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연구해온 호남신학대 최상도 교수는, “5.18 민주묘역에 종교를 확인할 수 있는 묘가 199기(基)인데, 그중 130기 이상이 기독교(개신교)인으로 추정될 정도다.” (중략) 유신 시대부터 지역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기독교가 5.18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열흘간의 5.18 전개 과정에 공식적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습위원회’에 참여했고, 당시 광주 모든 시민처럼 지역 교회 역시 시위대/시민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본문 중)
2020년에 다시 5.18을 돌아본 이유(반태경)
– CBS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그 해 봄> 이야기
반태경(CBS PD)
왜 ‘그 해 봄’이었나?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4.19 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그리고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건들이 많은 2020년입니다. 저는 평소에 역사적 사건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기에, 올해엔 어떤 주제를 심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올 초에 5.18 기념 재단 및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와 의기투합할 기회가 찾아왔고,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그 해 봄> 프로젝트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제목은 문법적으로는 ‘그해 봄’ 즉 ‘1980년 5월의 봄’이 맞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 해 봄’이라는 제목을 쓴 것은, 1980년 5월의 봄/광주는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The)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5.18 전후 광주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함으로써 5.18을 다시 돌아보고(봄) 싶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 해 봄> 프로젝트는 총 7부작의 릴레이 인터뷰, 인터뷰를 재구성한 토크멘터리(인터뷰 다큐멘터리), 그리고 5.18 4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나누기 위해 준비한 짧은 캠페인 영상 등 다각적인 컨텐츠로 기획했습니다. 제게 배정된 다른 업무가 있음에도 별도로 기획한 프로젝트이기에 넉 달간 1인 제작을 해야 했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무렵 확산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갖 번민과 우려 속 지방 출장을 다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4월 초부터 무사히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5.18에 참여하고 헌신한 기독교의 역할 재조명
이번 토크멘터리는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정식 ‘다큐멘터리’로 내놓지는 못하였지만, 40년 전 5.18을 겪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나눠 주던 시장 상인, 교회 권사님, 본인의 차로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던 택시 기사 등 다양한 분들을 섭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10명이 넘는 분들의 ‘그 해 봄’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마음의 빚’을 가지고 이후를 살아오셨다는 분들의 회고, 광주기독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老사모님들의 생생한 증언, 그리고 5.18과 그 이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가슴 아픈 이야기 등을 담담한 시각에서 다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회 “빚진 자의 마음으로” 5.18 기념 재단 이사장 이철우 목사
2회 “예수의 사랑으로 부상자를 돌보다”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사 김복순/박경희 사모
3회 “빚진 자의 심정으로 광주의 실상을 알리다”- 5.18 당시 ‘투사회보’ 제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 저자 전용호 작가
4회 “무기고의 의인(義人)” 故 문용동 전도사 (호남신대 동기 윤상현 목사, 호남신대 최상도 교수)
5회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신학생” 한신대 故 류동운 열사 (동생 류동인)
이런 인터뷰들을 통해 5.18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수행했던 역할을 정리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교인’들의 많은 참여는 있었는데, 그걸 ‘교회’의 (공식적인) 참여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광주에서 5.18을 연구해온 호남신학대 최상도 교수는, “국립 5.18 민주묘역에 종교를 확인할 수 있는 묘가 199기(基)인데, 그중 130기 이상이 기독교(개신교)인으로 추정될 정도다. 하지만 1980년 당시 광주 시내에 존재하던 수백여 곳의 교회에 연락을 취했지만, 교회의 책임 있는 참여가 담긴 문서(주보/당회 회의록 등)는 찾기 드물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유신 시대부터 지역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기독교가 5.18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열흘간의 5.18 전개 과정에 공식적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습위원회’에 참여했고, 당시 광주 모든 시민처럼 지역 교회 역시 시위대/시민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기독인 5.18 희생자들
사실 ‘5.18 40주년’이라는 주제는 전작(前作)이었던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들 때부터 제가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5월의 세 신학생”이라는 가(假)제목까지 만들어 자료를 모으고 있었던, 세 청년 故 문용동, 故 류동운, 故 김의기 열사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그 해 봄> 시리즈를 통해서 다룰 수 있었습니다.
