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언급 전에도 이미 세계 각국(주로 북미와 유럽 국가)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가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서 동성애자들의 가족적, 사회적 및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동성 동반자에게 결혼 관계의 배우자(spouse)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권리 및 혜택을 주는 제도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교황이 언급한 ‘민사적 결합’법이나, 조금 상이한 제도인 ‘가정 동반자’(Domestic Partnership)법 등이 그것이다.(본문 중)

안재엽(미국 변호사, 심리학 석사)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및 동성 결혼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및 종교적 논쟁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 전 교황의 발언으로 인하여 국내외에서 찬반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이 발언의 진의와 영향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으므로, 이곳에 자그마한 분석의 자리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달 21일(현지 시각) ‘로마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민사적 결합’(Civil Union)1)법이며, 이 방법으로 그들(동성애자들)은 법적으로 보호되고, 나는 이를 지지한다”라는 주장과 함께, “동성애자들은 하나의 가족 안에 존재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하느님(개신교 용어로는 ‘하나님’, 이하 동일)의 자녀이고, 가족을 꾸릴 권리가 있다” 및 “(동성애자들이) 그것(동성애) 때문에 버려지거나 비참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발언들을 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먼저 총괄적으로 논평을 해 본다면, 교황은 2016년 4월 발표한 ‘교황 권고’에서 “동성 결합은 기독교의 결혼과 같은 차원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동성 결혼을 반대해 온 그간의 본인 입장 및 가톨릭의 공식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결혼이 아닌 다른 유사한 제도의 도입을 통해 동성 동반자(Partner)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의 가족적, 사회적 및 경제적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사적 결합’을 지지한다는 교황의 직접적인 언명은 동성의 (민사적) 결합까지 반대해 온 기존의 가톨릭 교리나 지도층의 입장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그와 더불어, 설교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부드러운 형식이긴 하지만, 동성애가 ‘죄가 되는 행동’이고, 동성 결혼(또는 결합) 관계는 교회에 의해 가족 관계로 인정될 수 없다는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도 완화를 촉구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성 간의 ‘민사적 결합’은 가족 관계로 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동성애가 죄가 되는 행동이 아니라거나, 동성 결혼을 인정한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워싱턴포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2018년 미국의 일반 사회 조사 결과 미국 거주 가톨릭 신자의 동성 결혼에 대한 찬성률이 72.6%로 최근 20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찬성도가 높아졌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톨릭 신자들이 근래에 동성애 및 동성 결혼에 대한 지지 비중이 높아짐을 반영하여, 교황이 교리의 완화와 동성애에 대한 포용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교황은 2018년 가톨릭 동성애자를 만난 한 자리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그렇게 창조했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교황이 이번 발언으로 동성 간 ‘민사적 결합’을 지지함으로써 동성애 자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태도 변화를 기대한 것으로 볼 여지도 생긴다. 또한 교황은 ‘하느님의 자녀’란 용어 사용을 통하여, 명시적이진 않지만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까지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같은 신자로서 포용해야 하며(동성애 자체를 교리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을지라도), 동성 커플의 결합이 종교적, 사회적 및 법적으로도 가족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제도와 태도 양 측면의 제안을 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교황이 이번에 ‘민사적 결합’ 등 결혼이 아닌 유사 제도에 대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다. 현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였던 시절 아르헨티나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논의할 때 대안으로서 동성의 ‘민사적 결합’을 옹호한 적이 있고, 교황이 된 이후에도 가톨릭교회의 결혼과 ‘민사적 결합’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동성 간의 결합을 ‘민사적 결합’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황의 언급 전에도 이미 세계 각국(주로 북미와 유럽 국가)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가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서 동성애자들의 가족적, 사회적 및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동성 동반자에게 결혼 관계의 배우자(spouse)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권리 및 혜택을 주는 제도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교황이 언급한 ‘민사적 결합’법이나, 조금 상이한 제도인 ‘가정 동반자’(Domestic Partnership)법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여러 제도의 구체적 차이를 언급하지는 않고, 주로 ‘민사적 결합’을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나라마다 제도가 다르므로 주로 미국의 예를 들 것이다). 미국에서 연방대법원 판결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기(2015년) 전에는, 원하는 주들이 주의회의 의결로 ‘민사적 결합법’(주로 동부나 중서부의 주들이 이를 선택하였고, 서부의 주들은 주로 ‘가정 동반자법’을 선택하였다)을 시행해 왔다. 미국에서는 1999년 버몬트주의 ‘민사적 결합법’이 최초의 입법 사례이다(세계 최초 입법은 1989년 덴마크의 ‘민사적 결합법’이다). ‘민사적 결합’의 효력은 연방법상의 권리나 혜택에는 미치지 못했고, 단지 그 주의 법에 따른 권리와 혜택만이 인정되었다. 2015년까지는 연방 차원에서는 동성 결혼이나 동성의 ‘민사적 결합’이 모두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주마다 동성 동반자의 권리나 혜택이 다르긴 하지만, 그 법들은 상속, 의료, 입양, 주택, 연금 등의 대부분의 주 법률의 영역에서 거의 결혼 배우자와 같은 수준으로 동성 동반자의 권리와 혜택을 인정하였다.

현재 교황청은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국내의 가톨릭계 언론에서는 ‘교황 발언의 의미와 맥락을 잘 살펴야 하며,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제시한 것도 아니고, 동성 결혼을 지지한 것도 아니다’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CNN 보도에 따르면, 이 문제에 대해 한 진보적인 가톨릭 주교는 ‘교황이 동성애자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으며, 동성 결혼이나 동성 결합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는 다른 주교들이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만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수적인 주교 한 명은 ‘교황이 동성 결합(결혼을 포함한)에 대한 교리를 위반하고 있다’고 논평했고, 다른 주교는 ‘교황이 단순히 실수한 것이고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자신의 발언을 통해 동성애나 동성 결합에 대한 교회의 교리를 변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기독교계 안팎의 동성애에 대해 진보적인 집단에서는 이번 교황의 발언을 기독교계 내 비중 있는 지도자의 입장 표명으로서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하겠지만, 여전히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견해라는 점을 들어 그 미진함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일부 한국의 진보적 인사나 단체들은 교황의 세계적 영향력을 감안하여 그 발언의 한계를 비판하기보다는 교황이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는 다소 무리한 결론을 내리면서 전략적으로 그 발언을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그렇게 교황이 동성 결혼까지 지지한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하고 아전인수식 해석이 될 수 있다. 세계적으로는 가톨릭 교계뿐 아니라 일부 개신교 교계에서도 ‘동성 결혼’이 아니라 ‘동성의 민사적 결합’을 지지한 것만으로도 교황의 언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움직임까지 있기 때문에, 편향적인 해석보다는 교황 발언의 문맥과 숨은 의도를 균형 있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언론에서는 ‘시민결합’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다소 부적절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국가에 대한 시민 계급의 권리 주장이라는 역사적 함축과는 관계가 없고, 민법(Civil Law)이란 단어처럼 국가 구성원 간의 민사적 차원의 권리 주장과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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