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안식일에 행할 종교 의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 가까운 곳에, 성인 남성 10명 이상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제사가 아닌 말씀 중심의 의례가 생긴 것이다. 그런 접근성 덕분에 사람들은 이제 안식일마다 종교 기관인 회당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제사가 사라지니 제사장이나 왕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지배할 수 없었다. 그들 대신에 ‘누구나’ 예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중략) 안식일은 이제 그들의 날이 아니라 우리의 날이 되었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안식일은 노동을 쉬는 날이다. 이날을 쉬는 것은 7일의 리듬에서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즉,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노동에서 놓여 쉼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이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이 또한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시적 형태의 신앙고백이다.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고백이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원래 안식일은 의례의 날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공적으로 모여서 종교적 의례를 행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었지 어떤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날은 아니었다. 물론 가정에서 사적으로 지키는 의례는 있었지만, 공적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식은 따로 없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성전 전통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지으면서 성전 건축과 함께 지방에 존재하던 제단과 산당 등을 제거했다. 당시 산당과 제단은 우상숭배와 이단적 종교 행위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종교적 정비의 차원에서 지방의 종교 기관들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왕권을 확립하고 종교의 중앙집권화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유대교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종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단 한 군데만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규모가 작다고 해도 한 나라이다. 그런데 종교 기관이 단 하나로 통일되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인구는 약 4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다윗의 인구 조사 때 요압 장군이 보고하기를, ‘칼을 잡을 수 있는 자가 130만 명’이라고 했다(삼하 24:9). 그 수에는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빠졌다. 여기에 여성과 ‘칼을 잡을 수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의 숫자를 더하면 대략 400만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종교 기관이 딱 한 군데뿐이었다.

우리나라 충청남도와 북도의 인구를 합해도 400만이 안 된다. 전라남도와 북도 인구를 합해도 역시 400만이 안 된다. 아마 당시 이스라엘 인구도 이 정도 규모였으니 비교해 보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즉, 충청도에 교회가 하나 있고, 전라도에 교회가 하나 있는 식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고, 통신이 용이한 시대라고 해도, 사람들이 매주 이렇게 한 군데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율법이 명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일 년에 딱 3번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간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 칠칠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남자들이) 성전으로 와야 했다. 바꾸어 말하면, 이날 외에는 의무적으로 종교 기관을 찾아올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모이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각자 제물을 가지고 먼 길을 오가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도 성전을 단 한 군데에만 만들어 놓고 다른 종교 기관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거의 신앙생활을 포기하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일반인들은 그렇게 힘들게 성전을 찾아도 정작 제사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 안쪽 ‘제사장의 뜰’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이스라엘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다. 이들의 참여는 자신들의 제물을 제사장들에게 전달하는 데서 끝났다. 제물이 어떻게 드려지는지, 제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볼 수 없었다. 성전에서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공적으로 함께 드리는 예식은 따로 없었다.

종교사회학의 눈으로 보면, 확실히 이 당시의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종교이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왕권과 귀족층, 그리고 제사장들의 종교였다. 일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전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성전이었다. 평민 유대인들은 유대교에서 소외되었다. 성경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상류층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왕실의 기록만 남아 있다.

다시 안식일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신앙고백의 가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날에 공적인 종교 의례를 가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런 성전 중심의 종교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성전 중심의 종교는 유다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점령당하고, 예루살렘은 파괴된다. 성전은 무너졌고, 성전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져 유흥 자리의 술잔이 된다. 지금까지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의 상징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상징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집단 이주된다. 그들의 지도자 그룹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도 상당한 다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이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포로기 이후 돌아온 이들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자들을 책망하고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수에서나 영향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 통째로 바벨론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뉴노멀’은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그들을 정의했던 것은 500년 전통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성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것이 말씀이었다. 포로기에 그들은 오히려 말씀에 집착했다. 거룩한 문서들을 정리했고 책으로 엮었다. 제사가 중심이던 성전 전통에서는 소홀했던 일이다. 그리고 성전 대신 그들은 회당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유대인 남성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세우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회당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즉, 공동체가 그 구성 요건이었다는 점이다. 또, 단지 유대인 남성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대단한 요건이 아니었다. 10명만 있으면 되는데, 어느 규모 이상의 건물도 필요 없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회당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제사가 아니라 말씀 중심의 예전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 남성 중 누구든지 성경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회중 앞에서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복잡한 제약이 없었다. 그 제도를 가장 잘 이용한 경우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사역이다. 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회당을 찾았고, 말씀을 꺼내 읽고는 새로운 복음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했다. 그러한 회당 전통은 이미 포로기부터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이었다.

그리고 안식일의 이동 금지 규정에 따라 회당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이동이 허락되는 거리는 대략 1km 정도였다. 즉, 안식일에는 반경 1km 이내의 이웃 사람들이 그들의 회당을 찾았다.

이미 힌트가 다 나왔다. 회당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안식일에 행할 종교 의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 가까운 곳에, 성인 남성 10명 이상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제사가 아닌 말씀 중심의 의례가 생긴 것이다. 그런 접근성 덕분에 사람들은 이제 안식일마다 종교 기관인 회당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제사가 사라지니 제사장이나 왕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지배할 수 없었다. 그들 대신에 ‘누구나’ 예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새기는 날이 되었다. 안식일은 이제 그들의 날이 아니라 우리의 날이 되었다. 누구나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그날은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성경은 이러한 회당 전통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제도를 만들었는지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 성막이나 성전이 지어질 때와 관련해서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성막이나 성전이 만들어질 때, 쉬지 않으셨다. 그 설계도를 주셨고, 인테리어와 기물들에 관해도 꼼꼼히 지시하셨다. 심지어 제사장들의 의상까지도 섬세히 규정하셨다. 그런데 회당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할 뿐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성전 전통은 제사장들과 왕족 중심의 엘리트 종교였다. 즉, 역사적 주류의 전통이었다. 그에 반해 회당 전통은 포로들의 모임에서 시작했다. 외형도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주류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비주류에 의해 주도되었다. 역사 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성전에 비해 회당 이야기는 별로 적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기록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전 전통은 포로기를 포함한다고 해도 1천 년 역사로 끝이 났다. 이에 반해 회당은 지금까지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성전의 제사 제도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회당은 어디에서든 유대인 남성 10명만 있으면 자리를 잡고 명맥을 이어간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회당을 통해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말씀 중심의 예전을 행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제사장과 백성의 구분도 없었고, 모든 이들이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회당의 등장으로 비로소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 된다. 적어도 500년 이상 지속되던 성전 전통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회당 전통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잉태된 곳이다. 회당 전통은 이후 기독교의 예배 전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성전이 아니라 회당에 그 명맥이 닿아있다. 특히 개신교는 더더욱 말씀 중심, 성도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회당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성전 전통만 알고 그 전통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해석하고자 한다. 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드리는 제사만을 신앙생활의 중심 은유로 삼으면, 자칫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 종교 생활과 신앙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쉽다. 이제 일반인들의 공동체로, 말씀 중심의 예배로 새롭게 신앙생활을 정의했던 회당 전통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특히, 온라인 예배 공동체가 등장하며 성전과 회당 두 전통이 공존하는 오늘의 상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변화의 시기일수록, 우리의 신앙 전통들의 의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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