시민군 문용동
5월 26일 날 저녁
오래된 단팥빵 두 개 먹었다 배고픈 것 나았다
옆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 독했다
구약성서 모세의 떨기나무와 벌거숭이 시나이산을 생각했다
호남신학대 졸업하면
낙도에 가
교회 개척할 생각도 가려운 듯 무러운 듯 이어졌다
(…)
죽음이 다가왔다
신 새벽이었다
계엄군 충정작전 병력이 칠흑 속 다가왔다
도청 1층
탕 탕 탕 쓰러졌다
2층
풀 풀 풀 쓰러졌다
M16 총탄 세 발 맞은
주검 문용동
(고은 詩 《만인보》 ‘문용동’ 中)
故 문용동 전도사(당시 호남신학교 재학 중)는 전남도청 지하 무기고에서 폭발물을 지키다가 5월 27일 아침에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한 분입니다. 평소 민주화 운동 시위에 참여한 적도 별로 없는 청년 전도사가 5월 18일 당일 계엄군의 폭력 진압을 직접 목격하고 시위에 참여한 과정, 화순 탄광 등에서 가져온 TNT를 지키고 희생을 막기 위해 해체했던 과정은 먹먹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시민군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TNT를 해체한 장본인 격이기에 진압 직후부터 한참 동안 ‘프락치’ 논란이 있었다는 사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문 전도사가 지난 2016년 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으로부터 ‘순직자’로 정식 인정된 과정까지 소개됩니다.
“다른 집 자녀는 다 희생당하고 있는데, 왜 저만 보호하려고 하십니까?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故 류동운 열사(당시 한신대 2학년)가 아버지인 류연창 목사(5.18 당시 광주신광성결교회 담임, 이후 대구 지역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활동)에게 남긴 마지막 말로 전해집니다. 사실 5.18 초반에 이미 류동운 열사는 상무대로 연행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광주 지역 교계 지도자였던 아버지 류 목사가 교인이었던 광주 지역 향토사단장에게 부탁해 겨우 풀려나게 했으나, 저 말을 남기고 다시 전남 도청으로 들어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류동운 열사의 이야기는 동생 류동인 씨의 회고로 서술됐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유신을 반대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함께 연행되기도 했던 형의 이야기, 합계 10단이 넘는 무술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 차마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야기 등을 통해 역사에 대한 책임을 고민하다가 젊은 나이에 소천한 한 청년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의 뒤를 이어 학생 운동, 노동 운동에 투신했던 동생이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는 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된 이야기, 지금은 경북 성주 사드 반대 투쟁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야기까지,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가 짧은 인터뷰 안에서 펼쳐졌습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 5월 30일, 당시 서강대 무역학과 4학년이자 감리교 청년회 활동을 하던 故 김의기 열사는 이 유서를 남기고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습니다. 5.18의 진상 규명을 외치며 본인의 생명을 바친 최초의 인물입니다. 누나 김주숙 사모(부산 샘터감리교회 박철 목사 아내)는 “동생이 교회에 다니며 사회의식에 눈을 떴고, 전담 형사가 매일 찾아올 정도로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교회의 도움으로 어렵게 장례를 치렀던 과정, 누나가 동생 덕분에 교회에 다니게 되고 신학교에 진학한 후, 지금까지 동생만을 생각하며 사역했던 이야기들은 진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5.18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은 마중물
총 7부작으로 방송되고 있는 릴레이 인터뷰 <그 해 봄>은 <토크멘터리 그 해 봄>으로 재구성되어 5월 16일(토) 오후 2시 30분과 5월 18일(월) 정오 등에 CBS TV를 통해 방송됩니다. <그 해 봄> 등 CBS가 기획한 5.18 40주년 특집 프로젝트는 CBS Joy 유튜브 계정(www.youtube.com/CBSjoy)을 통해서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간단하게나마 다룬 이 프로젝트가 안타까운 역사/현대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개신교계에 작은 공명(共鳴)을 주길 기도할 뿐입니다.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故 문용동 전도사의 5월 21일 자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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