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폭우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은 아무래도 행정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을 터이고, 비닐하우스 등에서 지내던 외국인노동자와 같이 안전하지 못한 집에 머물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무너진 집을 피해 지자체에서 마련해준 대피소로 피신할 수 있지만, 향후 2-30년만 지나도 기후난민의 수가 1억만명을 상회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당신과 내가 모두 안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마도 이런 시기에 ‘자발적 불편’을 과제로 떠안는 사람들이 아닐까.(본문중)

‘기후장마’에 직면하여 다시금 던지는 질문, 우리는 ‘자발적 불편’ 해야 하는가?

 

김희경[기윤실 자발적불편운동 기획위원]

 

#장면1. 토사와 뒤섞인 누런 빗물이 도심 일대를 강처럼 뒤덮고, 군데군데 물에 잠긴 집, 자동차, 나무 등이 머리 부분만 빼꼼 모습을 드러냄.

#장면2. 검은 아스팔트 위로 우산을 쓰고 힘겹게 걷는 사람들, 강한 빗줄기에 가려져 온통 회색빛에 흡수된 모습.

#장면3. 물에 잠긴 논밭 사이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비닐하우스, 누군가의 집, 기숙사였다고.

 

온통 토사에 끝없이 펼쳐진 누런 홍수가 몇 주째 화면을 채웠다. 현장에서 몸으로 접한 사람들이 가졌을 두려움에는 비할 수 없지만, 위기감을 떨칠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지난 50일, 1년간 내릴 비의 60~80%가 한반도를 강타했다고 한다. 최장, 최고, 최초의 수식어구가 모두 동원된 폭우였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역대 상상할 수 없는 비가 내려, 중국에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에 육박하는 수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번 장마를 ‘기후장마’로 부르는 이유이다. 지구촌 곳곳이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 반대편 유럽 지역에는 이례적인 폭염으로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이상 기온이 지속되기도 했다 한다. 기후위기의 징후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이렇게 위험 신호를 한꺼번에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피조계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던 사도바울(롬8: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가. 물론 이 구절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과 책임을 우리가 속한 세계와 삶에서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의 신앙고백이 드러내는 삶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인지, 신음하는 지구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피조계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던 사도바울(롬8: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얼중얼, ‘주님, 이 비를 그쳐주세요’. 마치 주님이 하시는 일 마냥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원망하며, 크고 작은 불편과 피해 앞에 날씨탓, 하늘탓, 원인을 밖에서 찾기 일쑤였다. 여기에서 ‘나의 책임’은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의 위기는 지난 100여년 간의 산물. 소위 ‘발전’의 이름으로 달려온 과학과 산업, 그 위에 얹힌 보편적 사람들의 욕망과 맹신이 만들어낸 오염과 위기이다. 즉 하늘 탓이 아니라 우리 탓, 내 탓인 셈이다.

‘나’의 이익과 ‘나’의 안전만을 기도하며, 그 안전과 이익을 중심으로 ‘축복’을 가늠하는 세대가 빚어낸 비극. 이 모습 속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없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에 이웃과 공동체, 자연과 피조계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을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번 폭우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은 아무래도 행정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을 터이고, 비닐하우스 등에서 지내던 외국인노동자와 같이 안전하지 못한 집에 머물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무너진 집을 피해 지자체에서 마련해준 대피소로 피신할 수 있지만, 향후 2-30년만 지나도 기후난민의 수가 1억만명을 상회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당신과 내가 모두 안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마도 이런 시기에 ‘자발적 불편’을 과제로 떠안는 사람들이 아닐까. 보다 적극적으로 편리함과 이익과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고, 이웃과 자연에 대한 책임을 주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서 조금 손해 보고,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고, 타자의 필요에 반응하고, 인류애를 획득하는. 아니 인간을 넘어 피조계에 대한 책임을 감지하고 응답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구체적 행동과 실천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스스로 고민할 일이지만, 기후위기를 저지하기 위한 가장 우선 과제인 에너지 전환을 위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드는 석탄 화력 에너지를 친환경 자연 에너지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물론 정부의 몫이 크지만, 우리도 나름대로 각오가 필요하다. 에너지를 최대한 덜 쓰기 위한 노력, 그리고 에너지 전환에 따르는 전기료 인상을 감수해야 한다. 나아가 불편하지만 덜 타고 더 걷고, 함께 타고, 가능하다면 내연기관 차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에너지를 최대한 덜 쓰기 위한 노력, 그리고 에너지 전환에 따르는 전기료 인상을 감수해야 한다. 나아가 불편하지만 덜 타고 더 걷고, 함께 타고, 가능하다면 내연기관 차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이동거리를 줄이고, 가급적 걸어다닐 수 있는 동네에서 소비하는 것이다. 한동안 재난기본소득 덕에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이야기들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작은 단위의 지역 공동체의 회복이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다. 아마도 이동 거리가 짧아지면 탄소배출도 줄어들고, 에너지 절약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역 공동체 자체가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주기도 할 터이니 그 유익이 크다.

 

‘기후위기’에 직면하여 다시금 던지는 질문, 우리는 ‘자발적 불편’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이다. 더욱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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