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 준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믿어지지 않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 (아이가)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부모는 ‘되겠어?’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 과연 믿어 준다는 것은 부모인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뢰를 줄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 아니, 있던 신뢰마저도 무너뜨리는 아이를 믿어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본문 중)
김성경(부모교육디자인연구소장, 기윤실 청년상담센터 위드WITH 공동 소장)
미국에서 범죄, 마약, 폭력, 알코올 중독 등이 일상인 빈민촌에서 태어난 아이들 300여 명을 대상으로 30년간의 종단 연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그 연구는 부모의 삶처럼 아이들도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30년 후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기하게도 아이들 중 70여 명이 가설과 달리 훌륭하게 잘 자랐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 결과를 분석해 본 결과,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어 주는 사람, 내 편이 되어 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믿어 준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이미 잘하고 있어서 저절로 믿어지는 아이를 두고 ‘믿어 준다’고 하지는 않지요. 믿어지지 않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믿어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집에 두 아이가 있으면 하나는 그냥 절로 믿어지는 아이입니다. 똑 부러지게 자기 삶을 삽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이는 약속했던 것도 쉽게 까먹거나 어기고 스스로 결심한 일도 흐지부지하고 뚝심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부모는 ‘되겠어?’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또 미안해지지요. 아이를 믿어 준다는 것은 어렵고 고민 많은 과제입니다. 특히 아이의 사춘기 즈음에는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과연 믿어 준다는 것은 부모인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뢰를 줄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 아니, 있던 신뢰마저도 무너뜨리는 아이를 믿어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첫 번째는 과정이라고 보아주는 마음입니다. 아이는 변할 것이고, 어른이 되어 자기의 삶을 살아 낼 것입니다. 훌륭하게 어른이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청소년 시기를 돌아보며 믿을 만하지 못했던 모습을 고백합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청소년기는 뇌 자체가 리모델링되는 시기라고 하지요. 그래서 충동적입니다. 다 알던 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자녀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가 잘 버텨 주는 것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제인 넬슨은 『긍정의 훈육』이라는 책에서 뇌 전두엽의 완성 시기는 여자는 만 23-25세, 남자는 25-30세라고 했습니다. 전두엽은 감정을 읽고 자기를 컨트롤하며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역할을 하는 영역인데, ‘철이 드는’ 시기가 바로 전두엽이 완성될 때라는 거죠. 함께 책을 읽던 부모들이 이 문구를 보고, ‘세상에 그때까지나 기다려야 해?’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20세 중후반까지라고 생각하니, 긴 안목이 생기고 조급한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자라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지금 모습이 결말이 아님을 기억하고 잘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정이라고 보는 마음은 다른 말로 하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란 말에 최근에 들었던 설교 말씀이 떠오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 3:20). 주님은 문을 두드리며 부르신 후에는, ‘왜 문을 열지 않느냐’고 혼내거나 강요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우리에게 기다림의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두드리시며 그저 말씀하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아이를 억지로 바꿔놓으려 하지 말고,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순간이 오도록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탕자 비유(눅 15장)에도 기다림의 모습이 비칩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수소문하고 찾아서 데리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혼내지 않고, 그저 측은히 여겨 안고 입을 맞춥니다.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렸을 아버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하는 불편한 행동을 과정이라 여기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믿어 주는 것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어 주려고 했던 노력이 혹여 방치가 되지는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 알아서 잘 클 것이라고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아이가 스스로 한 행동의 결과를 경험해 보고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리거나, 너무 늦게 깨닫고 되돌리기가 쉽지 않아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방치와 자율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게임을 밤새도록 하고 있는데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자율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방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아도 자율이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것. 또는,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일”을 말합니다. 즉, 자율도 정해진 원칙에 따라 스스로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칙 없이 멋대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가만히 있지 않고 문을 두드리셨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인 우리는 무엇을 말해 주어야 할까요? 아이가 어리다면, 행동이 일으킬 결과를 알려주어야 할 뿐 아니라, 아이와 함께, 지켜야 할 원칙과 그것을 어겼을 때 져야 할 책임을 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더 아픈 경험을 하기 전에 사소한 일에서부터 책임지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좀 컸다면, 아이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가 인생에서 어떠한 더 큰 결과를 낳는지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두드리고 말해 주었다면, 이후에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 믿어 준다는 것은 내 기대가 혹시 과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편해지는 일의 원인이 내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부모인 나의 틀이나 한계 혹은 욕심 때문에, 내려놓아야 할 영역인데 못 내려놓고는 안 믿어진다고 고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의 진로를 놓고 부모가 시대 상황과 수입, 발전 방향 등등을 다 따져보고 기도한 후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따르지 않는다고 ‘철이 안 들었다’며 답답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 따져 보고 기도까지 했더라도, 아이 본인이 직접 정해야 할 문제를 부모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춘기 아이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는다’며 행동 하나하나 개입하고 규칙에 맞지 않는다며 행동을 교정하려고 하지는 않나요? 그럴 때, 아이들은 대화를 피하고 문을 잠급니다. 반항하고 대들기도 하지요. 어렸을 때는 보살펴 주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청소년기에는 지켜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청소년기에 세세한 개입은 잔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밥 먹고 가방 메고 집을 나설 때까지 하나하나 다 개입하며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으면, 그 문제는 누구의 문제가 될까요? 바로 잔소리하는 부모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학교에 늦기라도 한 날에는 부모 탓을 합니다. 잔소리는 못 믿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지요. 믿어 주는 것은 잔소리를 멈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잔소리를 멈추면 스스로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넷째, 믿어 준다는 것은 그 아이 속에 싹을 틔우고 있는 씨앗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들마다 각자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자연을 보면 나무들마다 싹이 움트고 꽃을 피우는 때와 시기가 제각각입니다. 아이들 또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교합니다. ‘누나는 자기 할 일을 잘하는데, 너는 왜 그러냐’라고. 믿어지지 않는 아이 속에 숨겨진 씨앗을 보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답답하고 불편해 보이는 모습의 뒷면에 감추어진 아이의 장점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씨앗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면, 아이가 믿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 속에 주신 씨앗도 못 보게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죠. 아이들 속에 하나님이 주신 씨앗을 키워주는 말이 아니라, 부정적인 말로 엉뚱한 씨를 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결국 열매를 냅니다. 좋은 말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듭니다.
탈무드에 ‘가시를 보지 말고 장미꽃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장미라는 이름으로 보내셨는데 부모인 우리가 가시만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가시가 먼저 보이는 이유는 찌르기 때문이지요.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가시가 느껴져 아프고 불편할 때는, 아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이름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해야 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생각만 하고, 늘어놓은 것을 잘 치우지도 않는 아이들은, 창의성 있는 아이들입니다. 창의성은 미래 사회에 더 잘 어울리는 장점이 되죠. 산만한 모습이 있는 아이는,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센 아이라면, 자기 생각이 명확하고 잘 표현하는 아이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어 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씨앗, 즉, 원래의 이름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씨앗으로 불리는 아이는, 행복한 아이가 되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대럴드 트레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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