 보아도 개신교는 제사 문제에서 천주교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제사의 의미

유교가 목표로 하는 인의예지신을 회복한 인간다운 인간은 인륜 도덕을 실천하는 자이고 그 구체적 행동은 오륜에서 의례로 구체화된다. 자녀는 부모에게 생전에는 효도하고 사후에는 상례와 제례를 통해 유지를 받들고 효를 표현한다. 유교의 구원론은 조-부-본인-자-손으로 연속되는 가족 혈통의 존속과 번영에 있다. 일종의 사회 구원론이다. 제사는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후손을 연결하고, 조상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의 일체감을 강화한다. 제사는 남자 직계라야 같은 기(氣)가 상응한다. 이 점에서 부작용이 생겨났는데, 남아 선호, 조혼제, 처첩제가 발전했고, 여성의 지위가 차별 받았으며, 제사가 허례허식으로 변하고, 조상의 무덤을 화려하게 과시하는 낭비가 일어났다.

 

명절 제사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

 

초기 선교사들의 제사 금지론

개신교 선교사들은 동일 한자 문화권인 중국 개신교가 만든 반(反)제사 변증론을 수용했다. 메드허스트의 『청명소묘지론』(淸明掃墓之論, 1826)과 네비어스의 『사선변유』(祀先辨謬, 1859)가 대표적 변증서였다. 또한 1877, 1890, 1907년에 개최된 상해선교대회에서 결정된 제사 정책이 한국에 수용되었다. 초기의 엄격한 제사 금지 정책은 1890년 대회에서 소수의 진보적 선교사의 관용론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했고 점차 온건론으로 이동했다. 1904년부터 한국에서도 엥겔과 게일에 의해 신중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07년 상해선교대회의 제사와 신사참배 금지 결정은 한국교회의 공식 정책이 되어 193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은 제사 금지 정책에 공조하고 한국인에게 제사 포기를 요구하면서 보본반시(報本反始: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감)의 원리에 따라 조상 대신 만물의 근원인 유일신 하나님 예배를 요구했다. 내한 선교사들이 제사를 금지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① 신학적: 제사는 십계명의 1, 2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이다.

② 종교적: 제사는 가톨릭의 연옥설과 성인 숭배와 유사한 의례이다.

③ 문화적: 전근대적 구법을 폐기하고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는 예법이 필요하다. 제사의 원래 의미인 하나님 숭배가 시대 변천과 함께 타락하여 조상과 잡신 숭배로 바뀌었으므로, 기독교 예배를 수용하는 것은 제사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④ 경제적: 빈번한 허례허식의 제사는 개인적 가난과 국가적 후진의 원인이다.

⑤ 윤리적: 제사는 위계적 가부장제도, 조혼, 일부다처제, 남녀 차별 등의 악습의 근원이다. 제사 폐지는 여성 인권을 향상시킨다.

⑥ 정치적: 제사 종교인 유교를 국가 종교로 하는 조선은 후진 정체 사회이다. 근대 국가 형성에 장애가 된다.

이는 계몽주의와 동양주의의 편견을 가진 선교사들의 문화관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청교도 전통의 북미 개신교가 고수한 반제사론의 배경에는 천주교의 의식주의, 연옥설, 성인 숭배에 대한 복음주의의 편견이 작용했다. 비록 당시 제사의 종교적 측면이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하였고 관용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했지만, 초와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면 그 대상에 상관없이 신에 대한 예배로 간주하는 경직성은 문제였다. 천주교의 연옥 교리와 성인 숭배를 반대한 개신교 전통 때문에 선교사들은 조상 제사에도 동일한 요소가 있다고 예단했다. 분별력 있는 이해로 그 차이점을 발견해 내는 연구심이 부족했다.

기독교의 제사 반대는 검의 양날처럼 한편으로는 무너지는 유교 성리학 체제에 타격을 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의 천황 숭배와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로 규정함으로써 1930년대 일제의 의례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기독교의 일본화와 전쟁을 위한 국민 총동원 정책과의 충돌을 예비했다.

