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성이란 시민이 지녀야할 덕을 말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시대마다 시민성으로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덕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시민의 덕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나, 플라톤의 ‘정의’, ‘지혜’, ‘용기’, ‘절제’ 등과 같은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한편, 근대의 혁명 시기에는 중요한 시민의 덕이 ‘관용’, ‘자유’, ‘박애’ 등이었다. 오늘날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 ‘민주 의식’, ‘공정함(정의)’, ‘공공 의식’, ‘법과 질서’ 등이 중요한 덕으로 여겨지고 있다.(본문 중)
성신형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조교수)
“OO이 OO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터넷 상에서 어떤 집단을 희화화하거나 비난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중에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독이 개독했다”라는 표현이다. ‘개 + 기독교 = 개독’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인데, 한때는 혐오 표현이므로 쓰면 안 된다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코로나19 위기를 경험하면서 개신교발 집단 감염이 끊이지 않자 이 표현을 쓰는 것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개신교에서 시작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개독이 개독했다”라고 말한다. 더욱 아픈 것은 ‘이런 말은 혐오 표현이니 사용하지 말아 달라’ 말하기도 부끄럽다는 점이다.
코로나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개신교계에서 문제들이 드러날 때마다 ‘모두가 다 그런 게 아니야.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것은 일부야’라고 변호하였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변명을 받아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코로나 위기를 통과하는 동안 일부의 일탈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교회들에서 “개독이 개독하고 있는” 상황을 교회 밖 사람들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가 이들(기독교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이렇게 참담한 상황까지 몰고 왔을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민성’에서 찾고 싶다.
시민이라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국가가 생겨났을 때, 그곳에 거주하는 자유민을 시민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책임이 지워졌다. 이후 기독교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오랜 기간 시민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다가, 근대가 시작되고 혁명을 통해 권력이 바뀌게 되고, 역사가 좀 더 흘러서 민주주의가 형성되고 경제 질서가 도시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시민이라는 말은 과거 그리스 시대와는 다른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과거 도시 국가에서 시민이 하나의 계급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시민이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개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평범한 용어가 되었다.
‘시민성’이라는 용어도 이처럼 역사적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시민성이란 시민이 지녀야할 덕을 말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시대마다 시민성으로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덕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시민의 덕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나, 플라톤의 ‘정의’, ‘지혜’, ‘용기’, ‘절제’ 등과 같은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한편, 근대의 혁명 시기에는 중요한 시민의 덕이 ‘관용’, ‘자유’, ‘박애’ 등이었다. 오늘날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 ‘민주 의식’, ‘공정함(정의)’, ‘공공 의식’, ‘법과 질서’ 등이 중요한 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개신교)적인 시민성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 되는 것인데, 우리가 꼭 ‘시민성’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어리석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서 어떤 특정 종교가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데 비협조적인 모습을 드러내서 그들의 시민성이 의심받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비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런대로 잘 지내왔다. 조금씩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오늘날처럼 한국 개신교의 시민성에 대해서 의문이 생겨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를 통과하면서 한국 개신교는 많은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위에서 제기된 근본적인 질문을 숙고해 보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면,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암담해질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시민성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의 이념적인 경향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특히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개신교 일부 집단을 ‘극우’라고 부른다. 그런데 ‘극우’의 성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극우는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우리나라처럼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들에서는 민족주의가 극우의 이념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싸운 진보 진영의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반해, 우파는 주로 서구 제국주의 세력(한국의 경우는 일본)을 추종하면서 그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가 우파 세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한국적 극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 일부는 한국적 극우 진영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들은 미국의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반공과 친미, 남성우월주의, 인종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은 현재의 정권을 공산주의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고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만약, (이런 ‘만약’은 별로 의미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한국의 권력이 우파 세력이었다면, 한국의 근본주의 개신교가 이렇게까지 방역을 방해하였을까?
한편, 근본주의적인 경향이 비교적 적은 상당수의 개신교인들이 현재의 국가 방역 지침이 예배의 숭고한 가치를 훼손하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논의는 신앙의 영역이고 개인의 양심의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이 쉽게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논쟁을 다루기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이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지혜롭고 순결하게’(마 10:16) 살아갈 것을 부탁하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3-16).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의 두 왕국론과 같은 내용이다. 기독교인의 두 가지 정체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시민)이면서 또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시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지혜로운 거룩’이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순결함(거룩)이라는 매우 중요한 덕과 함께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이는 비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소통하는 능력이다.
여기에 필요한 지혜가 바로 윤리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 주어라”(마 7:12)라는 말씀이다. 이 황금률은 기독교인들만 지녀온 지혜가 아니라, 인류가 오랫동안 공유해온 지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황금률을 원수 사랑의 계명과 연결 지어 말씀하심으로써 절대적 사랑의 명령을 따르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지혜로 만드셨다(눅 6:27-38).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은 멈추고, 사랑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 한국 개신교와 시민성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편집자).
박선영, 목광수, 김승환, 성신형. (2020). “시민성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이해 분석과 기독교사회윤리적 답변”. 기독교사회윤리, 48(0), 6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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