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침묵』을 쓰며 실존했던 신부들의 배교 사건을 가져오되, 그 사건을 소재로 독자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판다. 자기 한목숨 버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신앙을 지킨답시고 버티면 다른 사람들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배교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도 배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웃을 위한 배교, 이기적인 순교라는 역설적인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그렇게 설정된다.(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던지는 질문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얼마 전에 봤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주연의 이 영화가 2005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작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영화는 복싱 영화의 탈을 쓴 가족 영화다. 할아버지 트레이너 프랭크와 나이가 많지만 뛰어난 재능의 여자 복서 메기가 이룬 유사 가족 이야기.
두 사람은 각기 혈연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메기는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이용당하고 착취당해왔고, 프랭크는 딸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챔피언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가족들의 실체를 알게 된 메기가 프랭크에게 말한다. “난 당신밖에 없어요.” 프랭크의 대답. “나도 너밖에 없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다. 사랑으로, 헌신으로 결속된 가족.
예상했어야 했다. 그렇게 끈끈하게 관계를 쌓아가고 둘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이 그 결속이 깊어져 갈 때는 감독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과연 감독은 그렇게 정겹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관계를 바탕으로 파국을 준비한다. 메기가 상대편 선수의 비열한 공격으로 전신 마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메기는 이 절망적 상황을 죽음으로 끝내려 한다. 그녀는 프랭크에게 요청한다. 당신 덕분에 꿈도 못 꾸었던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환호성이 끊어지기 전에 나를 보내 달라, 당신이 그 일을 해 달라.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 프랭크가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자, 메기는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한다. 반복적으로. 의료진은 그녀의 지속되는 자살 시도를 막기 위해 약물을 계속 주입할 수밖에 없다. 메기는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지내게 된다.
메기는 프랭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너무 고통스러워요. 나의 고통을 당신이 가져가 주세요.’ 그리고 프랭크는 결정을 내린다. 자신이 그녀의 고통을 짊어지기로 한다. 그것이 자기 영혼을 박살 내는 일인 줄 알면서도. 법에서 살인이라고 정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영화는 프랭크가 얼마나 메기를 사랑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보여주고 설득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그것은 불순물이 조금도 없는 순도 100%의 것이야’라고 강변한다. ‘나도 너밖에 없다’는 프랭크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영화는 묻는다. 프랭크의 결정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이것은 사랑으로 행한 진정한 자기희생적 행위가 아니냐고.
『침묵』이 제기한 딜레마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 『침묵』을 드디어 읽었다. 책 내용은 오래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이었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았기 때문이고, 그 결말이 너무 암울했기 때문이다. 일단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때 일본에서 왕성한 개종자를 얻고 힘 있게 전파되던 기독교 신앙이 일본 정부의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된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포르투갈인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이 전해진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목자 잃은 양을 돌보고 페레이라 신부 배교 소식의 진상도 파악하고자 동료 신부와 함께 일본으로 잠입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인 기치지로의 안내를 받고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 한동안 사제로서 역할을 감당하지만, 곧 일본 정부의 추적을 받고 달아나다 결국 체포된다. 그가 돌보던 신자들은 잡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순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와 함께 잡혀 온 동료 신부는, 물속에서 고문당하며 죽어가는 신자들에게 달려가 목숨을 잃고 말지만, 로드리고는 그럴 기회도 얻지 못하고 배교하라는 설득을 줄기차게 받게 된다.
로드리고는 신앙을 굳게 지키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리라 다짐하지만, 페레이라 신부를 앞세운 설득과,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일본인 신자들이 지독한 고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배교의 표시로 밟아야 하는 후미에(그리스도 얼굴이 새겨진 동판)를 발 앞에 둔 로드리고에게 예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밟아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그리고 그가 후미에를 밟았을 때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영어번역본 『Silence』의 번역자 해설에 따르면, 페레이라와 로드리고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들의 사연은 그보다 훨씬 단순했다. 그들은 지독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를 겪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고문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사정이 안타깝고 안 되었을 뿐, 상황 자체는 복잡할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다.
그런데 작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침묵』을 쓰며 실존했던 신부들의 배교 사건을 가져오되, 그 사건을 소재로 독자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판다. 자기 한목숨 버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신앙을 지킨답시고 버티면 다른 사람들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배교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도 배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웃을 위한 배교, 이기적인 순교라는 역설적인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그렇게 설정된다.
