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해외 학자가 국내에 소개될 때, 그 학자의 대중적인 책들과 최근 저서들이 먼저 소개된다. (중략) 하우어워스 역시 마찬가지다. (중략) 이번에 나온 『교회의 정치학』은 비교적 그의 초기 저서 중 하나로 하우어워스의 신학과 학문적 이력을 파악하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서구 문명사의 맥락에서 미국의 문화가 어떻게 근대의 학문적 전제에 포섭되었는지를 밝히면서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본문 중)

스탠리 하우어워스 | 『교회의 정치학』(After Christendom?: How the Church is to Behave if Freedom, Justice, and a Christian Nation are Bad Ideas)

IVP | 2019. 12. 26 (원서 출간 1991) | 262면 | 13,000원

최경환(과학과신학의대화 사무국장)

 

보통 해외 학자가 국내에 소개될 때, 그 학자의 대중적인 책들과 최근 저서들이 먼저 소개된다. 그리고 그 학자가 저자로서 국내에 어느 정도 안착했다고 판단되면,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주요 이론을 담은 초기 저작들이 소개된다. 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학술서를 초기에 집필하기 때문이다. 하우어워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그의 대중적인 저서들이 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교회의 정치학』(After Christendom?, 원서 1991)은 비교적 그의 초기 저서 중 하나로 하우어워스의 신학과 학문적 이력을 파악하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서구 문명사의 맥락에서 미국의 문화가 어떻게 근대의 학문적 전제에 포섭되었는지를 밝히면서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교회의 정치학』 표지.

 

자유주의 이후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인용되지만 하우어워스는 공동체주의자로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매킨타이어의 가장 유명한 책은 『덕의 상실』(After Virtue)인데, 아마도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떠올리도록 책 제목을 ‘After Christendom?’이라고 정한 것 같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근대 윤리학의 문제점을 장황하게 지적하고 가능한 대안으로 니체의 계보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하우어워스는 매킨타이어의 기포드 강연 “도덕적 탐구의 세 가지 경쟁 이론: 백과사전, 계보, 전통”을 인용해 그동안 서양 윤리학의 주요 방법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마지막 세 번째 입장을 옹호한다.

하우어워스는 이 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은 기독교 신념의 힘과 진리성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지적, 정치적 전제에 도전한다. 간단히 말해, 나는 기독교가 토대주의 인식론(foundational epistemology)을 고수한 것이 기독교 세계(크리스텐덤)의 사회적 전략에 상응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26쪽)

하우어워스가 보기에 기독교는 근대 자유주의 기획에 맞춰서 자신의 정체성을 교정했고, 그 과정은 보편성에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하고, 이해할 만한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자유주의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가 토대주의 인식론에 근거해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그런데 하우어워스는 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난 후, ‘그렇다면 당신의 대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독자들에게 자신도 그 답을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그에게는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없는데, 그는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약자들에게는 전략이 없다. 교회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이 희생자들을 품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우어워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이런 교회론을 정립한다. 자유주의와 어떻게 싸울지에 대한 전략은 없으며, 매 순간 순례자로 이 땅을 거닐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전술만 있을 뿐이다.

 

구원의 정치학

예일 학파를 이끈 린드벡(George Arthur Lindbeck, 1923-2018)은 현재 미국의 상황을 “기독교가 ‘한때 문화적으로 국교의 지위를 가졌으나 아직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어색한 중간 단계’에 있다”(37쪽)라고 진단한다.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으나 그러기에는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권력욕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는 어정쩡한 상태임을 꼬집어 말했다. 기독교는 이제 자유주의, 공공성,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잘 마련할지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이런 상황을 매킨타이어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문제는 세속 지식이 발전하는 방향이 아니라, 유신론이 후퇴하는 방향이다.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에게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을 점점 덜 제공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유신론은 적극적 무신론에게서 중요성과 힘을 빼앗고,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보다 수동적인 유신론을 부추긴다. (38쪽)

크리스텐덤을 경험하지 않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진리냐 반진리냐의 대결 구도로 경험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유신론과 무신론의 치열한 공방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실존은 자신이 믿는 진리에 의탁, 헌신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서구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진리냐 반진리냐를 두고 싸우지 않는다. 매킨타이어가 지적하듯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적극적 무신론자들의 전투 의지를 누그러뜨리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기독교를 제시하는 것을 전도의 전략으로 삼는다. 기독교를 실천과 삶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신념의 문제로 제시한다. 그러는 가운데 실천과 삶의 문제는 근대 자유주의가 요구하는 틀에 맞도록 적응시켰다. “신념과 실천의 분리”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자유주의는 신념의 자유는 보장하되 공적 영역에서의 실천에서는 그 신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했다”(39쪽).