 

초신자들의 고민

청일전쟁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기 시작한 한국인의 영성 변화는 러일전쟁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이는 양반층의 기독교 입교와 제사 포기로 현실화되었다. 한국 교인들은 제사 대 복음, 조상 대 그리스도, 전통문화 대 근대문화, 정통 대 이단, 기존 공동체(가족과 친구) 대 새로운 공동체(교회)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후자를 선택한 교인들의 대다수는 한편으로는 기존 공동체의 외적인 박해와 조상과 단절한 불효자라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보다 더 엄격한 제사 금지 정책을 지지했다. 제사가 계급, 성, 가문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용했다면, 기독교 예배는 이 차별을 파괴하는 평등의 상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제사 문제는 기독교 개종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제사 포기는 우상파괴적 신앙 행위만이 아니라 전통, 조상, 부모, 친족, 친구와의 단절이라는 소속감의 상실을 의미했고, 유교적 영생을 담보한 족보에서 제거되는 실존적 위기를 의미했다. 많은 한국 교인들이 가족과 문중의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박해와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불참하고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일부는 박해에 굴복하고 신앙을 포기했다. 가족 공동체와 단절된 개인주의적 구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효도 신학의 열매: 토착적인 추도회 만들기

제사 금지는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제사의 근본 동기인 효도, 조상 기념, 가족 공동체 유지 등의 가치와 미풍양속 요소를 기독교화 할 건설적 방안이 필요했다. 한국의 종교 문화와 가족 제도, 한국인의 심성 깊이 뿌리 내린 제사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한국인의 영성과 사회성에 어울리지 않았고, 전도를 위해서도 기독교적 대안이 마련되어야 했다.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문화적 적절성을 구비한 대안이 마련되어 제사가 사라진 진공을 채워 주어야 했다. 문화적 필요와 한국인 지도자들의 제사 변증론과 신학적 성찰의 결과 기독교적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토착화된 추도회가 발전되었다.

최병헌은 제사법의 가변성과 원래 의미인 상제 숭배와 추수 감사에 근거해 조상 제사를 하나님 예배로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노병선은 전도 소책자 『파혹진선론』(破惑進善論, 1897)에서 의롭게 산 조상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그리스도 중심의 조건부 보편구원설을 제기했다.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도 한국인들에게 조상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1897년에 창간된 『죠션크리스도인회보』나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은 고대 동양 성현들도 하나님을 숭배했다고 주장하고 유교와 기독교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호 공존이 가능하다고 논증했다. 그들은 일방적 파괴주의를 경계하면서 기독교에 의한 유교의 완성을 주장하는 성취론을 개진했다. 길선주도 기독교 계몽 소설 『해타론』(1904)에서 요순 황제와 공자 등 동양 성현을, 비록 영생국은 아니지만, 예수의 인을 받고 경성 갑옷을 입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성취국에 들어간 성자로 인정했다.

1890년 헤론 의사와 1894년 홀 의사의 추도식부터 선교사들의 추도회에 참석하고 관찰하던 한국 교인들은 1896년부터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위한 토착적인 추도회를 드리기 시작했다. 1896년 7월 원산에서 신자 오(吳)씨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제사를 폐지했지만, 제사 기일이 되자 선교사 스왈른과 간단한 추도식 후 오씨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신주와 각종 제기, 부적들을 태웠다. 그 후 그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가족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족 예배를 드렸다.

문서에 나타난 형식을 갖춘 첫 추도회는 1897년 서울에서 시행되었다. 무관인 감리교인 이무영은 돌아가신 모친의 첫 기일 때 다음과 같은 기독교식 추도회를 드렸다.

현금에 궁내부 물품사장으로 있는 이무영 씨는 우리 교회 중 사랑하는 형제라. 음력 유월 이십구일은 그 대부인의 대기날인데 그 형제가 망극한 마음과 감구지회를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구세주를 믿은즉 다른 사람과 같이 음식을 벌려 놓고 제사 지낼 리는 없거니와 부모의 대소기를 당하여 효자의 마음이 어찌 그저 지나가리오. 이에 교중 여러 형제를 청좌하고 대청마루에 등촉을 밝히 달고 그 대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 대부인이 생존하여 계실 때에 하나님을 믿음과 경계하던 말씀과 현숙하신 모양을 생각하며 일장을 통곡하고 교우들도 이무영 씨를 위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경히 밤을 지낼새 그 모친에게 참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이후에 다른 교우들도 부모의 대소기를 당하면 또한 이무영 씨와 같이 하기가 쉬울 듯하더라. (“회즁신문”,『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8월 11일)

제사와 비슷한 점은 의례 시간을 밤으로 정한 것, 등촉,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 통곡 등이었다. 제사와 다른 점은 선교사와 교인 초청, 제사상(술과 음식) 차리지 않음, 예배로서 기도, 찬송, 말씀, 회고, 기도로 진행한 점이었다. 곧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그대로 유지하되 우상숭배적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했다. 비판적 문화 적응 사례인 이 한국적 추도회는 점차 다른 교인들에게 보급되어 기독교 의례로 자리잡았다.

