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세종은 대단한 임금이었다. 파격에 파격을 더하며 제도를 바꾸고, 관습을 무너뜨리고, 좋은 사람을 보면 들어 썼다. 단 하나, 백성을 위한다는 목적에서다. 이러한 임금을 장영실이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통해 만나고 쓰임받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다. 노비가 임금의 눈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겠는가. (중략) 왕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으니 주변에 있던 노비가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세종과 장영실에 대한 영화다. 조선 시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장영실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할 만하다. 관노에서 시작하여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천재 과학자의 이야기에 세종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얹힌다. 무엇보다도, 진한 색을 가진 두 배우를 먼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로 이미 인간적이고 관습에 매이지 않은 세종을 연기했던 한석규와 영화 ‘명량’에서 깊은 고뇌와 우직함을 지닌 무장 이순신으로 드러났던 최민식이 만났다. 이 영화에서도 둘의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진다. 왕에게 대드는 신하에게 갑자기 ‘X새끼’를 내뱉는 세종의 모습에서도, 왕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들이대는 충신의 모습에서도. 영화에서 두 사람의 연기는 스토리보다도 먼저 우리를 압도한다.
메가폰을 잡은 허준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 ‘외출’, ‘호우시절’과 같은 멜로에 강했다. 멜로에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번 영화는 ‘덕혜옹주’ 다음으로 찍은 두 번째 역사극인데 잘 만들었다. ‘덕혜옹주’ 때 너무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받았는데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아니 그런 티가 별로 안 난다.
영화는 세 가지 정도 생각해 볼거리를 주었다. 첫째는 리더십이다. 관노 장영실을 파격적으로 들어 쓴 세종의 리더십. 재주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파격을 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조정에서 그런 난리가 났다. 보통 인재는 주변의 시기와 질투로 어려움을 겪는다. 권력과 관련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곤란한 중에도, 그리고 명나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들어 썼다. 여기에 장영실은 자신의 노력과 재주로 응답했다. 둘은 서로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과연 세종은 대단한 임금이었다. 파격에 파격을 더하며 제도를 바꾸고, 관습을 무너뜨리고, 좋은 사람을 보면 들어 썼다. 단 하나, 백성을 위한다는 목적에서다. 이러한 임금을 장영실이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통해 만나고 쓰임받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다. 노비가 임금의 눈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겠는가. 장영실이 임금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론 좋은 리더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왕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으니 주변에 있던 노비가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둘째는 외교 문제다. 이 영화의 핵심에 하늘을 본다는 천문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을 보아 계절을 읽겠다는 것은 단순히 과학의 문제일 뿐인데 이것이 명나라에게 걸렸다.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대신들이 자진해서 명의 조정에 알린 것이다. 그랬더니 장영실이 발명한 천문 기기들을 없애고 발명가인 장영실을 잡아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여기서 왜 과학이 이렇게 나라의 운명을 가를 문제가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그게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의 태도였고, 그런 세계관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중국의 한 분봉 국가 정도로 본 조선 신하들의 태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작은 나라의 모습이 비슷하다. 무기를 개발과 자주국방의 한계선을 그어주는 형제 나라가 있다. 우리가 지켜주는데 너희에게 무기가 왜 필요하겠냐 하지만, 지켜주는 비용은 놀랍게 청구하는 태도에서 과거의 명의 모습을 본다. 또, 형제 나라의 대사가 정부 인사와 국회의원들을 불러 윽박지르고 다그치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니 사대의 형국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은 이런 민망한 형편 속에서도 나라의 실익을 찾아내는 것이 외교이긴 하다. 영국 총리였던 블레어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영국이라는 그 위대한 나라의 총리가 이런 소리를 들어가면서 미국 편을 노골적으로 들었다. 심지어 전쟁에 깊이 개입하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국익을 위해 그런 모욕들을 참아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파워를 가진 미국과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시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중대한 가치로 여겼다. 문명국가인 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조선의 대의명분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작은 중국, 소화(小華)가 되길 바랐다. 조선의 신하지만 명에 충성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다. 그게 유교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믿었다. 여기에 양반을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 정치가 한몫을 한다. 나라는 임금이 아니라 사대부가 운영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왕 앞에서도 굽히는 법이 없다. 왕의 명령보다도 대의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대의라는 것이 명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셋째, 시대정신이다. 세종 치하에서 장영실이 나타났고, 황희 정승, 집현전 학자인 박팽년, 최항, 신숙주, 성삼문 같은 이들이 나타났다. 마치 서구의 르네상스 시절 메디치가의 후원 가운데 위대한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일어난 것과 같이, 세종의 치하에서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신하와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시대정신이 발휘될 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들이 일어나고, 그 인물들로 인해서 그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영화에서도 수많은 반대 세력을 뚫고 일어나는 인물들이 빛나고,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도 빛난다.
영화의 아쉬운 점은, 세종과 장영실의 인간적인 관계에 치중하다 보니, 멜로로 흐른다는 것이다. 감독이 멜로에 강하다 보니 서사극의 웅장함을 못 견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군데군데 역사적 서술이 필요한 부분을 생략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관노 장영실이 소개되면서 그 이름을 쓰는데 당시 노비에게 성씨가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두 주연 배우인 한석규와 최민식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는 아깝지 않다. 게다가 윤제문, 신구, 허준호, 김홍파, 김태우, 임원희, 김원해 등 이미 다른 영화에서 주연을 했던 배우들도 다수 출연한다. 이들의 연기로 정말 곳곳에서 불꽃이 튀어 올라오는 것 같은 긴장감이 든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영실의 국문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이 장면은 흔들리는 앵글로 불안을 고조시키며 시작된다. 세종과 영실이 대면하는 부분은 두 배우의 표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그리고 어느새 둘과 함께 울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관객이 하는 말이 들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어.” 감독은 분명 현실과의 무리한 연결을 피한 것 같은데, 어느새 관객들은 600년 전 조선의 역사에서 오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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