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해 시작된 안식일이 인간을 얽어매고, 그를 사탄에게 매이게 하는 날이 되었다. 그물에 매인 짐승이 도망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 그물이 더 옥죄어 오듯이, 안식일은 어느덧 인간을 옭아매는 그물이 되고 올무가 되었다. 안식일의 규정은 점점 더 세분화 되고 구체화 되어 사람들이 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 결국 ‘안식’의 날은 율법의 날이 되었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늘 논쟁의 초점이었다. 복음서에 안식일이 등장할 때마다 예수님과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님과 맞서는 이들은 때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었고, 때로는 회당장이나 심지어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두고 예수님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의 의도가 예수님을 얽어매어 죽이는 것인 때도 있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 했다. 안식일에 했던 예수님의 설교 때문이었다.

논쟁은 주장하는 이의 논지를 가장 잘 드러내 준다. 다툼이 있는 곳에서 반짝이는 진리가 드러난다. 물 흐르듯 흐르는 강의에서는 포착하기 어렵던 핵심이, 정쟁의 원수들이 맞붙어 벌이는 토론에서는 손쉽게 파악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 서기관, 회당장 등과 목숨을 걸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이 걸어오는 싸움에서 한 치의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벼랑 끝 논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빌미는 예수님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고, 밀밭에서 이삭을 까먹고, 회당에서 도발적인 설교를 했다. 자신의 정적들이 마주하고 있는 장소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나를 죽이려면 죽여 봐라’하는 도발이었다.

안식일 규정은 여러 세대 동안 점점 강화되었다.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자에 대한 벌칙도 엄격했다. 그 벌칙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한다(출 31:14-15; 35:2).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이라고 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은 죽이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거듭 말씀하신다. 심지어 반드시 죽이라고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따라 안식일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현장에서 돌로 쳐 죽였다. 재판과 같은 사법적 절차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올무로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버젓이 안식일의 규정을 깨 버렸다. 누군가 하나라도 돌을 들어 던졌다면 주위의 모든 군중이 돌을 던져 그를 죽여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상황이 연이어 벌어진다. 그럴 때마다 예수의 정적들은 분노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돌을 던지지는 않았다. 딱히 예수를 이길 수 있는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첫 번째 돌을 던지는 자가 나타나지 않은 기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안식일에 관해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무엇일까? 안식일의 참된 의미에 관한 말씀이었다. 안식일이 왜 있어야 하고,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자 하셨다. 마가복음 2:27-28은 이 내용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인자의 주인 됨은 단지 안식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규율을 들어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첫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고향인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성경을 펼쳐 읽고 해설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사야 61장의 메시아 예언이었다. 그는 첫 장면부터 메시아 예언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고향에서부터 자신의 메시아 됨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가버나움으로 가셨고, 역시 안식일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회당에서 마주한다. 그리고 “권위와 능력의 말씀”으로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는다. 주목할 부분은 이것이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니라 귀신 축출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권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사건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통치할 권세를 가진 자라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고 이루어 가는 자, 그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4장을 넘어 누가복음 6장에 다시 안식일 이야기가 나온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며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곳에서. 이 정도라면 의도성이 보인다. 밀밭을 지나다가 별생각 없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지켜보는 그 밀밭을 찾아가서 도발적으로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다. 결코 실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개인들이 아니라 스승을 모시고 사는 제자의 집단이었다. 개인적 실수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겨우 900여 미터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을 세면서 걸어야 할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실수로 그럴 리는 없다. 그것도 바리새인 앞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러한 도발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정죄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변론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결정적인 도발로 말을 마쳤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그 주인의 자리는 항상 하나님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한 청년이 나타나서 그 자리에 자신을 넣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여기서 뚝 끊겼다. 어떻게 여기서 마무리가 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것이 누가복음 6:1-5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다른 안식일 이야기가 나온다. 역시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 회당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예 예수님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 병자를 고침으로써 안식일을 범하는 순간, 그를 고발할 계획이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회중 한가운데로 불러냈다. 모두가 보는 앞에 그를 세운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상대로 공개 도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질문하신 뒤, 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즉,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고,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안식의 개념을 뒤바꾼 말씀이다. 안식일은 무언가를 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일을 쉬는 날이므로 상당히 소극적인 날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날이 선을 행하는 날이고,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고 말한다. 즉,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념으로 안식일을 재규정한 것이다.

하나 더 상징적인 사건을 본다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다. 역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이런 병으로 고생을 한 여인을 마주하신다. 그 여인을 고칠 때 회당장은 분노한다. 자신이 회당장으로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보란 듯이 안식일의 규정을 깨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돌을 들지 아니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명확한 이유를 밝히신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매임’이다. ‘데스미오스’라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갇힌 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몬 1:1)이라고 한다.1) 이는 그가 실제로 옥에 갇힌 자라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중의적인 표현으로 예수께 사로잡힌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탄에게 매인 자, 즉 ‘데스미오스’는 그 뜻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인 자, 사탄에게 속한 자를 해방하여 예수에게 매인 자, 예수에게 속한 자를 만들었다. 이 해방의 메시지는 어쩌면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전하고 싶었던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인간을 위해 시작된 안식일이 인간을 얽어매고, 그를 사탄에게 매이게 하는 날이 되었다. 그물에 매인 짐승이 도망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 그물이 더 옥죄어 오듯이, 안식일은 어느덧 인간을 옭아매는 그물이 되고 올무가 되었다. 안식일의 규정은 점점 더 세분화 되고 구체화 되어 사람들이 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 결국 ‘안식’의 날은 율법의 날이 되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벼랑 끝 산책과 같이 되었다. 바로 옆에 벼랑을 두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 좁은 길에 맞추어져 있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결국 산책의 목적은 잊히고, 그 산의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도발은 결국 우리들의 눈을 들라는 도전이었다. 벼랑 끝 그 좁은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떨어진 자와 다름을 감사할 일이 아니라, 아예 그 길을 벗어나라고 하신다. 안식일에 자신을 옥죄며 그걸 신앙이라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안식일의 주인이 결코 율법이 될 수 없음을 밝히신다. 삶의 여유가 있는 바리새인들이 던져 놓은 그 올무들이 결코 안식일의 주인일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안식일에 사탄에 매인 자를 해방해라’….

결국 우리는 눈을 들어 우리를 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것을 확인하며 직접 경험한다. 바로 이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다.


1)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는 소유격으로 적혀 있다. 영어 번역을 보면 좀 더 정확한데 ‘a prisoner of Jesus Chris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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