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전두환 일당이 뿌려놓은 가짜뉴스가 깊이 뿌리박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대중의 음모설, 북한군 개입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왜곡 등이 있다. (중략) 진상 규명이 모든 해결 과정에서 최우선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학살 책임자 처벌이라든가 피해자의 명예 회복 혹은 피해 배상, 그리고 기념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의 공정한 처리는 신빙성 있는 진실의 확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진상 규명은 비민주적 권력 쟁취를 꿈꾸는 모든 자들에게 살아 있는 경고가 된다.(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금호동 로터리의 블루스

 

1980년 8월의 어느 날 나는 금호동 시장통의 이모님 순댓국집에 앉아 양은 냄비 뚜껑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로터리로 굴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 비단 집 아줌마와 말다툼하고 있던 전라도 출신 양은 집 아저씨가 홧김에 집어 던진 것이었다. 피차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경상도 아줌마가 전라도 아저씨에게 무심코 “전라도 놈들은 다 빨갱이다”라고 말한 게 싸움의 발단이었다. 전라도 아저씨가 강력히 사과를 요구했지만 경상도 아줌마는 더욱 기세 높게 악다구니를 질러댔다. “텔레비에서 그라드라. 텔레비에서 그라드라.”

 

그 시기는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생명과 안전이 위협당하던 때였다.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일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슬이 시퍼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설치하였다. 국보위는 국가안보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 다수를 체포하였으며, 쿠데타에 반대하는 교수, 목사, 언론인, 학생 등을 체포·구금·고문·살해하였다. 고급 공무원에서부터 금융기관 임직원, 교육계 인사 다수가 해직되거나 체포되고 그들 세력에 호응하는 자들로 교체되었다. 특히 5월 광주의 유혈 진압이라는 업보 때문에 전두환 세력은 전 언론 기관을 동원하여 악의적인 호남 비방 선전을 자행하고 있었다. 비단 집 아줌마가 무심코 한 말에 양은 집 아저씨가 그토록 극력 저항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16년 후 전두환과 그의 일당은 대한민국의 법원에서 내란수괴, 반란죄, 상관살해, 내란목적살인 등 13가지 혐의로 극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 정호용·황영시·허화평·이학봉 등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6년 전 그들은 광주시민들을 폭도와 반란군과 좌익으로 몰아댔었지만, 16년 후 대한민국의 법원은 그들이야말로 “내란 목적으로 살인을 범한 폭도이며 반란군”이라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24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5월의 광주 민주 항쟁은 국민들이 합의하는 내포와 외연을 확보하게 되었다. 2019년 12월 대한민국 국회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의결하였다. 이 법안에서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정의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공식적으로 얻은 최초의 정의였다.

 

1996년 8월 26일 12.12 및 5.18사건 선고 공판에서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이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아쉽게도 한국 사회 안에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법원과 국회가 정리한 바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두환 일당의 가짜뉴스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러나 적어도 정직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땅하다. 단지 벗어날 뿐만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거짓과 폭압의 상처를 바로잡고 치유하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5·18민주화운동’은 왜 발생했나?

 

대한민국의 법원이 판단한 바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은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저지른 반란 행위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일환이다.

 

전두환과 그의 일당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두 번의 쿠데타를 감행한 바 있다. 첫 번째는 1979년에 발생한 12·12 쿠데타이다. 부마 항쟁이 정권의 위기를 초래하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추종자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신의 하나회 인맥을 총동원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다수의 군인을 살상한 후 군부를 장악하였다.

 

두 번째는 1980년에 발생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이다. 당시에 소위 “신군부”로 지칭되던 전두환과 그의 일당들은 군부 장악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신군부는 5월 17일에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선포하고 대통령 연금, 국회 해산, 정치인 체포, 재야인사 연행 등의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후 국보위를 설치하여 민정당 창당과 체육관 대통령 선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의 집권 계획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전국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신군부 집권 계획의 일부는 이미 누설되었고 한국의 지도층들은 새로운 쿠데타를 우려하고 있었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절대다수의 국민 여론과 학생들의 강력한 계엄 해제 요구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5월 15일 서울 시내 30개의 대학생 7만여 명의 시위가 서울역 회군으로 끝나자 신군부는 이를 도리어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

