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 살펴볼 책은 C. 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홍성사 역간)다. 루이스가 프시케와 큐피드 신화를 자기식으로 고쳐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이야기하자면 프시케와 큐피드 신화를 소개해야 한다.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이번 달에 살펴볼 책은 C. 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홍성사 역간)다. 루이스가 프시케와 큐피드 신화를 자기식으로 고쳐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이야기하자면 프시케와 큐피드 신화를 소개해야 한다.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왕의 세 딸 중 막내였던 프시케는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비너스의 미움을 산다. 프시케는 신탁에 따라 용의 제물로 산에 바쳐지고, 큐피드는 프시케가 가장 천한 남자를 향해 욕정을 갖게 만들라는 어머니 비너스의 명을 받고 산으로 갔다가 프시케에게 반해 버린다. 프시케는 큐피드의 신부가 되어 비밀 궁전에서 살게 되지만 큐피드는 밤마다 찾아와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밀 궁전을 방문한 프시케의 두 언니는 질투에 눈이 멀어 프시케에게 남편이 얼굴을 숨기는 것은 끔찍한 뱀이기 때문이라며 등불을 켜서 확인해보라고 꼬드긴다. 프시케가 그 말대로 하다가 뜨거운 등불 기름이 한 방울 떨어져 잠에서 깬 큐피드는 프시케를 엄히 꾸짖고 떠나간다. 이후 프시케는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큐피드와 재회하고 여신이 된다.

루이스는 이 이야기를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소설로 고쳐 쓰면서 중요한 부분을 바꿔놓았다. 프시케의 궁전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만든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그는 프시케 이야기를 처음 읽은 순간부터 이 궁전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프시케 이야기가 소개된 『황금 당나귀』(현대지성 역간)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이면을 파고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풀레이우스는 이 이야기의 창작자가 아니라 전달자였다. 이 말의 의미를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는 글에 실린 루이스의 생각을 따라가며 살펴보기로 하자.

 

ⓒ홍성사.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가 안겨주는 의문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역간)나 SF 3부작1) 같은 픽션에서도 기독교적 메시지와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런 루이스의 픽션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의 마지막 픽션 작품인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당혹감을 안겨준다.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메시지가 선명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신화 다시 쓰기라는 방식이 낯설다. (알고 보면 나니아 연대기나 SF 삼부작도 신화적 요소가 가득하지만 그런 ‘사실’은 논외로 하고 우리의 인상을 존중하고 거기에 답해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그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즐겨라.’ 이런 조언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런 조언이 꼭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읽고 넘겨야 할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과 형식 모두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작가인 C. S. 루이스가 오랜 고민과 숙고 끝에 찾아낸 내용과 형식이라면, 한번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이중적인 느낌, 즉, 이야기로서 갖는 흡인력에 매료되면서도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잡히지 않았던 느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말을 몇 가지 질문에 답변하려는 시도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루이스는 왜 신화 다시 쓰기라는 방식을 선택했을까? 왜 이전보다 모호하게, 비껴서, 다른 매체를 빌어서 말하는 것일까? 좀 더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되겠다. 왜 이렇게 둘러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명확한 메시지가 주어지지 않았는가? 교리, 신앙고백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런 명확한 것을 두고 모호하고 애매하고 희미한 것들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거기다가 이교적인 신화를 끄집어내다니. 거짓에 불과한 그런 신들과 참 신이신 하나님의 구분을 오히려 흐려놓는 일이 아닌가. 여기에 두 가지 정도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화의 유용성 1

루이스는 신화가 단순한 역사나 악마적 몽상, 성직자들의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의 신화의 경우, “비록 미광이지만 어떤 참된 신적 진리의 광선이 인간의 상상력에 떨어진 것”2)이라고 본다. 그러면 신화의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일까? 신화의 역할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인간 지성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구제 불능일 만큼 추상적”이다. 순수 수학은 성공한 사유의 전형이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실재들은 모두 구체적인 고통, 쾌락, 개, 사람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고통을 참고 그 쾌락을 즐기는 동안에는 쾌락, 고통, 인간성을 지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 파악 작업을 시작하면 구체적인 실재들은 사례나 실례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맛을 보려 하면 알 수 없고, 알려 하면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지식이 있고, 그 경험 바깥에 있는 동안에는 놓칠 수밖에 없는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대상과 분리됩니다. 맛보고, 만지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때 우리는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명료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많이 분리됩니다. 실재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부부관계를 하는 순간에 쾌락을 조사하거나 회개하는 동안 회개를 연구할 수는 없고, 폭소를 터뜨리면서 유머의 본질을 분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3)

