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결코 ‘어떤 날’이 중요하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날이 다 거룩하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는 것은 단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유대교식 안식일 규정을 넘어섰다. 그들은 먼저 날(Day)에 대한 규정을 바꾸었다. 이스라엘 특유의 날을 세는 방식을 따라 7번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지키던 것을 바꾸어, 주간의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을 모임의 날로 규정했다. 이날 이들은 모여서 “떡을 떼었다.” 이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듯 아무것도 안 하는 날로 지킨 것이 아니라, 모여서 공동 식사를 하며 집회를 열었다. 굳이 집회라고 하는 것은, 이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형식이 갖추어진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여서 식사를 나누고, 복음을 나누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겠지만, 적어도 안식일 규정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 크게 달라졌다. 이는 기독교도 유대교의 확장이라고 이해했던 유대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대놓고 ‘개’(dog)라고 칭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과 교제하는 것까지도 허락했는데, 이제 이들은 이 영광을 버리고 떠나버리려 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안으로 이방인들을 초대했으나 그들이 이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았다. 언약 백성이 보기에는 구원받은 삶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 규율의 준수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이 있었다. 첫째로,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이스라엘 안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로마 제국 안에 있었다. 즉 유대적 규율을 지킬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아니었다. 둘째로, 이들은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공동체마다 유대인과 이방인, 또는 현지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 구성 비율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이방인들 가운데 있던 유대인 공동체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이들은 로마의 제도 안에서 구분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런 구분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유효하지 않았다. 당연히 헬라인의 개념은 없었고, 여자는 숫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종의 제도는 있었지만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제도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특정 민족이나 계급, 계층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결국 새로운 규율이 필요했다. 당시의 개념에서 전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율이 필요했다.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유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 유럽을 거쳐 당시 제국의 심장이었던 로마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 시대로서는 ‘세계의 모든 곳’이었다. 지금도 세계는 지역마다 완연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교통도 드물고, 소통의 도구도 없었다. 즉, 각 지역들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세계들이었다. 더군다나 이 가운데 속한 구성원들조차 너무나도 다양했다. 종과 자유인이, 유대인과 헬라인이 같아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제 교회로 모인 그들 모두가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규율이 있어야 했다.

당시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물리적 거리로 인한 문화 차이와 공동체 내의 계급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데 이 모든 장애를 넘어서 함께 지킬 수 있는 규율이 새로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자리를 유대적 규율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선포한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규율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단 하나의 전제 조건만 남게 되었다. 예수 믿는 것,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다 배설물이 되었다. 이제 바울은 이 자유를 선언하고, 신학적 설명을 이어간다. 그 가운데 안식일 규정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의 서신서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골로새서 2장과 로마서 14장을 살펴보자.

골로새서 2장의 주요 내용은 골로새 교회를 침범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이다. 거짓 가르침은 “규례에 순종하며”(20)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22)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6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경고한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의를 한 바 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행 15:20)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가장 최소한의 의무라도 지라고 했지만, 아마 이러한 것은 그렇게 명쾌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바울의 편지에서 이러한 내용이 반복된 적은 없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이 언급된다. 확실히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특정한 날에 대한 규율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안식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바울은 이러한 절기 등에 대해서, 복음이 주는 자유로 해방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절대적인 선포를 한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결국,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는 일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어디까지 할 때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율법이 존재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안내해 주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 자체가 신앙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그 율법을 지킬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 신앙으로 간주하는 경우들이 있다.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울은 그런 규례들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너희가 그렇게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그 금령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걸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 실체가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가 그의 몸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는데, 왜 굳이 그 그림자를 보며 그리스도를 상상하겠는가. 규례를 지키는 것은 바로 손에 잡히는 신앙인 것 같다. 마치 그것만 행하면 우리의 신앙이 완벽해지는 것 같다. 손쉬운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임을 밝히셨던 그 말씀(마 12:8; 눅 6:5)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눈을 열고 실체를 보아야 한다. 마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12)라고 하신 바와 같이, 그림자를 통해 희미하게 실체를 그려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로마서 14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좀 더 명확하게 안식일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것은 날에 대한 규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이다.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이 주는 자유’의 원칙이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날에 관한 규례를 먹는 것에 대한 규례와 함께 다룬다. 음식에 관한 질문을 요약하면, ‘코셔 음식2) 외의 것을 먹어도 되는가’라는 것이다. 특히, 고기 먹는 규례는 간단하지 않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들 특유의 고기를 다루는 법이 있다. 그런데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들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제단에서 도축된 고기들은 당연히 시중으로 나와 신전의 재정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기에 디아스포라 상황 속에 있는 유대인으로서는 고기를 먹는 것이 이중, 삼중으로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규례를 존중했던 사람들은 고기 자체를 안 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인도 고기를 거부해야 하느냐’이다.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유대적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철저한 원칙에 자부심을 가지고, 아니 자부심을 넘어 교만함으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은 공동체에서 다툼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바울은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자들이고, 채소만 먹는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한다. 우리의 상식은 거꾸로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쳐서 규례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을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왕의 식탁에서 나오는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으면서도 그 얼굴이 더 빛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증거를 찾는 이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이다. 그런 음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우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믿음이 강한 자들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라고 선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우리의 논지로 돌아오면,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은 아니다. 정해진 그날이 다른 날에 비하여 더 거룩한 날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주를 향해 지닌 마음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이어서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한 우리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담기 위해서 그 날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이 아니라 ‘모든 날’이 우리가 주를 위해 드려야 할 날이다.

독일 교회의 예배당에는 피아노가 없다. 독일 교회의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한인 교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어떻게 예배당에 피아노가 없을 수 있을까. 신학을 공부하며 알게 되었는데, 독일 교회, 즉 루터교회에서는 규례에 따라 예배당에 피아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예배당을 지을 때 악기는 파이프오르간이어야 한다는 규례가 있다. 예배당 건축의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피아노는 배제되었다. 피아노는 거룩한 악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피아노에 익숙한 한인 교회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옛날에는 본당에서 통기타를 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다녔던 장로교회는 그러했다. 세상의 가수들이 치는 딴따라 악기를 예배당에 들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의 예배가 이루어지는 교육관까지는 기타 사용이 허락되어도 본당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90년대가 지나고 필자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많은 교회의 본당에 드럼이 있었다.

여기서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어떤 악기가 거룩한가? 파이프오르간, 피아노, 통기타, 드럼, 전자악기 등 여러 악기 중에 어떤 것까지 예배당에서 허락이 될까? 악기가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지 않는다. 그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악기를 들고 가요가 아니라 찬양을 연주할 때 그것이 거룩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결코 ‘어떤 날’이 중요하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날이 다 거룩하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는 것은 단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 날을 지키는 것으로 증거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얽어맴으로써 신앙으로 인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은 명확하다. 이 대전제 아래, 이제 모든 것에서 우리는 자유하다. 그래서 안식일을 벗어나 ‘주간의 첫날’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 주는 자유’의 가장 큰 증거 중 하나이다. 이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1) 정장복은 그의 책 『예배학 개론』(예배와설교아카데미)에서 예배의 역사를 다루며, 초대교회의 예배가 말씀과 성찬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2) 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식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한 음식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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