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은 과학 소설(SF)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지성과 탐구욕을 가진 청년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비밀을 탐구한 끝에 생명체를 창조해낸다. 생명 탄생이라는 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선 이 청년이 맞이하는 불행과 파국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와 과학기술의 폭주에 대한 경계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이 작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쓰려고 작정하고 쓴 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1)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에서 로봇 데이빗은 과학자에게 자신의 존재 목적을 묻는다. 왜 나를 만들었느냐? 그런데 과학자는 정직하고 시시한 답변을 내놓는다. “기술이 있었으니까.” 로봇에게는 김빠지는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겨난 데에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다니.
그런데 인간이 하는 많은 일이 이와 같다. 기술 발전 자체를 당연시하는 기술 지상주의랄까. 기술이 있는데 왜 안 써? 이런 발상이다. 목적을 정하는 것은 인간인데, 그 역할을 외면하고 일을 벌이면서 그에 따른 책임은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 발전 자체를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할 일이기에 뒤처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정당화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김선형 역, 문학동네)에서도 프랑켄슈타인이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굳이 괴물을 만드는 이유나 목적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없다. 자기가 벌이는 일에 성공할 경우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모를 뿐 아니라, 굳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기술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고, 그래서 그 기술을 찾아내려고 미친 듯이 연구를 한다. 못하는 것이 문제지, 할 수 있으면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 소설(SF)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지성과 탐구욕을 가진 청년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비밀을 탐구한 끝에 생명체를 창조해낸다. 생명 탄생이라는 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선 이 청년이 맞이하는 불행과 파국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와 과학기술의 폭주에 대한 경계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이 작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쓰려고 작정하고 쓴 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괴담
저자 메리 셸리는 말한다. “우리의 본성에 감추어진 까닭 모를 두려움을 자극해서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독자로 하여금 주위를 돌아보는 것조차 무서워하게 만들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심장의 고동이 요동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그렇게 글감을 떠올리던 그녀는,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을 목격하고 그 장면을 출발점 삼아 소설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그렇게 작정하고 쓴 이 책에 의외로 끔찍한 장면이나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는 대목은 아주 간결하고 건조하게 서술된다. 선정적이고 자극적 묘사로 눈길을 끌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생겨난 상황 자체가 가진 무서움, 그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고통과 ‘심리’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영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냥 머리가 좋고 연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을 갖춘 뛰어난 과학자에 ‘불과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천신만고 끝에 시체들을 얼기설기 엮어낸 괴물이 생명을 얻게 되었을 때,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의 등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괴물을 두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쳐버린다.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고, 그저 실험실을 멀리하고 괴물이 사라지기만 바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
이후에도 프랑켄슈타인은 줄곧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약한 보통 사람이라서 그렇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어쩔 줄 몰라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느라 바쁘다. 이후 몇 번이나 주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을 괴물로부터 지키는 쪽으로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 사람의 불합리한 선택과 반응은 공포와 죄책감과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는 그에게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싶다. 괴물은 보통 사람이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막강한 존재인 데다가, 프랑켄슈타인에게는 괴물 문제를 상의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볼 때 그는 혼자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무섭지가 않았다. 왜 그런지 나를 들여다보니, 나는 주인공의 상황에 나를 대입하거나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관찰자로서 프랑켄슈타인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그의 한심한 행적을 나무라고 있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일을 내가 벌였고 그로 인해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나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 것이며 과연 어떻게 대처했겠는지 상상해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테니, 나는 자기방어를 위해 그런 공감적 독서를 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읽은 이야기는 언제 나의 방어기제를 뚫고 떠올라 나를 괴롭힐지 모른다. 본질적으로 나도 프랑켄슈타인이니까.
괴물에 대하여
이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괴물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미 말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자면,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은 이름이 없다. 괴물을 만들어낸 과학자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런데 어쩌다 다들 그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영화나 다른 미디어들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들어낸 괴물, 내가 남긴 괴물이 나를 규정하게 된다고. 나는 그 괴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고.
괴물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달변이다. 그는 진정한 웅변가다. 엄청난 체력과 지구력을 겸비한 거인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달변가일 뿐 아니라 대단히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섬세한 감정이라는 것은 그만큼 쉽게 상처받는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 감정에 쉽게 휘둘릴 가능성을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를 보는 인간들마다 다 그를 무서워하고 경멸하고 내쫓으려 한다. 인간에게서 받은 온갖 부정적 반응은 그에게 고뇌, 절망, 분노, 좌절을 안겨주었다. 괴물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와 늘어놓는 달변을 인용해 본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 다짐, 논리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모든 인류가 나를 피하고 증오하지 않는가? 내 창조주인 당신도 나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승리의 기쁨에 젖으려 한다. … 인간이 나를 동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인간을 동정해야 하는지 말해 달라. 당신은 나를 저 얼음의 갈라진 틈새로 거꾸로 떨어뜨리고 당신의 작품인 내 육신을 파괴하더라도, 그걸 살인이라 부르지 않겠지. 인간이 나를 경멸로 대하는데 내가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가? 상처가 아니라 친절을 서로 나누며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나도 그렇게 받아들여 준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판타지적 결말에 대하여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서로를 숙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괴물에게 복수하기 위해 목숨을 이어간다. 괴물은 자신에게 이 괴로운 삶을 안겨준 창조자가 섣불리 목숨을 끊지 못하고 자신을 따라오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프랑켄슈타인이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자, 그 앞에서 비통한 비명을 지른다. 괴물은 왜 그렇게 창조자에게 집착했을까. 왜 프랑켄슈타인이 죽자 자신의 질긴 목숨을 스스로 끊기로 결정하는 것일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은 어느 순간부터 살고 싶은 마음이 크게 강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프랑켄슈타인의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하나 죽이면서 자기 또한 너무나 괴로웠다는 괴물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에게 이런 고되고 쓰라린 삶을 안겨준 창조자에게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 주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짐작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 둘 다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가 있는 한 죽을 수 없는, 기이한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결과만 놓고 볼 때,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방법, 자신이 만든 괴물을 없애는 방법은 간단했다. 고통과 후회만 남은 목숨을 스스로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죽으면서 그가 만들어낸 괴물도 알아서 죽어 주는 소설의 결말이야말로 진정한 판타지적 마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내가 다 안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 아닌가.
