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는 1589년 튀빙겐 대학에 입학하는데, 그곳에서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 중 한 사람인 매스틀린 교수를 만난다. 매스틀린은 1570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읽고 난 뒤, 그의 관측값들이 정확하고 우주 체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정교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튀빙겐 대학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지동설을 금하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공개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 사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소개하는데, 그중 한 명이 케플러였다.(본문 중)

성영은(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넘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 엄청난 일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과학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분야였다. 필자는 여러 해 전, 종교개혁 시대에 살았던 한 과학자의 새로운 신앙이 자신의 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실을 기록한 자료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1) 독일 땅에 살았던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가 바로 그다. 그가 발견한 케플러 1, 2, 3 법칙(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토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종교개혁 하면 주로 루터나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의 삶을 떠올리지만 필자는 종교개혁의 신앙이 우리 같은 일반 신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인 케플러의 삶과 신앙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천동설(지구 중심설)과 지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을 중심으로 케플러의 종교개혁 신앙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흔히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로 지동설을 주장하여 수천 년 동안 명성을 누려온 천동설을 무너뜨렸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수천 년을 지속해 온 천동설이 그렇게 쉽사리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갖가지 반대에 부딪혀 맥없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지동설보다 천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세상의 구조를 훨씬 더 명쾌히 설명한다는 게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지동설에 대한 지지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걸 보고 있는 마당에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이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가톨릭 신학자뿐 아니라 종교개혁 진영의 개신교 신학자들조차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구가 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구중심설(또는 천동설)을 근거로 그린 태양계(출처: wikipedia)

 

케플러는 1589년 튀빙겐 대학에 입학하는데, 그곳에서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 중 한 사람인 매스틀린 교수를 만난다. 매스틀린은 1570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읽고 난 뒤, 그의 관측값들이 정확하고 우주 체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정교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튀빙겐 대학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지동설을 금하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공개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 사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소개하는데, 그중 한 명이 케플러였다. 그 후 케플러는 사라져 버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살려내는 데 일생을 바치는데, 실제 관측 결과로부터 이론을 세우는 방식을 고수했다. 이론이 관측 결과와 다르다면, 그 이론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이론을 찾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그는 하나님이 내신 세상을 잘 관측하고 그 관측 결과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이며, 신학의 길을 걷는 것만이 하나님을 가장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던 당대의 생각과는 달리 천문학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2)

화성은 780일(약 2년 2개월)을 주기로 지구에서 가장 가까워진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화성은 일반적으로 매일 서에서 동으로 조금씩 공전하지만, 지구에 가까워지는 기간 중에는 동에서 서로 조금씩 반대쪽으로 공전한다. 이를 역행 운동이라 부른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화성의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화성의 역행 운동과 불규칙한 공전 속도는, 우주가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권위를 굳게 믿었던 천동설 지지자들뿐 아니라 새로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까지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화성의 이런 운동에 대한 설명들은 하나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체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동설을 주장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은 그대로 지지한 사람이다. 그래서 천동설 지지자들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지지자들도 이 화성의 공전을 여러 개의 원운동으로 설명했다. 화성이 주전원(周轉圓, epicycle)이라는 작은 궤도를 돌면서 주원(主圓, deferent)을 따라 원운동을 하며 공전한다는 식이다. 코페르니쿠스에게도 원운동에 대한 확신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역시 원운동들의 조합으로 화성의 공전을 설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원 개수가 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도 여전히 10분(分)(0.17도, 1분은 1/60도)의 오차가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이 정도의 오차도 인정할 수 없었다. 정확한 관측값과 이론 사이에 오차가 난다면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확신한 그는, 화성 운동을 원으로 설명해 보려고 2년 정도 노력하였으나 어떻게 해도 최고 8분(分)의 오차가 생기는 것을 해결하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하나님이 이 불규칙하게 보이는 운동 속에 어떤 질서를 두지 않았을까? 1605년 부활절 기간, 드디어 케플러는 화성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로 돈다고 설명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완전한 도형인 원 대신 타원을 사용하였을까’하는 고민은 계속되었다. 즉 ‘타원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하실 만한 조화롭고 질서 있는 도형인가’라는 것이었다. 타원은 초점이라 불리는 가상의 두 점으로부터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들이 모여 만든 도형이다. 마침내 케플러는 태양이 타원 궤도의 가상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이 사용한 수학적 질서의 아름다움을 확신하게 된다(케플러 제1 법칙). 하나님이 우주에 타원을 그리고, 그 두 초점 중 하나에 태양을 두신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론과 타원 궤도를 결합함으로써 케플러는 우주의 운행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고 간단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1609년, 케플러는 이 발견을 『신(新)천문학』으로 출판한다. 그는 이 책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관측(실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8분(分)이라는 작은 각도가 천문학 전체를 바꾸는 길을 보여 주었다.…관측값과 (화성의 궤도) 계산 값이 실망스럽긴 하지만 8분이나 되는 오차를 나타낸다면,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인 관측값을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 관측값에서 출발하여) 천체 운동의 진짜 모습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케플러는 관측된 사실과 어긋나는 선험적인 이론을 거부했다. 관측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 값과 상반되는 결론을 내리기를 거부한 것이다.