 

전국에 산발적인 대학생 데모가 있었던 5월 18일, 유독 전남대의 학생 시위를 시초부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각종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전두환과 그의 일당은 광주에서의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그들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협박하는 본보기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 정보기관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갖가지 가짜뉴스에 의해 심리적으로 격동된 공수여단이 “시위와 전혀 상관없이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 심지어 물놀이 하던 어린아이까지 무차별로 두들겨 패거나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총 쏜 것은 물론, 부상 입은 시민에 대한 불법 처형, 공격 헬기를 동원한 무차별 사격, 부녀자 강간 및 엽기 살해 행위”를 자행하였다.

 

광주 시민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저항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상황의 긴급성과 보충성으로 볼 때 광주 시민들의 무장 투쟁은 인류 역사와 헌법이 보장하는 저항권적 행위였다. 국민개병제로 말미암아 병역을 마친 한국의 젊은이들이 각종 무기를 다룰 줄 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만일 진실로 광주 시민들이 조직적 무장 투쟁을 결의했다면 전남 일원의 군수 물자 배치 상황을 보아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질서가 확보되자 광주 시민들은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추구하였다. 무기를 회수하고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진압군의 신속한 승리와 전두환 정권의 승승장구가 야기되었다. 광주 시민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대한민국 체제의 존속을 선택했고 이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던 것이다.

 

12.12 군사 반란 다음 날인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중인 반란군.

 

‘5·18민주화운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나?

 

‘5·18민주화운동’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방대하고 광범위하다. 학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의 민주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둘째로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체제의 정당성을 재고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셋째로 ‘5·18민주화운동’은 국제적으로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을 격려하는 한류의 한 축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의 민주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일당의 유혈적 무력 진압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5월의 광주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를 관철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커다란 경고로 나타났다. 지배층의 바람은 모든 피지배층이 그들의 설득과 강제에 오로지 평화적으로 순응하는 것이다. 군사 쿠데타는 이러한 평화적 순응을 전제로 발생하는, 지배층 내의 폭력적 권력 쟁탈 수단이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로 한국에서 이러한 수단의 효용은 종결되었다. 무장한 민중의 저항으로 인해, 어떤 비민주적 권력 쟁탈의 결과를 피지배층이 순응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후에 전개된 1986년의 6월 항쟁과 1996년의 전두환·노태우 심판, 2016년의 촛불혁명 등 여러 고비에서 수구 세력의 거부 쿠데타 없는 평화적 결말이 이루어지게 한 핵심 요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체제의 정당성을 재고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가 대한민국 체제의 이념적 기반으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 반공을 명분으로 시민들을 학살하던 그 순간 반공주의의 정치적 정당성도 함께 사라졌다. 한국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이 광주 시민 학살의 군대 이동을 승인하는 순간, 미국은 대한민국의 우방이 아니라 한 줌 집권층의 동맹자로 전락하고 있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한국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1980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점차 반미주의가 일반화되고 대학생 중 일부가 북한의 주체사상조차 전향적으로 수용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5·18민주화 운동’은 국제적으로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을 격려하는 한류의 하나가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전까지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군사 독재 체제이나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모순적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진행된 성공적 민주화는 똑같이 민주 체제를 꿈꾸는 수많은 제3세계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 대만 중화항공 승무원 파업, 중국 농민공 시위, 미얀마 민주화 운동, 캄보디아 농민 투쟁, 재한 캄보디아인 광주 촛불집회, 태국 노동 운동, 일본 대학가 투쟁, 인도네시아 디알리타 합창단과 호주 시드니 촛불집회에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러한 표징 중의 하나이다. 이제 한국은 전후 세계에서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유일의 제3세계 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5·18민주화 운동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도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좌)과 개정판(우). 이 책은 5.18민주화운동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2011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뽑혔다.

