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는 것’으로 된 이유는 복음의 이 양면성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를 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부활 주간을 앞두고 부활절 공동체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믿는 부활의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잘 드러내는 책 몇 권을 유형별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본문 중)

정지영(IVP 기획주간)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는 것’으로 된 이유는 복음의 이 양면성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를 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부활 주간을 앞두고 부활절 공동체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믿는 부활의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잘 드러내는 책 몇 권을 유형별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인간은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 존 스토트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유일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활의 역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되어 왔고, 많은 이들에게 부활이란 주제는 수호하고 변증해야 할 기독교 진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부활의 의미보다는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재확신하는 데 집중한다.

프랭크 모리슨의 『누가 돌을 옮겼는가?』(생명의말씀사)는 이런 변증 도서들을 대표한다. 부활의 허구성을 증명하고자 펜을 들었던 당대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성경과 역사를 파고들수록 부활이 진실성이 더 선명해지는 걸 경험하고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더 유명한 이 책은, 부활 변증서의 표본으로 오랫동안 읽혀 왔다. 이후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하는 책들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활 논쟁』(IVP)은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게리 하버마스와 유명한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앤터니 플루가 부활의 역사성을 놓고 현장에서 벌였던 매우 치열하면서도 우정 어린 논쟁을 지면에 그대로 담은 책이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부활에 관한 신학적, 철학적 이해의 다양함과 깊이를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때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앤터니 플루가 기독교 유신론으로 나아가는 신앙 여정을 엿볼 수 있다.

『예수 부활 논쟁』(새물결플러스)은 앞의 책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책이다. 『부활 논쟁』이 변증에 방점을 두었다면, 『예수 부활 논쟁』은 제3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주도하는 대표적 기독교 성서학자 톰 라이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소위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입장에서 부활의 역사적, 주해적, 신학적 근거와 의미를 펼쳐낸다. 그리고 권위 있는 다수의 성서학자들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논쟁에 참여해 두 견해의 장점과 난점을 평가하고 해설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역사성과 신학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예수의 부활』(새물결플러스)은 부활에 관한 기존 변증 방법을 성찰하는 책이다. 신약성서학자이자 변증가인 저자 마이클 리코나는 기존의 신학적 변증 방식의 흐름을 개관하고 이러한 방식으로는 바트 어만, 게르트 뤼데만, 존 도미니크 크로산 같은 이들의 도전에 응전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역사학계의 방식인 역사 기술 접근법을 적용해 부활의 역사성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불가지론, 회의론, 환영 가설 등을 포함한 반대 주장을 철저하게 반박한다.

 

 

부활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부활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부활의 역사성을 적극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이 우리의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경 드라마에서 십자가의 중심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구원 역사가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마이클 램지의 말처럼 “부활이 없는 복음은, 복음의 마지막 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음 자체가 아니다!” 즉, 십자가만큼, 어쩌면 십자가보다 부활이 더욱더 기독교 복음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십자가만 아니라 부활을 함께 가르치고 선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부활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졌던 제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교회로 탄생시킨 하나님의 결정적 사역이다. 부활은 기념함으로써 기억하고,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야 할 신앙 내용이다.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IVP)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기독교의 소망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을 통해, 부활절 아침에 비어 있던 예수의 무덤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톺아본다. 톰 라이트는 이 작업을 통해 현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죽음 이후의 삶’으로 왜곡되고 오도되어 있는 오늘날의 부활 이해를 교정한다. 그에 따르면, 부활은 ‘육체의 일’이다.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이나 죽음을 면하는 것이나 사후에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할 실재인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살라』(IVP)에서 톰 라이트와 동일한 메시지를 그와는 사뭇 달리 훨씬 실천적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이 우리의 현실과 만났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일상의 언어로 탁월하게 풀어내어,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잊힌 부활 신앙을 다시금 우리 신앙과 삶의 한가운데로 소환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결국 부활 신앙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456쪽에 이르는 이 책의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150쪽 조금 넘는 같은 저자의 『일상, 부활을 살다』(복있는사람)을 읽는 것으로 대신해도 된다. 팀 체스터의 『십자가와 부활을 사는 일상 영웅』(IVP)도 십자가와 부활이란 성경 패턴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는지를 설명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살아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좋은 책이다.

로완 윌리암스의 『삶을 선택하라』(비아)도 꼭 챙겨야 할 책이다. 부활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부활을 십자가와 연결하는데, 캔터베리 대주교 당시 했던 이 설교 모음집은 부활을 성탄과 묶는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분의 형상인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이에 관한 모든 생각의 풍경을 바꿔 놓은 결정적 사건이다. 탁월한 설교가 언제나 그렇듯 성경 본문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상황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책 안에 잘 녹아 있다.

 

 

잊힌 성토요일의 신학 찾기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부활절만이 아니라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있는 성토요일도 잊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는 아무 날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성토요일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날 정도로 간과한다. 성토요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토요일에 예수님은 음부로 내려가신 걸로 이해한다. 성토요일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예레미야애가』(IVP)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그분의 오른손과 강한 팔로 영광스러운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시지 않은 ’죽음의 시간‘이었다. 그날은 세상의 눈에는 죽음의 권세 아래로 들어간 패배의 시간으로만 보이지만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만 그치는 것일까?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극복한 승리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지위에 참여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성급히 나아가려 하지만, 성토요일은 패배주의자와 승리주의자 모두를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사역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토요일의 신학을 다룬 책은 우리 주변에 많지 않다. 부활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한국기독교연구소)는 성토요일 주제를 통해 우리의 죽음과 부활 이해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저자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재고하고, 이를 트라우마, 고통에 대한 이해와 통합하는 구원 이해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 신학의 십자가 해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이 필요하다는 희생/죽음 중심의 구원 이해를 만들고, 전통적 부활 해석은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 교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만을 주목하며 고통에서 탈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해 희망과 성공을 쉽게 약속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른 한편으로 궁극적으로 승리에 대한 보장이 없는 트라우마의 끈질긴 고통을 외면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저자는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제시하는데, 부활에 대한 좀 더 깊은 논의를 구하는 독자들이라면 찾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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