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하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으로 핵심을 겨냥한다. 오랫동안 이 질문에 한국교회의 누구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쪽 편에서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온갖 사회학적인 방법들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 한계의 인식이었고 철저한 실패였다. 반대쪽에서는 도시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너무나도 도시를 사랑해서 그 모든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도시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마치 영적인 존재인 양 살았던 결과, 한국 개신교는 정신 승리의 종교, 자기만족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한국교회의 주류였던 후자의 신앙 행태가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본문 중)
송지훈(목회와신학 기자, 용인 즐거운교회 목사)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김승환 | 새물결플러스 | 248면 | 14,000원 | 2021. 1. 18.
이 책은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하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으로 핵심을 겨냥한다. 오랫동안 이 질문에 한국교회의 누구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쪽 편에서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온갖 사회학적인 방법들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 한계의 인식이었고 철저한 실패였다. 반대쪽에서는 도시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너무나도 도시를 사랑해서 그 모든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도시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마치 영적인 존재인 양 살았던 결과, 한국 개신교는 정신 승리의 종교, 자기만족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한국교회의 주류였던 후자의 신앙 행태가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원화된 신학의 상처
최근 신앙의 ‘사사(私事)화’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복음과 신앙이 철저히 개인의 내부, 정신, 자아에 갇혔다는 비판이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은 본디 공동체적인 것이며, 심지어 사회적·민족적인 것인데 우리의 예배는 사적인 감정과 만족에 집중했다. 사랑도 정신 안에서 했으며, 회개와 후회도 마음 안에 머물렀다. 실천적인 사랑은 단지 마음의 평안과 단련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필자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것만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신앙을 구체화할 물적 토대 없이 지성과 감성 안에서만 신앙을 키워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성경이 장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장소에 관한 역사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구체적인 장소를 토대로 전개되었으며, 창조와 구속의 모든 과정도 땅 위에서 이루어졌다. 성서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끝난다”(103쪽).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구원의 이야기도 땅, 특별히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기반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는 하나님에 대한 대항의 결과물이지만, 그 도시의 회복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의 죽음으로 도시를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셨음을 기억하자. 시민 된 그리스도인은 죄악 된 도시 안에서도 새로운 존재로 변화해야 하며 그것이 도시를 거룩한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121쪽).
그런데 지금의 도시는 신자인 우리에게 그리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면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도시가 우리 삶의 단순한 배경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도시가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물적 토대인 도시의 존재를 무시하고 살다가는 두 가지 종교를 숭배하고 사는 이스라엘의 우를 다시 범할 수 있다. ‘도시가 종교’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다음 저자의 표현을 살펴보자.
도시는 인간의 영원한 열망과 희망의 표현으로 건설된, 끝없는 욕망의 결정체로 이해할 수 있다.…현대 도시는 신자유주의와 소비문화를 중심으로 그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거대한 쇼핑몰과 레저 시설이 교회와 성당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는 현실 세계를 벗어난 새로운 유토피아로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을 제공했다.…오늘날 도시는 보다 신학적인 초월성의 울림의 장이며 종말론에 영감을 받은 실제적 결과물이다.…새로운 초월성은 돈으로 무한한 권력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면서 법, 제한, 규범, 도덕,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영역을 초월한다. 돈은 ‘무한’을 강조하면서 영원한 천국을 세우려는 도시의 욕망과 연결된다. (93-94쪽)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여 종교화되고 제의화된 도시는 여러 역기능을 가진다. 도시 안에서 사람들은 극심히 분열된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마을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마을의 생명 길과 같은 골목길을 파괴하였으며, 아파트 내부와 외부를 기다란 벽으로 가로막고 그들만의 캐슬을 쌓으면서 다른 지역과 분리하였다”(241쪽). 집은 또 하나의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고, 도시는 재산 증식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극명히 나뉘어 사는 공간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말씀 보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철저히 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그리스도인임을 보여 주는 다양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자유주의와 소비문화라는 신흥 종교에 젖어 살아가며, 적극적인 부동산 투기를 통해 재산 증식을 도모한다. 그 자리 어디에도 이웃을 향한 사랑과 교제, 대안적인 공동체 형성과 변혁적 제자도를 찾아볼 수 없다. 직접적으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가난과 부가 켜켜이 얽혀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가난한 자들의 간접적인 가해자가 되는 실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척하지만 누구보다 이익에 민감하다’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가 억울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지금은 이러한 상황의 적극적인 반전을 꾀해야 할 때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일지 모른다. 이제 제자도의 공간을 ‘정신’에서 ‘도시’로 전환할 때다. 방법이 있을까? 도시를 무시하지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욕망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도시의 회복을 위한 교회의 존재론적 양식