 

‘5·18민주화운동’과 가짜뉴스

 

아직도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전두환 일당이 뿌려놓은 가짜뉴스가 깊이 뿌리박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대중의 음모설, 북한군 개입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왜곡 등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김대중의 내란 음모로 발생한 폭동이며, 전두환의 쿠데타는 이를 막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전두환 일당의 김대중 음모설이 오랜 군사 독재 기간 동안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이들은 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대중 주변의 인물들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여기에서 얻은 거짓 자백들을 엮어 김대중에게 사형을 언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한민국 법원이 판결한 대로 어불성설의 논리이다. 상식적으로 18일의 광주민주화운동이 17일 쿠데타의 이유가 될 수 없다. 17일 사건이 18일 사건의 원인 중 일부가 될 수는 있다. 예컨대, 박정희가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감행하자 김영삼의 지역적 지지 기반인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전두환이 김대중을 체포하자 김대중의 지역적 지지 기반인 광주에서 더욱 거센 항쟁이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북한군 개입설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의 특수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일으킨 반정부 폭동이라는 주장이다. 전두환이 최초로 주장한 후에 지만원, 전사모, 일베저장소, 자유한국당, 태극기 부대 등에서 수시로 제기하고 있는 설이다. 이들은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 분석, 탈북자의 증언 등 갖가지 방법을 엮어가며 북한군 개입을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의 오류에 대하여 대한민국 법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2013년 1월 한국 법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과 모의해서 5·18 광주시민학살을 저지른 사실이 없는데도 믿을 만한 객관적 근거 없이 추측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해 그의 명예를 크게 손상”했다는 이유로 지만원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한 이후에 그의 반성 없는 5·18 관련 명예 훼손에 대해서 2020년 2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바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왜곡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이 노래가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주제곡으로서 김일성을 사모하는 뜻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화운동 중에 사망한 윤상원 씨와 ‘들불야학’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1982년에 만들어졌다. 노래 가사는 백기완의 <묏비나리>의 일부를 황석영이 개사한 것이고 김종률이 작곡을 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보다 9년 후인 1991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이 노래의 기원이 될 수 없다. 작사자인 황석영이 1989년 방북 후 수감된 경력이 있다고 해서 이 노래가 종북적이라는 주장은 민중당 노동위원장 경력이 있는 김문수가 국회의원으로서 만든 법이 좌파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5·18민주화운동’의 미래를 위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의 미래는 이 운동이 원래 추구하려던 바의 성실한 구현에 달려 있다. 이 운동이 추구하는 바는 한국의 민주화와 정의 실현이었다. 그해 5월 도청 앞에서 낭송되었던 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민주화여!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 피와 땀이 아니곤 거둘 수 없는 젊음이었기에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 왔노라.”

 

이러한 미래를 달성하기 위해 먼저 참조할 사항은 피해 당사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1994년에 설립한 ‘5·18 기념재단’은 피해 당사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다섯 가지 사항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5·18 진상규명이다. 둘째는 학살 책임자 처벌이다. 셋째는 5·18 피해자 명예 회복이다. 넷째는 5·18 피해자 배상이다. 다섯째는 5·18 기념사업 추진이다.

 

진상 규명이 모든 해결 과정에서 최우선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학살 책임자 처벌이라든가 피해자의 명예 회복 혹은 피해 배상, 그리고 기념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의 공정한 처리는 신빙성 있는 진실의 확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진상 규명은 비민주적 권력 쟁취를 꿈꾸는 모든 자들에게 살아 있는 경고가 된다.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는 공정하고 투명한 진상 규명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간혹 진상 규명의 피로감 누적을 고려한 정치적 타협으로서 피해자 보상을 앞세우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1995년의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나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서둘러 만든 이 법들로도 어느 정도의 진상 규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은 2019년의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제도적 기초가 무려 40년 후에야 마련된 셈이다. 그러는 동안 가해자는 더욱 잔혹한 가해를 퍼부을 수 있었고, 피해자는 더 잔혹한 피해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진상을 판단해 줄 객관적 자료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서양의 유명한 속담을 기억하자.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엉뚱하게도, 한국 개신교는 지체된 정의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80년 당시만 해도 소수의 정치 목사들을 제외한 한국 개신교인 다수는 당연히 정의의 편에 서서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들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진상 규명이 지체되고 대신에 이데올로기적 태도가 진실을 뒤덮게 되자, 분별력이 약한 다수의 개신교 단체나 목사들이 공공연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모욕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행위이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진실과 공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의미한다면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진실의 왜곡을 일삼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속히 올바른 길로 돌아서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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