그리고 이런 처절한 딜레마 앞에서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고는, 이미 수차례 배교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관청에 신고하여 붙잡히게 만든 배신자 기치지로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고해를 들어주고 사죄를 선언한다. 일본인 신자들을 무지렁이처럼 하찮게 여기던, 그리고 나약한 기치지로를 경멸하던 로드리고, 페레이라 신부의 패배를 자신의 승리로 만회하려 했던 자신만만한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더없이 겸손해진다.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서 신자들을 살리는 선택을 한 로드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을 밟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로드리고. 막막한 딜레마 앞에서 무너지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버린 그 자리에서, 오히려 로드리고는 속으로는 그래도 예수님을 붙들고자 한다. 이런 로드리고를 보며, 신앙이란 무엇인가, 배교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희생이란 무엇인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을 흔들어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에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침묵』은 내게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해결 불가의 딜레마에 직면해 쉽지 않은 결정을 요청받은 캐릭터들을 통해,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묵직하게 한 방을 먹이는 것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나는 프랭크가 아니고 나의 사랑은 프랭크의 그것처럼 진실하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랑은 불순물이 잔뜩 섞여 있는 것이다. 내 사랑이 저렇게 순수하고 진실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아마 나는 앞으로도 죽 프랭크와는 달리 순수하지 못한, 그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테고 이런저런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랭크처럼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이 있다 해도 그것이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그의 선택이 지혜롭고 바른 것임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다.
영화나 소설, 또는 윤리학 교과서 같은 데서 나오는 딜레마 상황의 핵심은, 그것이 딜레마임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게 아닐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당장 눈앞에서는 막힌 담,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던가. 그것이 과연 진정한 딜레마인지, 아니면 나의 눈이 가려지고 멀리 보지 못해서 생긴 착시인지 당장에는 알 수가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메기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죽여 주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정말 막힌 길이었을까? 그녀가 삶의 희망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영화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독이 그런 상황을 전제로 삼아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영화’이므로.
그러나 우리의 삶이라는 영화,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의 감독과 저자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비유컨대 우리는 작품 바깥에서 작품을 구경하는 관객이 아니라, 작품 속 등장인물, 배역인 셈이니 전체 판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감독의 지시, 작가가 펼쳐가는 상황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내가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기 전에는, 그것이 과연 어떤 상황인지 미리 알 도리는 없다. 그것은 미지의 무대요, 그렇기에 믿음과 불신, 덕과 악덕이 의미 있는 세계다.
픽션은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판을 짜놓고 ‘만약 이런 거라면?’이라고 묻게 만든다.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침묵』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로드리고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딜레마 상황은 다른 사람, 훨씬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겠고,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로드리고의 선택에 대해 두 가지만 말해두고 싶다. 첫째, 페레이라와 로드리고가 그렇게 ‘이타적인’ 선택을 하고 난 후, 그들에게는 또 다른 숙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들어오는 외국 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담긴 물건이 없는지 검사하는 임무다. 거기다 페레이라는 그리스도교가 거짓임을 밝히는 변증서를 써야 한다. 한 가지 선택이 그것으로 그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첫 번째 선택을 내릴 때만 해도 생각할 수도 없었을 자리로, 원래의 자리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 결정을 요구하는 자리로 사람을 몰아간다. 자신의 배교가 배교가 아니라는 강변은 어디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그런 항변이 무의미해지는 지점은 없을까? 언젠가, 어디선가는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점, 그 지점은 어디일까?
둘째, 페레이라 신부가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을 꺾기 위해 거론했던 비유.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릴 수 없는 늪과 같은 곳이니, 일체의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 이 주장에 로드리고 신부는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일본만의 어려움이겠는가. 안 그런 곳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페레이라 신부의 주장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열심히 개발해낸 논리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로드리고의 모델이었던 실제 인물 주세페 키아라가 처했던 상황도 로드리고가 처했던 상황처럼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가능하면 피할 수 있다면 좋겠고, 혹시라도 그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혹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둘 다 보통의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시험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신앙 때문에 키아라 같은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믿음의 시험은 얼마간의 손해와 거북함, 억울함, 그런 것들일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버겁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어떤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제삼자가 왈가왈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건투를 빌어 줄 뿐.
로드리고 같은 딜레마는 어떨까? 현 한국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배신해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딜레마를 겪는 상황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웃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개인과 가족과 조직의 부를 쌓던 사람이 그런 행태를 포기하는 것이 죽기만큼 어려운 딜레마로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사사로운 이익과 배치된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너무 어려운 딜레마로 처음부터 기가 꺾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은 일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그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작은 이익, 작은 민망함, 작은 불편, 작은 허영심, 작은 분노. 현실 속에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진짜 흔들어놓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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