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율법(토라, 모세오경)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시한이 지난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델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나타낸 명령들이었고,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영원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해석될 때라야 본래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습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이번 글에서는 산상수훈 말씀 중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명령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주제는 칭의와 성화라는 신학적 프레임 안에서 설명되었지만, 이런 신학적인 접근은 몇 가지 약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 성령님의 역동적인 개입, 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이야기(하나님의 새 백성 창조)와는 분리된 추상적인 ‘개인 구원의 조건’에 관한 토론으로 흘러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보다는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관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혹시 십자가 위의 강도와 같은 예외적인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할지라도(눅 24:42-43), 예수님은 그에 대해 강조해 말씀하지 않으셨으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여러 번 강조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17너희는 내가 율법1)이나 예언자2)들을 허물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온 것은 허물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취하려는3) 것이다. 18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때까지. 토라로부터 이오타(ι)4)한 자, 삐침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누구든지 이들 가장 작은 명령들 중 하나를 허물거나 또 이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그는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다. 누구든지 (이 명령들을) 행하고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이 사람은 큰 자라 불릴 것이다. 20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것보다) 훨씬 더 많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17-20)

 

예수님은 율법의 성취자로 오셔서 모세의 율법의 본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율법을 성취하신다는 것은, 첫째로, 모세의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 가르쳐주신 것과(마 5:21-22, 33-34), 둘째로,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본래의 목적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출 19:5-6)을 이루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율법 폐기론’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토라, 모세오경)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시한이 지난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델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나타낸 명령들이었고,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영원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해석될 때라야 본래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유효한 것이고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일부 반영된 생각이긴 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실행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입니다(행 15:28-29). 그러나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성취하신다는 예수님의 위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 대해 좀 더 신중히 생각하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업그레이드하러 오셨지, 결코 다운그레이드하거나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7; 참고, 5:21-48). 또,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의로운 행위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이라고 하십니다(마 5:20; 참고, 7:18-20).5)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요구는 사람이 고안한 길이 아닌 하나님이 마련한 길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성취되는 것은 세례를 통한 예수님과의 연합,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고, 율법의 주인이 됩니다. 잠시 교사 역할을 맡았던 율법은 지혜롭고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 주인의 친구 조언자로 남습니다(갈 4:23-27). 또,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을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빚어가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을 성취하게 됩니다(롬 8:4).6)

율법 폐기론의 오류를 오늘날에도 주의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명령들조차 율법 폐기론적인 태도로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특별한 신자들만을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7)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예수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산상수훈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명령들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21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내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예언을 했고, 또,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귀신들을 내쫓았으며, 또,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많은 능력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23그때 내가 그들에게 선언할 것이다. “아무 때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했다. 나에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집을 바위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처럼 될 것이다. 25비가 내렸고 강들이 범람해 왔고 많은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 왔지만,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위 위에 단단히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26그리고 누구든지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바보 같은 사람처럼 될 것이다. 27비가 내렸고 강들이 범람해 왔고 많은 바람이 불어 그 집을 강타했고, 그 집은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그것의 무너짐이 대단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서 생각해 보면, 이상적인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8)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까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날마다 읽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9) 또, 각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성령님의 지혜와 도우시는 능력을 간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들을 실천하는 순종의 삶은 율법주의와 완전히 다릅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고집하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예수님이 무엇을 옳다고 하시는지 늘 귀를 기울입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하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만 의식합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자원만 사용하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기도와 간구로 하늘의 자원을 사용합니다(마 7:7-8). 율법주의는 자기가 세운 기준을 성취한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모든 것이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율법주의는 죄의 속박과 지배력을 벗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성령님이 내면의 자유를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율법주의는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아도 무덤의 외부를 장식하는 것에 불과하지만(마 23:27),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은 이룬 것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하늘나라 삶을 위해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이런 삶은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먼저 아침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귀를 기울입니다. 성령님이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마음으로 받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방법을 성령님께 묻고 귀를 기울입니다. 성령님의 지시하심이 있거나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것을 마음에 품고 하루를 지내며 실천할 기회가 생기는 대로 실천합니다. 실천하면서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찾아보고 주목해봅니다. 일어난 일을 성찰해보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성령님의 일하심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록해 둡니다. 이런 실천의 경험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공유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서로를 격려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실천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들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교회 등 모든 일상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모두를 포함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전 인격 안에서, 그리고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할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랍니다. 교회란 이렇게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 주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앙 경력이 오래된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거나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물놀이는 열심히 다니지만, 수영은 배우지 못해 깊은 물을 즐기지는 못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은 해 왔지만, 초점이 잘못 맞추어지고 우선순위가 다른 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명령을 실천하는 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삶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 삶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계속 주목하고 분별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돕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속한 교회가 산상수훈을 읽고 실천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며 함께 성숙으로 나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며 간구합니다.


1) 토라, 곧 모세오경.

2) 즉, 예언서들.

3) 헬, 가득 채우려는.

4) 헬라어의 가장 작은 문자(ι).

5) 5:20의 “너희의 의”를 양적인 것(행위의 열매들)이냐 질적인 것(관계의 문제)이냐를 두고 토론이 있었지만, 둘 다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의(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주어진 의)가 양적으로도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양용의, 『마태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2005), 105. 스캇 맥나이트, 『산상수훈』(에클레시아북스, 2016), 90-91 참고.

6)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윤리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삶입니다(미 6:7-8).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이 그를 완전하게 변화시켜 나가십니다[창 17:1: 이 구절은 히브리어 이중명령구문으로 첫 번째 명령(행하라)은 순종해야 할 항목이고 두 번째 명령(완전하라)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약속에 해당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에 맞추어 우리의 사고의 틀을 바꾸어야 할 부분입니다.

7) 또, 마태복음 자체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므로 산상수훈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주장도 들은 적이 있는데, 복음서의 일반적인 특성 분류와 독자 문제를 혼동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 독자들만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산상수훈 대부분의 내용은 이방인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8) “나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9) 물론 산상수훈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예수님의 다른 모든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배우고 순종하고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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