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날은 각 나라마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치하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계속 이어갈 과제를 점검하며 독려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성평등 그리고 여성인권이라는 주제가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이날을 계기로, 현재 여성인권 논의는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가 되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본문 중)

양혜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날은 각 나라마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치하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계속 이어갈 과제를 점검하며 독려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성평등 그리고 여성인권이라는 주제가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이날을 계기로, 현재 여성인권 논의는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가 되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여성인권을 다루기 전에 먼저 인권 자체와 기독교와의 관계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정리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20세기 들어서 개신교 진영에서, 인권 개념은 계몽주의의 유산이고 따라서 반기독교적이라고 보는 흐름이 생겼는데, 사실 인권 개념은 이미 중세 때부터 기독교 안에서 나온 개념이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신교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서, 오히려 계몽주의자들이 그러한 기독교의 사상을 물려받은 것이다.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권리(rights)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마땅한 존중으로서, 모든 인간의 가치는 그를 가치 있게 여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천부 인권(natural human rights)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그 가치에 근거한다.

 

세계 여성의 날에는 빵과 장미를 나누는 관습이 있다. 빵은 생존권, 장미는 참정권이다.

 

 

그렇다면 인권과 여성인권은 어떻게 다른가? 여성도 인간이라면 여성에게도 인권이 있는 게 당연할 텐데 왜 특별히 강조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엔의 여성차별철폐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약자로 CEDAW)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CEDAW는 1979년에 유엔 총회의 결의로 채택된 협약으로 이 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실제로 그 방침에 따라 이행할 의무가 있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적어도 4년에 한 번은 보고를 해야 한다. 이 협약에 의하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민, 혹은 그 어느 영역에서든 여성이 가지는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를 인정하고, 누리고,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드는 모든 성에 기반한 구별, 배제, 제한의 행위이다. 여성은 이러한 인권과 자유를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남자와 여자의 평등에 근거해서 가진다.”1) 이 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규탄하고 그러한 차별을 철폐할 수 있는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CEDAW의 여러 조항들은 이처럼 여성들이 차별받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재생산 등의 영역에서 차별을 철폐하고 인권을 보장할 것을 명시하는데, 투표권, 피선거권, 남편의 국적을 따르지 않을 권리, 자녀에게 자기 국적을 줄 수 있는 권리, 재산권, 고용, 임금, 교육, 사회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재생산권을 포함한 건강권, 여성 인신매매 및 성 착취 금지 등 폭넓게 다루고 있다. 현재 이 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180개국이 넘으며, 한국은 1983년에 이 협약에 서명하고 1985년부터 국내에 발효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몇 가지 유보 조항을 두었다가 1991년과 1999년 두 단계에 걸쳐 유보 조항을 철회하였다. 일반적으로 국가들이 유보 조항을 두는 이유는 CEDAW의 규정이 국내법과 충돌하거나 자국의 전통, 문화, 종교와 충돌한다고 보는 경우이며, 일부 이슬람 국가들이 CEDAW에 비준하지 않는 이유도 그 규정이 반이슬람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유보했던 조항은 여성과 자녀의 국적과 관련된 조항, 그리고 결혼 및 가족 구성과 관련한 조항이었는데, 호주제 폐지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유보 조항들이 철회되었고, 결과적으로 호주제도 폐지가 되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했던 유일한 종교 집단이 유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도 자국의 전통과 문화 때문에 유보 조항을 두었던 셈이다.

조금 놀라운 사실일지 모르지만, 현재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소수의 국가들 중에는 미국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이 이 협약에 비준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보수 기독교의 정치화와도 연관이 있다. 이들이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면서 CEDAW의 비준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서명은 이미 1980년에 했으나 자국의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CEDAW 조항 중에서 특히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예민한 조항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재생산권 조항이다. 협약에서는 낙태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지만, 재생산을 포함한 건강권의 보장과 재생산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의 명시는 낙태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의 통과를 저지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한 필리스 슐래플리(Phyllis Schlafly, 1924-2016)라고 하는 반페미니스트 활동가는 CEDAW를 비준하는 것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비겁하게 굽실거리는 것이라고 했다. 덧붙이자면,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여섯 자녀를 키우고 뒤늦게 법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러한 보수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도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시장 논리가 독식하는 세계화의 흐름에 맞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는 종교가 중요하게 할 역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 혹은 근본주의 성향의 종교인들이 종교적 배타주의를 정치적 배타주의와 결합시키지 않고, 이렇게 공적인 정치의 장에 나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일원들이 폭력이나 독재 없이 공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종교가 갈등이나 폭력의 원인으로 종종 제시되지만, 볼프는 종교가 가진 선한 영향력을 강조하고, 특히 세계 종교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이는 세계화의 세력 중 하나가 세계 종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 종교는 인류를 하나로 보는 보편적 비전을 가지고 타 지역으로 뻗어 나간 초창기의 세계화 세력이다. 따라서 종교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면, 세계화로 인한 빈부 격차, 환경 문제, 지역 간 분쟁 등을 해결하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하리라는 것이 볼프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브렉시트와 트럼프 이전에 나온 책에서 한 주장이니 지금 그의 생각이 어떨지는 좀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세계화는 주로 신자유주의 경제 원칙하에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의 폐해로 요약되지만, 사실은 CEDAW도 세계화의 흐름 중 하나이다. 이 협약에 제시된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여성인권의 비전은 초국적인 것으로서, 이 협약을 비준한 180여 개 국가가 공유하는 세계적인 가치이다. 볼프는 시장 경제 중심의 세계화에 맞설 세계적 세력으로 종교를 제시했지만, 사실은 여성인권을 위해 싸우는 초국적 페미니즘(transnational feminism)도 시장 경제 중심의 세계화에 맞서는 주요한 세계적 세력이다.