1903년 5월 제물포의 손우정은 모친상 일주기에 음식을 마련하고 수십 명의 교우를 밤에 초청하고, 찬송, 기도, 성경 봉독, 모친 노다 부인의 신앙과 행적 회고의 순서로 추도회를 드렸다. 예배 후 그들은 모친이 좋아하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변형된 추도회에 대해 권사 장원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는 별세한 부모를 위하여 제사를 차리고 밤이 다할 때까지 목이 쉬도록 우는 것보다 더욱 부모에게 효도가 될지니, 노다 부인께서 이같이 자제를 교훈하심과 또한 그 자제의 이 같은 효심을 치하하노라.”

이후 한국교회는 계속 추도회를 가졌으나, 추도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였다. 선교사들은 1904년 선교대회에서 일부 교인들이 추도회 때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비록 일부 선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으나, 북미 복음주의 신학은 사후에는 심판이 있고 한번 상벌이 내려지면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자를 위한 기도나 연옥설은 전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므로,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에 서 있던 장로교나 감리교는 이를 강력히 금지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추도회 때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폐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고” 구절도 생략했다.

제사 대신 드린 추도회는 ① 조상들의 매년 기일 인정하고, ② 신주 대신 영정을 모시게 했으며, ③ 기일 제사와 묘지 방문 제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족보 유지, ④ 제사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두었다. 다른 점은 ⑤ 목회자와 교우들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와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⑥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추도회 때 믿지 않고 죽은 조상과 부모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교회나 학교나 단체에서 기독교식 추도회 거행, 1897~1910

추도회나 추도 예배라는 용어는 일본 불교와 신도의 용어로서, 일본 불교가 한국에 오면서 1890년대부터 사찰에서 죽은 자를 위한 추도 예배가 시행되었다. 1897년경부터 장례식 대신 서광범 추도회, 1902년 배재학당에서 열린 아펜젤러 목사와 조한규 선생 추도회, 1905년 민영환 공 추도회, 1907년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장 송석준 씨 추도회 등이 열렸고, 1908년에는 김홍집의 기일에 추도회, 1909년 이토 히로부미 국민 추도회, 1910년 5월 청년회관에서 박에스더 의사의 추도회가 열렸다. 이처럼 ‘추도회’는 지인들이 장례식이나 제사 때 모여 추모하는 모임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는 불교, 신도, 일본 무녀(신도)와 한국 무당이 조직한 봉신교도(무녀회 600명)가 별도로 거행하면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종교(불교, 신도, 무교) 의식으로서의 추도회와 사회 의식으로서의 추도회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두 의미가 공존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사참배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

이어서 교회나 청년회관에서 가족 추도회가 열리면서 기독교 의식으로서의 추도회 의미가 강화되었다. 1908년 1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윤치오 부인 이숙경 씨의 1주기 추도회가 정동교회에서 저녁 6시에 열린다는 광고가 며칠간 실렸다. 5월에는 연동교회 고찬익 장로 장례 추도회가 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는 가정의 추도회와 사회 추도회 중간 형태로서 교회에서 드린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모인 추도회였다.

논쟁이 되는 추도회는 집에서 드리는 가례로서 제사 대신 드린 추도회였다. 그러나 문묘 석전이나 신도회나 무녀회의 추도회, 신사참배와 같이 추모와 공경과 예배가 혼재한 상태의 공공장소에서의 추도 의식은 논쟁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이 촬영한 일제강점기 제사 지내는 모습. (출처: wikipedia)

 

