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의 본질은 누가 더 많이, 더 희한한 음식을 먹느냐가 아니다. 누가 나에게 마주 앉아 밥 먹는 느낌이 들게 하는가이다. 나는 오랜만에 문성해의 시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를 읽는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에겐 시가 먹방인 셈이다. 그리고 시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비밀이 있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몸살이라도 걸렸으면 하는 때가 있지만 절대로 아파서는 안 되는 때가 있다. 수능이나 입사 시험 혹은 회사에서 중요한 발표를 앞뒀을 때이다. 그래서 다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는가 보다. 한데, 이런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사람이 있다. 시인 문성해는 그런 느낌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라는 시에 담았다.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한번 먹자’는 우리가 흔히 하는 거짓말이다.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은 이 말을 듣고 전화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 말은 빈말이 아니라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에선 맥락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친하지는 않아도 모른 척하기는 어려운 사이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밥 한번 먹자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정말 기적처럼 밖에서 만나 밥을 먹게 되면 진지해진다. 그 어색함에 빈 잔의 물을 들이켜고 자꾸 헛기침하게 된다. 시인이 경험했을 그 어색한 느낌을 나는 서유미 작가의 소설집 『당분간 인간』(창비)을 읽다가 느꼈다. 이 작품은 직장인들이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판기 커피의 양은 초면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기에 적당했다.

 

자판기는 지금은 보기 드물다. 하지만 예전엔 초면인 사람과 만날 때 자판기를 이용했다. 커피양은 종이컵 절반쯤 되었다. 이 양은 5분에서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며 마시기에 적당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판기가 사라지고 나니 어색함을 감출 방법이 여의치 않다. 그래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시인은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 말이라도 없었으면 사람살이는 더 팍팍했을 것이다. 이제는 가족이어도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일이 쉽지 않다. 나도 시나 소설 속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다들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소비되고 소모되는 삶.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한번 밥이나 먹자.’ 통화 끝에 인사말처럼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냥 끊기가 뭐해서 붙이는 말이란 걸 안다. 어쩌다가 밥 먹자는 게 그냥 인사말이 됐을까? 그 이유는 우리말이 서양과 달리 고맥락 문화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고맥락 문화는 농경사회나 집단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언어습관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주어 탈락이다. 한국어는 이를 문법적으로도 허용한다. ‘밥 먹자’고 말하면 듣는 사람이 뭘 뜻하는지 맥락을 통해서 판단해야 한다. 고맥락 문화에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안 된다. 실제로 솔직하게 말하면 상처를 받는다.

반면 저맥락 문화는 다르다. 문자 그대로가 중요하다. 유목 사회나 미국 같은 다인종 국가에서 나타난다.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 밧줄이 목에 걸린 상황에서도 말이 많다. 투머치 토커가 많다. 상대방이 나의 사정을 모를 것이라는 가정을 하기에 설명을 꼼꼼히 한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대화에 쓰는 평균 시간이 7시간이다(일본은 3.5 시간).

 

 

이것은 그림과 시에도 나타난다. 동양에선 여백의 미가 중요하다. 선시나 하이쿠1)는 짧다. 도자기도 안이 비어 있고 동양화도 여백을 둔다. 반면 1866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바친 월트 휘트먼의 시 「오 캡틴, 마이 캡틴」(O Captain! My Captain!)이나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낭독한 어맨다 고먼(Amanda Gorman)의 축시는 길다.

고맥락이나 저맥락 둘 중 어느 쪽이 좋다고말 할 순 없다. 한국 생활 11년 차인 타일러 라쉬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마음에도 없는 친한 척을 한다. 일본에서는 음식이 맛없어도 ‘다이조부’라고 말한다. ‘괜찮다’는 뜻이지만 거짓말이다. 가나에선 못생긴 여자에게 예쁘다고 하면 버럭 화를 낸다.

우리가 쓰는 ‘밥 한번 먹자’는 말도 정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하는 말이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서로가 느끼는 삶의 본질은 맞닿아 있다. 헤밍웨이나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가 ‘소설이 그리는 세상이 어떤 현실보다 진실하다’고 주장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생각을 작가는 글로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으며 사람을 배우고 시를 읽으며 통찰을 배운다. 소설책을 펴면 거기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보며 밥 한번 먹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삼시세끼, 윤스테이 같은 음식 예능을 찾아보고 먹방을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외롭기 때문이다. 대리 체험이나마 함께 먹는 느낌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먹방의 본질은 누가 더 많이, 더 희한한 음식을 먹느냐가 아니다. 누가 나에게 마주 앉아 밥 먹는 느낌이 들게 하는가이다. 나는 오랜만에 문성해의 시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를 읽는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에겐 시가 먹방인 셈이다. 그리고 시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비밀이 있다.

 


1) 일본 고유의 운율이 있는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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