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숙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 특히 ‘명령들’을 잘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명령들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7:24). 이 글에서는 예수님의 명령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너희는 옛사람들에게 말해진 것을 들었다. “살인하지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모든 자는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는 공의회(재판정)에 넘겨져야만 한다. 누구든지 ‘이 바보야!’라고 말하는 자는 불 게헨나(지옥)에 들어가야만 한다. (마태복음 5:21-22)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숙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 특히 ‘명령들’을 잘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명령들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7:24). 이 글에서는 예수님의 명령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의 본론 부분(마태복음 5:17-7:12)에는 예수님의 명령(계명)들이 제시되고 그와 관련된 가르침이 많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예수님의 ‘명령’ 말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들과 명확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할 때라야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배울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 전반을 잘 이해할 때, 각 명령을 더 잘 순종할 수 있고, 흔히 빠지는 오류들, 즉, 단순한 문자적 적용이나 율법주의(공로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래에서 제시하는 세 가지 접근 방법은 각각 하나씩 따로 적용해도 유익한 방법입니다만, 예수님 명령의 구체적 내용이나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더 잘 적용되는 방법을 찾아 적절히 병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수용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말씀을 단순히 그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단단히 새기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1-22을 요약하면, 예수님은 ‘형제에게 욕을 하는 것은 살인죄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자명하게 이해되는 경우에는 이 말씀을 단순히 마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아, 내 주위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과 같은 중대한 죄가 되는구나. 앞으로 내 입에서 욕설이 절대 나오지 않게 하겠다’라고 단단히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록에서도 이러한 실천 방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전쟁들이, 어디에서 다툼들이 생깁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즉, 지체들과 싸우기를 즐기는 당신들의 습성입니다. 당신들은 욕심을 부리지만 가지지 못합니다. 살인하고 질투하지만 얻을 수 없습니다. 다투고 전쟁을 벌이지만 가지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이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간구해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즐거움에 소비하고자 악하게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
여기서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살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부분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처럼, 살인이라는 말을 문자적 의미를 넘어 지체들을 미워하거나 비방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즉, 야고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늘 살아왔고, 그 결과 “비방/미워함 =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공식처럼 마음에 단단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입니다. 당신들은 압니다. 모든 살인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일서 3:15)
사도 요한에게도 살인이란 ‘사람을 죽이는 행위’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의 태도’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마음에 적대감에까지 적용하셨고, 마음의 적대감에서 나온 행위는, 그것이 살인이든, 욕설이든, 비방이든, 미워서 외면하는 것이든 모두 살인과 같은 심각한 죄악이라고 가르치셨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향해 욕을 하지 말라, 그것은 살인과 같은 죄이다’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마음으로 단순히 수용하는 것, 즉,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 욕설, 비방, 미움이 살인과 같은 죄라고 정말 믿고, 그것을 절대 행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 말씀을 적용하는 첫 번째 방법, ‘단순한 수용’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즉각적 반응 살피기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살인과 욕설이 같은 죄란 말인가? 살인이 훨씬 심각한 죄인 것은 분명하고, 욕설은 상황에 따라서 좀 덮어줄 수도 있는 경미한 죄 아닌가? 왜 예수님은 그것을 같다고 하시는가?’ 적대적 반항심 때문이 아니라도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나의 감정, 생각, 신념, 세계관을 성찰해 보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감정, 생각, 신념, 세계관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양쪽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나의 즉각적 반응을 적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모든 자는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는 공의회(재판정)에 넘겨져야만 한다. 누구든지 ‘이 바보야!’라고 말하는 자는 불 게헨나(지옥)에 들어가야만 한다.”
나의 즉각적인 반응(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음)
감정: 갑갑하다. 화를 내지도 못하고 욕을 시원하게 내뱉지도 못한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까.
생각: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그러니 억압하지 말고 시원하게 욕하자.)
신념: 감정을 눌러두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그러니 화가 나면 감정을 표출해야만 한다.)
세계관: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이다.(그러니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감정과 생각과 신념과 세계관은 줄기와 뿌리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표면에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불편한 ‘감정’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빨리 무시해 버리곤 하는데, 이 방법에서는 감정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 아래에는 감정을 낳는 생각이 있고, 생각 아래에는 그 생각을 낳는 신념이 있고, 신념 아래에는 그 토대가 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세계관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으면 의식에 잘 포착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마음의 확신입니다.
위와 같이 감정부터 세계관까지를 체계적으로 관찰하며 접근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서 그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감정, 생각, 신념, 세계관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말씀으로부터 상상하며 적어봄)
감정: 염려(?), 제자 공동체에 대한 기대감(?)
생각: 욕설과 살인은 같은 마음의 뿌리(분노, 멸시)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념: 어떤 약자도 분노와 같은 사소한 이유로 존엄성을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세계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위의 내용은 이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어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소리 내 읽고 귀 기울여 들으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적어 보면 됩니다. 이렇게 적어 놓고 양쪽을 살펴보면서 나 자신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의 감정, 생각, 신념, 세계관이 예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아 변화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 후 성찰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일단 몸으로 실천해 본 후에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성찰해 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모든 명령에 다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명령이라고 눈을 뽑거나 손을 잘라 버린 후에 성찰을 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단순히 실천하면, 성령님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일으키셔서 우리의 경험의 지평을 넓히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습관적으로 내뱉던 비난의 말을 단순히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만일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긴급히 간구하며 버텨 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노력을 하면서,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해 보며, 성령님이 이 과정에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지를 성찰해 봅니다.
산상수훈에는 몸으로 순종하고 실천해 보지 않으면 결코 체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명령과 가르침은 우리의 지성만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변화시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여러 명령들을 그냥 빨리 읽으며 잠시 생각해보고 지나가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중에 한 말씀이라도, 한 주 동안 끈질기게 붙잡고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는 씨름을 하며, 그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주시며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반응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제자도의 본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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