추도예배 금지와 허용 교차 후 공식화, 1910~1945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부모 기일에 기독교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이웃을 불러 함께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가”라는 헌의안에 대해, 형식은 예배와 같으나 제사와 다르지 않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이런 헌의안에서 보듯이, 일반 교인들 사이에서는 추도식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요소 때문에 숭경 차원을 넘어 예배적 요소가 있다고 보고 금지했다. (현재 장로회에서는 예장 고신 교단이 이런 입장에서 추도회를 권장하지 않는다.) 1925년 봄 총회가 발행한 『장로교회 혼상예식서』(長老敎會 婚喪禮式書)에도 상례만 규정 설명하고 추도회는 언급하지 않는다. 1933년, 1938년 클라크 목사가 편집한 예식서 핸드북인 『목사필휴』(牧師必携)에도 상례만 상세히 설명하고 추도회는 없다. 따라서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추도예배를 허용하지 않았고, 신도들의 개인 의사로 가정에서 추도회로 모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조선감리교회는 1934년 교리와 장정에 “부모님 기일 추도 예배 규정”을 만들고 기념 예문도 삽입함으로써, 기존 교인들 사이에 시행해 오던 ‘추도 예배’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효도 신학과 추도회가 발전된 것은 유교적 효도 사상과 제사에 기독교가 접목된 결과였다. 기존 효도관과 제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리고 새로운 서양 기독교나 미국 청교도의 효도관과 추도회를 이식하지 않았다. 접목을 위해서는 기존 대본 나무의 절단이 필요하지만, 접목한 후에 새 가지는 그 대본에 고착해서 생기를 나누어야 공생하고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 제사 금지라는 절단이 있은 후에는 제사 문화에 새로운 기독교적 효도 신학과 추도회가 접목되어 새로운 한국적이고 기독교적인 효도 신학이 창출되었다. 물론 제사라는 대본 나무의 역사적 뿌리에 하나님 예배가 놓여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추도 ‘예배’의 허용은 곧 신사참배 허용으로 연결되었다. 추도 예배에 더 관용적이었던 감리교회는 큰 토론 없이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수용하고 신사참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사와 추도 예배의 연속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던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문제에서 다시 논쟁했다. 한국의 조상신도 섬기지 않던 서북 지역과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장로교회는 일본 조상신 숭배를 반대하고, 결국 미션 스쿨을 폐교하고, 결국에는 주기철과 같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서울 경지 지역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수용하고 타협했다. 그러나 모든 노회들이 차례로 신사참배를 수용한 1938년, 결국 9월 10일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장로교회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신사에서 일본 조상신에게 참배했다. 그 참배는 예배가 아니라 숭앙과 경모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적 적용과 과제

1) 기부 문화: 조상 숭경 문화의 표현이었던 조상을 기념하는 기부 문화는 지난 50년간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 교회와 학교 건립을 위해서 많은 기부가 이루어졌지만, 세브란스 병원처럼 개인 명의가 드러나고 기념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제사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우리는 그 의례적 차원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를 통해 조상을 기리는 기부 문화 발전을 가장 먼저 토론해야 할 것이다.

2) 가족 공동체: 제사 폐지로 인해 가족 공동체 윤리가 훼손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가족의 붕괴와 변화는 세속화와 도시화에 수반된 현상이지만, 제의와 음식 공동체로서의 가족 공동체 회복에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성례를 통해 가족처럼 되고, 가족이 가정 제단을 통해 작은 교회가 되었던 초기 한국교회의 전통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3) 역사의식: 도시에서는 일반인들도 제사를 귀찮게 여긴다. 개인주의나 1인 가구의 확대로 제사가 사라지고 있다. 백년 전에는 목회적 차원에서 제사를 추도회로 토착화했다면, 오늘날에는 사라지는 조상과 전통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조상 추모 의례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추석 연휴 해외여행보다, 교회에서 특별 수련회를 통해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거나, 하루나 이틀 국내 기독교 유적 순례 여행을 떠나는 것도 시도해 볼 만할 것이다. 가족 차원에서는 부모나 조부모, 교회 차원에서는 교회의 원로들의 회고담을 촬영하여 자료로 남기는 운동을 하면 좋겠다.

4) 기독교적 장례 문화: 무엇보다도 과거, 조상, 죽음을 넘어, 미래, 후손, 부활의 전망을 선양하는 추도회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 장례 문화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인간의 마지막 의례인 장례를 병원에서 의사가 처리하는 죽음과 화장(火葬)장에서의 장례로만 처리하고 상업화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신학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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