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 역시 영적인 갈망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싶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교회 성장 프로그램, 출석 성도들의 숫자와 헌금 액수, 영향력 있는 장로·권사와의 식사, 기독교 방송 출연과 유튜브 조회 수, 노회·총회 임원과 해외 선교지 방문, 은퇴 후의 대책 등이다. 성도들은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교회에 무엇 때문에 계속 나오는가? 오래된 습관, 가족의 전통, 사회적 교류와 눈도장, 봉사 활동, 벌 받을까 무서워서, 직분에 대한 책임감 등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본문 중)

장동민(백석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전광훈에게는 확실히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다. 직설적 화법, 소탈한 성격, 강력한 카리스마, 돈과 성(性)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청교도적’ 도덕성,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나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시장경제와 반공주의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나라를 사회주의로 이끌려 하고 있으니, 이를 저지하는 것이 애국적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것이다.

전광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원래 사랑제일교회 교인이 아닌 많은 교인들이 사랑제일교회 집회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8.15 광복절 집회와 더불어 코로나 재확산의 주원인이 된 바로 그 집회 말이다. 그들로 하여금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석하던 교회를 박차고 멀리까지 가서 위험한 집회에 참석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전광훈의 끌어당기는 힘도 있지만, 동시에 그에게로 밀어내는 요인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단지 선동가에게 속아 휘둘린 어리석은 맹신자들인가? 그들의 열심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 열심의 중심에 영적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80줄 들어가는 한 권사님이 있다. 젊었을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뒤로 진실한 목사님을 만나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재물과 시간을 바쳐 교회를 섬기고 순탄하지 못했던 삶 속에서 기도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자녀들을 키워낸 분이다. 그 권사님은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과거 젊었을 적 신앙을 회고하며, 지금의 교회 생활은 미지근하고 지루하며 진짜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불평한다. 대신, 그는 자신의 영적 갈망을 전광훈의 유튜브 설교를 통하여 채운다면서, 청와대 앞 집회에도 몇 번 참석하였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하였다. 그는 거기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이게 그 권사님 한 분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영적 갈망! 성도들이 교회에서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대한민국의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공동체가 되었다. 주일 설교는 윤리적 교훈, 자기 계발의 방법, 적극적 사고방식, 복 받는 비결, 출처가 불분명한 예화, 자랑 섞인 간증, 양비론적 정치인 비판 등, 들어 두면 좋고 안 들어도 그만인 밋밋한 중립적 언어로 채워져 있다. 일 년에 두어 번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설교하고 성찬식을 하는데, 구원에 관한 설명일 뿐 구원 사건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설교 후 손을 반쯤 들고 거룩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반복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통하여 영적 갈증을 채울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목회자들 역시 영적인 갈망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싶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교회 성장 프로그램, 출석 성도들의 숫자와 헌금 액수, 영향력 있는 장로·권사와의 식사, 기독교 방송 출연과 유튜브 조회 수, 노회·총회 임원과 해외 선교지 방문, 은퇴 후의 대책 등이다. 성도들은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교회에 무엇 때문에 계속 나오는가? 오래된 습관, 가족의 전통, 사회적 교류와 눈도장, 봉사 활동, 벌 받을까 무서워서, 직분에 대한 책임감 등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예 영적 갈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성도들도 많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전광훈 집회에 참여한 성도들이 가장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전광훈 사태를 통하여 내가 새삼 알게 된 것은, 대한민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적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우선 영적 갈망을 느껴야 한다. 목마르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게 되면 물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일찍이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바른 신학(혹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도, 말씀 묵상, 시련. 이것들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너무나도 잘 해왔던 것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루터의 해설을 들으면 바로 이 부분이 한국교회 실패의 근본 원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마틴 루터에게 기도(oratio)는 자기 자신의 분별력과 이성에 대하여 완전히 절망하고 골방에 들어가 겸손히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성과 경험이 오류와 죄악으로 물들었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meditatio)은 성경을 읽고 또 연구하여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씀을 “쪼개어” 조각을 이리저리 붙여 설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방망이처럼 충격해 와서 나의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인 것이다.

시련(tentatio, 독일어 Anfechtung)은 ‘고난’, ‘시험’, ‘유혹’, ‘번민’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다. 바른 신학을 하기 위하여 시련을 당해야 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말씀과 같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체험한다는 뜻일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의 방향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당하는 시험이나 번민이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고 택배 기사가 죽어 나가고, 월세 낼 돈이 없어 가게를 접어야 하고,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상속세 10조를 내느냐 마느냐 논란하는 모습에, 정말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지 의심하게 된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사회적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 공동체라고 하는데, 우리의 교회들이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중산층 사교 클럽으로 전락한 것을 보면서 번민이 일어난다. 또한, 성경에 따르면 예수를 믿으면 이웃에게 선(善)을 행한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코로나와 가짜 뉴스 확산의 진원지가 된 것을 보면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안팎의 물음이 칼이 되어 뼈를 찌르는 듯하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시련은 삼각형의 세 꼭짓점이다. 각각이 모두 영적 갈망을 일으킨다. 나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면서, 절박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여서,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목마름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이 셋이 결합하면 그야말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1)이다. 나의 심령을 둘러싸고 있는 거짓의 영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이해하거나 해결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오히려 나는 이 세상에 고통을 더하는 원인 제공자가 될 뿐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전광훈을 향해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한다고 해서(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전광훈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는 없다.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갈망을 느끼게 하고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 바뀌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다. 소그룹 활동, 교양 강좌, 독서 토론, 경로 대학, 바자회, 비전 트립, 사회봉사, 교회 건축 등으로는 안 된다. 교회가 진리의 물 근원을 찾아 길을 헤매는 나그네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먼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시험을 당하자. 신학자들이 이미 정립된 교리를 전하는 영광에 안주하지 말고, 번민과 유혹으로 가득한 십자가 신학에 도전하자.

물을 찾지 못하여 헐떡거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작은 샘이 열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복음을 깨닫고, 성령의 빛을 받고,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그분을 믿는 것이다. “솔라 피데(sola fide)!2)


1) 각각은 작은 요인들이지만 서로 완벽한 조건으로 결합하여 큰 피해를 일으키는 것(편집자 주).

2) 오직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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