고작 씨앗을 구해오는 일
실제로는 내가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책임을 진다고 할 수가 없다. 목숨은 자기가 내놓을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것을 내놓는’ 일일 뿐이다. 괴물이 아끼던 책, 『실낙원』의 주인공 아담과 하와가 이와 동일한 딜레마에 빠졌다. 위에서 인용했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제사(題辭)로 실린 아담의 탄식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에 나온 것이다. 그 말을 하기 직전에 아담은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내가 가져다준 재난을 느끼며 내 머리를 저주하지 않을 자 어디 있으랴”(10권 733-734). 자신이 이후의 모든 후손들에게 어떤 재난을 안겨 주게 될지를 생각하며 아담의 입에서 문제의 하소연이 터져 나온다. 왜 저를 만드셔서 이런 낭패를 당하고, 두고두고 원망을 듣는 상황을 맞게 하십니까.
그러나 동일한 낭패감을 느꼈던 하와가 피임을 하든 자살을 하든 해서 자기들 대에서 저주를 끝내자고 했을 때, 아담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것은 죄를 더할 뿐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려는 처사라고 본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공손히 엎드려 / 함께 저희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 용서를 빌며, 거짓 없는 슬픔과 온유한 / 겸손의 표상으로, 뉘우치는 가슴에서 / 우러나오는 눈물로 땅을 적시고, / 한숨으로 하늘을 메운다”(10권 1099-1104).
아담과 하와가 한 일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중 한 권인 『마법사의 조카』에 나온다. 그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주인공 소년 디고리는 호기심과 경쟁심에 휘둘려 이제 막 창조된 나니아에 악이 들어오게 만든다. 갓 태어난 새로운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위해를 가한 것이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사실 그가 수습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나니아를 창조한 위대한 사자 아슬란은 디고리에게 자신의 잘못을 명백하게 인정하게 만든다. 디고리는, 자기가 마녀를 깨워 나니아로 데려왔다는 말을 듣고 자기를 쳐다보는 동물들의 눈길을 느끼며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싶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동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망하지 마라. 악은 그 악마에게서 나올 것이나 아직은 멀리 있고, 최악의 것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라. … 아담의 자손이 재난을 불러들였으니, 아담의 자손이 그 재난을 치유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아슬란은 디고리에게 사명을 하나 맡긴다. 그것은 앞으로 나니아를 수백 년간 지켜줄 나무로 자라날 씨앗을 구해오는 일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독자는 책임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마땅하다. 자기 행동의 결과를 심사숙고하는 것 또한 꼭 필요한 일이다. 내가 벌인 일의 결과물이 집요하게 나를 좇아와 주위를 무너뜨린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조금만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프랑켄슈타인만큼은 아니라도, 본질상 비슷한 부담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모든 부모를 비롯해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만들어 낸 사람이나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은,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낸 인류의 일원인 우리는, 다 우리가 만들어낸 그 무엇이 괴물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지 않는가? 만약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이제라도 가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프랑켄슈타인』은 그렇게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생각하라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할 거라고, 각오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프랑켄슈타인』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인정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동시에 막막하고 답답해진다. 우리가 저지른 일을 수습할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문제도 그렇다. 부모가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해도 자식의 인생을 무한히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러려다 오히려 더 큰 폐해를 낳기에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벌이는 일, 우리가 만든 크고 작은 괴물들에 대해서도 수습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대응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인식 하에서, 아니 그런 인식을 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아슬란이 디고리에게 맡긴 사명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그것은 씨앗을 구해오는 일이었다. 아주 작은 것, 당장에는 하찮아 보이는 것, 고작 씨앗을 구해오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조차도 디고리에게는 버거운 사명이었고, 아슬란이 붙여준 친구와 하늘을 나는 말의 도움을 받고도 사력을 다해야 간신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것은 자식을 낳고, 가르치고, 땀 흘려 부양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신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자책과 후손들의 원망과 치욕을 안고서. 하지만, 또한 자신들을 통해 구원자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우리의 행동에 결과가 따르고,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보상이나 회복을 위한 노력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디고리처럼 겨우 씨앗을 구하러 가는 일이요, 아담처럼 치욕을 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명령하시는 분, 약속하신 분을 의지해야만 해낼 수 있다. 그들의 사명과 삶은, 신앙의 삶에서 회개와 용서가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임을 잘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우리지만, 우리는 용서와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 ‘최악의 것은 내가 감당하겠다’고 말했던 사자와 같은 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1) 존 밀턴, 『실낙원』, 제10권 742-745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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