케플러의 『신천문학』은 근대에 나온 첫 천문학 책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가 나온 지 6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책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가 타원을 선택하고 원을 포기한 대가는 컸다. 원과 결부되는 완전성과 불변성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17세기 초의 대학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과학을 반대하는 중심이었다. 그들은 케플러의 과학이 건전한 철학과 성경 둘 다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완전한 원 대신에 찌그러진 타원을 선택한 것은 수학적 형상들의 완전성과 필연성을 주장한 플라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케플러의 설명은 기하학적, 수학적 단순성 외에는 증거가 거의 없었다. 8분의 오차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수학적 단순성 외에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는 이론 때문에, 사람들이 수천 년간 가져왔던 물리학적, 철학적, 심리적, 신앙적 경험을 설명하는 전통적 우주관을 포기하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무엇보다도, 지동설 자체가 아침마다 해가 뜨는 일반적인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 여전히 문제였다. 지구가 돈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출처: wikipedia)

 

케플러는 1617년부터 30년 전쟁 중인 1621년까지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문답 형식으로 서술한 7권으로 된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1617-1621)를 쓴다. 케플러의 책이 출판되기 바로 전 해인 1616년, 로마 교황청은 지동설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코페르니쿠스 저서를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禁書)로 지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코페르니쿠스 이론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유럽에서 누구도 공개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금하는 주장을 할 경우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도 케플러는 당당히 코페르니쿠스 이름을 직접 붙인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를 출판하여 그의 이론을 과학적 진리로 천명한다. 아니나 다를까, 케플러의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 제1권이 1619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다. 케플러는 전혀 개의치 않고 1620년과 1621년 사이에 4-7권까지를 출판한다. 그는 자신의 이 과학 활동이 하나님 앞에 내놓아도 될 떳떳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받으실 찬송이라고 선언한다.3)

이런 케플러의 태도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견지하고 있던 갈릴레오와는 확연히 다르다. 갈릴레오도 “자연이라는 책을 연구하여 이른 확실함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라는 말을 했지만, 그 자신도 로마 교회도 이 주장의 무의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과학자인 평신도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없고, 더구나 교황의 해석에 반대되는 성경 해석은 용인되지 않음을 양측이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의 성경 해석이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즉, 천동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결국 갈릴레오는 성경에 관련된 이 과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교황의 해석을 받아들이겠다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나 케플러 둘 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했지만, 케플러와는 달리 갈릴레오는 이런 로마 가톨릭의 신앙 때문에 평생 그 이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못하고 살았다.

물론, 로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새로 시작된 개신교 대학에서도 새로운 과학, 특히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성경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 반대하고 금지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과학적 진리를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가 성경의 진리와 배치될 수 없다는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뚫고 새로운 과학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가르침대로 성경을 직접 읽고 성경의 해석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깊이 살폈다. 아울러 과학적 진리도 관측(실험)에 기초하여 참인가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진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종교개혁의 신앙을 따라서, 그 신앙으로 과학 활동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은 과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우리가 물려받은 이 신앙이 오늘날 신앙과 과학의 복잡한 이슈들을 풀어가는 데 빛이 되기를 바란다.


1) 졸저,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다』(성약출판사, 2011). 이 글의 많은 내용은 이 책에서 옮겼다.

2) “저는 이전에 목사나 신학자가 되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제겐 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저는 저의 이 노력에 의해, 천문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화로워지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신비』 출판을 희망하면서 매스틀린에게 쓴 편지, 1595년 10월 3일).

3) “저는 자연의 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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