그러나 초국적 페미니즘도 하나의 양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평등과 여성인권의 의제가 서구 중산층 백인 여성의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벌써 1980년대부터 있어 왔다. CEDAW는 개별 국가의 가부장 문화 및 제도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여성인권의 중요한 기준이고 그래서 한국의 여성인권도 세계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용 도구로 자주 사용되었지만, CEDAW의 얼굴이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발언한 미국 백인 엘리트 여성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안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과 종교/문화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며 제3세계 페미니즘, 탈식민 페미니즘 등을 주장하였는데,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주도하는 세계화에 맞서 페미니즘 자체를 탈식민화하고, 불안한 조건에서 사는 99%의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부상과도 맞물려 있다.

성평등이라고 할 때, 특정 계급과 인종의 여성은 같은 계급과 인종의 남성과 평등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지, 그렇지 않은 남성과의 평등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샌드버그와 같은 사람은 자기 계급과 인종에서는 성평등을 이루었을지 몰라도, 그가 이룬 성평등은 모든 여성의 성평등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다른 인종과 계급의 여성들의 불이익을 딛고 성평등을 이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남녀차별만큼이나 여성들 안의 차별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서울과 미국에 집 하나씩 두고 오가며 일하는 여자 기업인 혹은 대학교수와 생계를 위해 한국으로 이주해 식당이나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본국의 집에 돈을 부치는 여자 사이의 격차는 같은 처지의 남성과의 격차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 많은 경우 이 후자의 여성은 전자의 여성을 위해서 일한다.

오늘날 이주 문제는 불법 체류자(undocumented)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적 약자 그룹을 만들어 내었고, 지역 분쟁은 난민을 양산했으며, 나라마다 노숙자의 문제도 안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CEDAW에서 여성이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는 인권과 자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본다면 성평등이라는 말보다는 여성인권이라는 말이 페미니즘의 비전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99%의 여성에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도 이제는 여성이라는 요인 하나만 보지 않고 빈곤, 환경, 난민 문제, 원주민 인권 등 세계화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의 복합적 양상을 다 포괄하려 한다. 그런데도 성평등이라는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이 이룬 중요한 진전은 어쩔 수 없이 남성과의 격차, 특히 경제적 격차와 정치적 대표성의 격차를 얼마나 줄이느냐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라는 면에서 접근한다면,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공조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인권이 기독교와 긴장을 일으키는 이유는, 초국적 탈식민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인 챤드라 탈페이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가 제시한 세계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섹스친화적 여성친화적 세계로서, 여자와 남자가 건강하고 온전한 몸을 가지고 안전을 보장받으며 창의적인 삶을 이끌 자유가 있고,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랑 살림을 차릴지, 아이를 가질지 말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세계이며…경제적 안정, 생태적 지속성, 인종적 평등, 그리고 부의 재분배가 사람들의 안녕의 기초가 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2)

이러한 비전이 기독교 전통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성적 자유일 것이다. 여성들이 일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독교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성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성폭력은 기독교 입장에서도 여성인권의 심각한 침해라고 동의한다고 해도, 그 암묵적 전제가 성적 정절인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랑 살림을 차릴지”에 대한 자유[이 자유는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과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의 자유를 포함한다]와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동시에 보장되어야 여성인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것이다.

오늘날 성폭력과 젠더 폭력의 문제를 폭로하며 여성인권 옹호에 앞장선 일레인 스토키나 루스 에버하트와 같은 영미권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자유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성폭력과 젠더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경우이다. 미국 페미니즘 진영 일부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규제의 확산이 자칫 청교도식 엄숙주의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결국 백인 복음주의 여성들이 이슬람 여성에 대해서 자신의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 스토키의 책은 작년에 번역되어 나왔고,3) 에버하트의 책은 앞으로 나올 예정인데,4) 두 책을 통해 백인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바가 한국 교회에서 여성인권을 논하고 실천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차근히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고, 모든 것들에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목적은 하나다. 여성도 남성도 모두 하나님이 뜻하신 복된 삶을 누리는 것. 기독교의 여성인권 논의도 그 목적을 잊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배움과 실천의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1) 제1조. 번역은 필자가 한 것. 다음 참조: 협약 전문(클릭).

2) Margaret A. McLaren, “Introduction to Decolonizing Feminism: Transnational Feminism and Globalization”(London &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International, 2017), 책 4쪽에서 재인용. 번역은 필자가 한 것.

3) 일레인 스토키,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 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 양혜원 옮김(IVP, 2020).

4) Ruth Everhart, The #MeToo Reckoning: Facing the Church’s Complicity in Sexual Abuse and Misconduct (IVP Books, 2020). 가제: 『교회 내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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