루이스는 이 비극적인 딜레마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이 신화라고 말한다.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추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하는 상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프시케 이야기도 그런 위대한 신화의 하나라고 본 것 같다. 앞에서 루이스가 프시케 이야기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이면을 파고든다”라든가 “아풀레이우스는 이 이야기의 창작자가 아니라 전달자”라고 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가 “구체적인 상황에 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어떤 실재를 전달하고 (한편으로는 가리고) 있으며,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비틀어 바로 그 실재를 밝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화의 유용성 2

『순례자의 귀향』에서 루이스는 지주님(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신을 알리신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하나는 이교도들에게 준 그림(신화)이고, 또 하나는 목자들(이스라엘)에게 준 규칙(율법)이다. 그런데 그림도 반쪽짜리고 율법도 반쪽짜리라고 한다. 그래서 지주님의 아드님(그리스도)이 오셔서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셔야 했다.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도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정말 선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6주 정도 힘껏 노력해 보면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5) 율법의 한계가 구원사적으로 드러났다 해도,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율법의 한계와 가치를 오롯이 경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 율법을 모르는 자는 복음의 능력도, 복음이 주는 자유도 은혜도 모르는 법이다. 신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부분에서는 루이스 본인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루이스가 유신론을 받아들인 후 일 년이 넘도록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은 기독교 교리(희생과 대속)의 의미를 알기 어려워서였다. 그는 “2000년 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생애와 죽음이 지금 여기서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자신이 “신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자신에게 바친다”는 희생 개념을 이교 신화에서 만나면 감동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톨킨 등 친구들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 개념도 사복음서 이외의 다른 곳에서 만나면 감동을 받았다. 그런 신화들을 접할 때는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의미를 암시하는 심오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리스도 이야기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신화임을 깨달았다.6)

기독교의 핵심은 사실이기도 한 신화입니다. 죽는 신을 다룬 옛 신화가 여전히 신화인 채로 전설과 상상의 하늘에서 역사의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 일은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장소에서 벌어지고, 정의할 수 있는 역사적 결과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언제 어디서 죽는지 아무도 모르는 발데르나 오시리스 같은 신을 지나 (모두 순서에 따라)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역사적 인물에게 이릅니다. 그것은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합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버린) 그 신화 또한 받아들여야 합니다.7)

적어도 루이스에게 있어서 신화를 받아들이고 그 매력에 빠지는 경험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준비 과정이 되어주었다. 그처럼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대하듯’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기독교의 메시지에 담긴 매력과 힘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정답으로 ‘주입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이전의 모든 신화를 완성하고 “이전의 모든 신화적 종교들을 온전히 구현하는” 신화로서의 기독교를 볼 수 있다면,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를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그가 그것의 매력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거부할 여지는 줄어들 것이다.

사실, 율법이나 신화만이 아니라 그 외의 많은 면에서도, 모든 세대, 모든 개인은 진리를 새롭게 재발견해야 한다. 선대에 밝혀지고 드러난 ‘정답’을 후대가 그대로 물려받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역사가 되풀이되고 오류가 반복되고 깨달음과 재발견이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루이스가 남긴 말에 많이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건, 너무나 오래되고 단순해서 말로 풀어놓으면 시시하고 뻔한 소리처럼 들리는 진리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지 싶네.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진리들은 실제로 가르칠 수가 없고 각 세대가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거라네.8)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지금까지 신화 다시 쓰기라는 이 소설의 형식을 주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이 소설 자체를 짧게 이야기해 보자. 이 소설은 신화를 매개로 여러 주제를 구현해 낸다. 여기서는 긴밀히 이어져 있는 세 가지만 생각해보자. 사랑, 자기 발견, 그리고 신과의 만남이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하고 대단히 보인다 해도 인간의 사랑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오히려 “사랑이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시작한다.”9) 인간 사랑의 한계에 대한 발견과 좌절은, 프시케의 언니 오루알이 자신의 추악함을 발견하고 자기 부인을 거쳐 마침내 또 하나의 프시케로 신 앞에 서는 과정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분석하는 과정에서 오루알의 경험에 참여하는 독자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말로 표현하면 얼마나 뻔하고 진부해 보이는지!)