책은 도시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존재론적 양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일부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전을 제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다. 도시가 실제로 ‘개인의 욕망 추구를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문화를 조장’(139쪽)하고 있다면, 새로운 비전을 제공하는 공동체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책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전혀 다른 도시, 즉 이질적 도시”(140쪽)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관한 설명과 창조와 종말에 관한 전통적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 목적은 성화이고 교회는 성도의 성화를 인도하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구원에 대한 공동 협력자로 함께 한다. 기독교의 욕망은 자아의 욕망을 넘어서며, 타자를 소비하지 않으며, 타자가 완전해지는 것을 자신 안에서 허락한다. 그러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주어진다. (142쪽)
둘째는, 공적인, 그리고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교회다. 공간 공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많은 교회들이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중이다. 현대성을 가득 담은 도시가 공간을 사사화하려 노력한다면,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공간을 세우려는 교회의 노력은 도시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유 공간과 지역 공동체를 논의할 때 도시 교회가 가진 장점은 상당하다.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창조물의 구원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보다 도시의 복지를 추구한다. 교회는 도시의 공통된 목적인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참여하며, 오늘날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관용으로 다른 집단을 인정하는 동시에 예언자적 태도와 대안적인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150쪽)
교회가 이렇게 자신을 세상에 내어줄 때, “지역 안에 화해와 평화와 관용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공적 기관”(164쪽)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예전적 존재로서의 교회다. 저자는 “특정 대상을 향한 욕망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형성하므로 세속에 의해 왜곡된 인간의 욕망을 파악하고 욕망을 재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198쪽). 칼뱅은 인간을 종교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그 종교성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데,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현대 인간은 물질 혹은 자아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교회의 근원적인 역할인 예전적인 일들을 잘 감당하는 것이 도시를 회복하는 핵심일 것이다. “인간을 예전적인 동물로 이해함으로써, 신성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 안에서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할 수 있다. 거룩한 것을 예배하며 이상을 구현하는 삶은 공간의 초월성과 영성을 깨닫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202쪽).
특별히 성만찬은 오늘날 한계가 드러난 근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교회에 부여해 준다. “세례, 성만찬, 기도, 교리 문답 같은 구체적 실천이야말로 자아를 변화시키고 욕망을 치유한다. 성례전적 예배는 인간 욕구의 개혁을 위한 기본적 장이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체제 전복적이고 반문화적인 몸짓이다”(209쪽), “성만찬적 정치 공동체는 세속사회가 파편화된 개인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뿐 아니라, 공동체가 진정한 정치체로 연합하고 연대할 원동력을 제공하면서 이 사회를 변혁할 만한 기독교적 가치와 모델을 제시한다”(214쪽).
우리가 익숙하게 해오던 일들로써 세상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상적으로 해오던 예배와 성만찬조차 사사화 했다. 단지 개인의 신앙을 좋게 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예배하지 못하고 성찬을 행하지 못하는 지금, 다시 시작할 예배와 성찬을 깊이 묵상할 때다. 이제는 이것으로 도시를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선물로 주셨음을 성찬을 통해 기억하듯, 교회는 본연의 기능인 예배와 성찬으로 세상에 자신을 선물로 주어야 한다.
교회, 도시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목회를 다루는 월간지를 만들다 보니 정말 다양한 교회 형태를 본다. 주말에 예배하는 공간이 주중에는 카페로, 도서관으로, 서점으로, 공연장으로, 공유 공간으로, 사랑방으로 도시 속에서 활약한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 사례비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형태가 아니냐고 묻는다. 일면 사실이나, 실제로 만났던 목회자들의 비전은 더욱 컸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어 화목제가 되셨듯이, 교회가 세상에 내어준 바 되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꿈꾸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 일부만 우리에게 내어 주시지 않았다. 소유를 내어 주는 것만큼 쉬운 선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 즉, 소유가 아닌 존재를 주셨다. 이처럼 최근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의 일부 공간만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세상에 내어 주려 헌신하고 있다. 물론 교회의 근원적인 내어줌은 예배와 성찬을 통한 복음 전파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되어 도시 내에서 새로운 실천들을 할 수 있다면, 도시의 회복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는 더욱 가치 있다. 새로운 시도들을 위한 신학적 기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특별히 도시 신학과 관련해서는 보수적 교단과 진보적 교단 사이의 차이가 컸다. 공공신학과 급진전통주의의 시각 차이는 각 교단에 속했을 목회자들이 도시 사역을 하는 데 혼란과 주저함을 야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둘 사이에서 매우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문제, 즉, 현실 문제에 교회가 답을 줄 수 있다는 강력한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지금’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다.
교회들이 지탄받는 요즘이다. 우리가 도시 안에서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닮아가길 바란다. 부디 교회가 화해와 평화와 관용을 저버리고, 낯선 이들을 배척하며,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역기능적 기관으로 존재하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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