하지만 하우어워스에게 기독교는 진리 싸움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이것은 타협이나 조정의 대상이 아니다. 진리와 반진리의 양자택일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전적으로 진리에 헌신해야 한다. 이런 진리 문제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필요하고, 이 교회를 통해서만 “우주에 대해, 인간 실존의 본질에 대해, 혹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믿는 바”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교회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의 의미다.

 

교회와 제국주의 사이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하우어워스는 “홀로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어떤 정치학이 참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41쪽).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활동과 정치는 반진리이기 때문에 교회의 정치학만이 진정한 정치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는 또 다른 의미의 제국주의자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왕국을 목적으로 삼는 기독교 정치만이 진정한 정치라고 한다면, 이는 신정정치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하우어워스는 이런 비판은 잘 알고 있고, 이를 심지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의 과제는 분명하다.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크리스텐덤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의 정치학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하우어워스가 현대 윤리학을 비판하는 부분은 마이클 샌델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부분과 닮았다. 오늘날 윤리학의 중요한 주제는 정의다. 공정, 공평, 정의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그런데 샌델은 이렇게 정의 담론이 현대 자유주의 윤리학의 지배적인 담론이 된 것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정의 담론은 공공의 선이라든가 공동의 선을 향한 의지와 열망을 모두 제거하고, 애초에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44쪽). 그리고 개인의 생존 욕망에 근거해 협력과 조정 그리고 분배에만 집중한다. 효과는 분명하다.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종교가 사라졌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단 신사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질서를 잘 지킨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더 나아가, 기독교가 이 세상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집단임을 보여 주고, 사랑과 정의의 수호자가 되어야 했다. 하우어워스는 이런 모습이 싫은 것이다. 왜 기독교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따라가야 하는가?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자유주의의 기획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보편성’에 맞서는 방법으로서 교회가 지닌 ‘지역성’과 ‘특수성’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순교의 정치학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구원이라고 믿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세력과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력으로부터 구출되는 것뿐 아니라 이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들의 비전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로마 제국에 저항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세력 밖에 있는 것과 싸우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초기 기독교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 방식은 바로 순교였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억함으로써 사실상 ‘당신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55쪽). 교회가 폭력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기는 방식, 그것이 바로 순교의 정치학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그렇기 때문에 다시 신정정치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교회의 비전은 그저 교회 자체로 구원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로 말미암는 구원은 세상을 위한 것이고 세상을 이기는 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우어워스는 개인 구원을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하우어워스가 대안으로 찾은 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학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교회만이 진정한 정치적 사회”라고 보았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바른 질서를 부여하고 올바른 덕을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천을 갖게 된다”(57쪽). 교회의 임무는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규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것들이 없다. 하우어워스는 이것이 우리의 비애라고 말한다. 덕분에 전쟁은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명예와 가치도 사라졌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자기 고유의 가치와 덕에 올인할 때, 세상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다.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교회

교회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자신의 온 마음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 하우어워스는 그런 용기와 헌신을 잃어버린 교회를 향해 일침을 가한다. 교회가 진정 평화의 사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위해 투신한다면, 기독교는 이 세상 정치의 한계선을 무너뜨리고 확장하고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인 모습으로 자신을 세상에 과시하는 것과, 자신의 고귀한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이 실현하지 못했던 놀라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겉으로는 진리를 수호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들의 세 불리기와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정치는 타협과 협상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려고 한다. 선택의 순간에 진리를 택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안정적인 대안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애매모호한 선택의 순간에 교회는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뛰어넘는 결단을 보여 주어야 한다. 비록 그 결단이 나중에 섣부른 결정이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그렇게 주어진 현실을 맞닥뜨리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진리가 드러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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