소설의 화자는 프시케의 첫째 언니 오루알이다. 원작 신화의 언니와 달리, 그녀는 동생이 사는 아름다운 궁전을 목격하고 질투에 부들부들 떨지 않는다. 프시케를 사랑하고 프시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엄마 같은 큰언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궁전이 보이지 않는다. 신의 궁전에서 행복하게 사는 (그렇게 주장하는) 프시케를 오루알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고,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동생을 되찾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프시케를 독점하려 하고, 원작의 언니와 다른 차원에서, 어쩌면 더욱 심각한 질투를 드러낸다. 그리고 찾아오는 파국.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부는 신들에 대한 고소장이다. 오루알은 못생긴 얼굴 때문에 아버지의 구박을 받던 자신의 유일한 기쁨 프시케를 빼앗아간 신, 프시케에게만 자신을 드러내고 오루알에게는 드러내지 않아서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신, 결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불공평한 신들에 대해 고소장 끝부분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신들은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2부에는 깜짝 놀랄 반전이 기다린다. 그녀가 아끼고 사랑했던 충신 바르디아가 죽은 후 그의 아내 안싯을 위로하러 간 자리에서, 자신이 “상대방의 것을 전부 차지하려 들고, 그를 갉아먹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안싯은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흥! 배부르시겠어요. 다른 남자들의 목숨도 삼켰으니. 여자들의 목숨도 삼키고. 바르디아와 내 목숨, 여우 선생의 목숨, 동생의 목숨, 두 동생의 목숨 다.” 이 소설은 많은 부분 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에서 다룬 사랑을 깊이 있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애정, 우정, 에로스의 영광과 실패를 드러낸다. 프시케가 구현하는 아가페 사랑도.

프시케는 신의 신부다. 신의 사랑을 받는 프시케와 그녀를 빼앗아 간 신을 질투하는 오루알. 그리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과 갈등. 프시케를 협박하여 자기 뜻을 관철한 오루알은 웅깃을 섬기는 글롬 왕국의 자연종교도, 그리스의 이성적 철학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제 프시케는 유배당하리라.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며 고된 길을 걸어가리라. 내가 대신 싸워줄 수 없는 것들이 멋대로 그를 휘두르리라. 여자여, 너는 너 자신과 네가 한 일을 알게 되리라. 너 또한 프시케가 되리라.” 이후의 내용은 신의 이 말이 그녀의 인생에서 이루어져 가는 흥미진진한 전개와 발견의 과정이다.

자신이 믿지 않았던 신의 존재를 발견한 오루알은 자신이 신의 미움을 받았으니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게 된다. 이후 그녀는 줄곧 베일을 쓰고 산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한 조치다. 그녀가 글롬의 여왕이 되어 국사에 몰두하면서 그녀 안의 오루알은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도 그녀가 여왕의 역할과 지위와 일로 자신을 채우고 자신은 잃어가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그녀는 “네가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들과 얼굴을 맞대겠는가?”라는 신의 반문과 함께 결국 자기 얼굴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것은 이야기 속 오루알만의 여정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외면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과업이고 숙제라고 할까. 루이스는 그 여정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1)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은 다음과 같다: 『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홍성사 역간).

2) C. S. 루이스, 『기적』, 이종태 옮김 (홍성사), 265쪽.

3) C. S. 루이스, 『피고석의 하나님』, 홍종락 옮김 (홍성사), 72-73쪽.

4) C. S. 루이스, 『순례자의 귀향』, 홍종락 옮김 (홍성사), 219-220쪽.

5)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 이종태 옮김 (홍성사), 222-224쪽.

6) C. S. 루이스, 『당신의 벗, 루이스』, 홍종락 옮김 (홍성사), 48-49쪽,

7)『피고석의 하나님』, 73쪽.

8)『당신의 벗, 루이스』, 84-85쪽.

9)『네 가지 사랑』, 이종태 옮김 (홍성사),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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