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영광』(김연수 역, 열린책들)은 영국의 가톨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의 대표작이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반가톨릭 성향의 주지사가 다스리는 멕시코의 어느 주. 주인공은 가톨릭을 박해하는 공권력에 쫓긴다.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고 다른 사제들은 처형되거나 달아났거나 배교한 가운데, 신자들 곁을 지키며 그 지역에 남은 유일한 사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신심이 깊은 모범적 사제일 것 같지만, 그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아이도 하나 있는 타락한 사제다. 그런데 그런 타락들은 모두 신자들 곁에 남는 영웅적 선택 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남았을 뿐, 쓸모없는 인간

 

『권력과 영광』(김연수 역, 열린책들)은 영국의 가톨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의 대표작이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반가톨릭 성향의 주지사가 다스리는 멕시코의 어느 주. 주인공은 가톨릭을 박해하는 공권력에 쫓긴다.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고 다른 사제들은 처형되거나 달아났거나 배교한 가운데, 신자들 곁을 지키며 그 지역에 남은 유일한 사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신심이 깊은 모범적 사제일 것 같지만, 그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아이도 하나 있는 타락한 사제다. 그런데 그런 타락들은 모두 신자들 곁에 남는 영웅적 선택 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우선, 그가 한때는 야심이 있던 사제임을 지적해야겠다. 한때 그는, 도시로 진출할 욕심으로, 빚을 잔뜩 지고라도 교회 일을 크게 벌일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빚은 후임 사제가 갚으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가 사제로서 바라는 그림, 그의 사제 경력을 통해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날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신자들 곁을 지킴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 했다. 다른 사제들이 다 떠난 자리를 남아서 지키는 “홀로 청정한” 사제의 이야기. 당당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규율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뜻대로 근사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공권력에 쫓기고, 그를 색출하기 위해 다른 신자들이 끌려가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신자들에게 위협이 된 것이다. 그는 결국 그를 추적해온 경위가 놓은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잡히는데, 감옥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신부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경위가 그에게 묻는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는데. 다른 놈들은 모두 도망쳤는데, 그중에서 왜 하필이면 당신이 남은 거지?”

 

사제가 대답한다.

 

“언젠가 나도…나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지.…사람한테는 느닷없이 두 개의 길, 선행의 길과 악행의 길이 제시되는 게 아니오. 서서히 휘말리게 되는 거지. 처음 1년은,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쳐야만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소. 그즈음 성당은 불타고 있었지.…어쨌든 난 다음 달까지만 버텨 보자, 혹시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니까. 뭐 그 정도 생각이었지. 그랬던 것인데, 아, 시간이 얼마나 유수처럼 지나가던지.…그러다 갑자기 돌아보니 주변 몇 십 마일에 남은 사제라고는 나 혼자뿐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는 거 아시겠소?”

 

여기서 그가 원래 그리던 이야기는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고백.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라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제 이야기를 꺼낸다. 심지가 곧지 못하다고 그를 나무라던 사제. 그런데 그 사제는 도망쳤다. 그리고 남은 그는 망가졌다. 신경 쓰이는 인물이 없어지니 방종해진 것이리라.

 

“그 사제가 옳았소. 그가 떠난 뒤로 나는 엉망이 됐소.…술을 마시기 시작한 거요. 지금은 나도 같이 도망치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오. 그때는 자만심이 너무 컸던 게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없었고.…다른 사제들은 다 떠났는데도 나는 남아 있으니 홀로 청정하다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건 나는 당당한 사람이니 스스로 규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소.…그러다가 하루는 술에 취해, 너무 외로워서…아이를 가지게 됐소. 바로 그런 것들이 모두 나의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지. 여기 있었기 때문에 생긴 자만심. 나는 남았을 뿐, 쓸모없는 인간이라오.…떠났더라면…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했을 텐데.”

신자들 곁에 남는 용감한 선택을 내린 홀로 청정한 사제의 이야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만심 때문에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선택을 내렸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는 남았지만 그 행동만 빼면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괴로움이다.

바른 길,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에 내가 어떻게 나올지, 나의 어떤 모습이 드러날지 알 수 없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았던 염석진 역할을 보며 나는 무서웠다. 그가 용기 있는 사람 흉내를 내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평범한 사람으로 얌전히 살았다면, 그렇게 많은 해악을 끼치고 추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비겁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새로운 시도, 모험은 그런 것이 아닌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 결혼도 그렇고 아이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다.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고 맡는 데는 이런 요소가 다 있다.

과연 이 사제의 ‘용감한’ 선택의 동기가 불순한 것이기만 했는지, 그럼 남들처럼 도망갔어야 맞는 것인지 등의 문제는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어쨌든 종교적으로 큰일을 이루어서든, 용감한 선택을 하는 것으로든,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서든, 자신의 이야기가 무너지는 그 과정은 그가 자신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은혜를 구할 기회가 된다. 이제 그 얘기를 해보자.

 

ⓒ열린책들.

 

그래도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

 

다음날 처형을 앞두고 사제는 혼자 감방에 남겨졌다. 그의 곁에는 경위가 마지막 배려로 남겨준 브랜디 병이 놓여 있다. 고해 성사를 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해 성사를 들어 주고 죄 사함을 선언하지만, 그의 고해 성사를 들어줄 사람은 없다. 어쩌겠는가. 그는 술을 들이켜며 ‘개신교 스타일의’ 회개를 시도한다.

 

“저는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일 뿐 의미 없는 말에 그친다. 그의 아이가 다시 떠오른다.

 

“아, 하느님, 그 애를 보살피소서. 저를 벌하시면 마땅히 받아들이겠사오나 그 아이만은 행복하게 하소서.”

 

그러나 사제는 이것이 모든 사람을 향해 품었어야 할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을 애써 떠올리고 “그들 모두를 보살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전히 딸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에 그가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주제는 딸 뿐이었다. 또 실패.

 

“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 교만의 죄를 저질렀으며 자비를 알지 못했습니다.”

 

말들은 다시 형식적으로 바뀌었고, 의미가 사라졌다. 소설의 화자가 말한다. “판에 박힌 말들이 아니라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고해 신부가 그에게는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참된 회개에 실패한 사제는, 자신이 내놓을 것이 있는지 따져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도 자신을 바칠 영혼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제가 한 일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자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상태는 비참하다. “그를 위해 죽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야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보냈어야만 했는데.” 그리고 다시 돌아온 사제의 생각. “고작 파드레 호세(배교하고 결혼한 다른 사제)와 나라니.” 그리고 그는 끝끝내 절망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친 마당에 자기만은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다니, 그 얼마나 멍청한 일이었는가. 나란 인간은 얼마나 구제불능인가.…얼마나 쓸모없는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구나.”

 

그리고 이 대목에서 저자는 굳이 화자의 입을 빌려 사제의 생각을 이렇게 ‘추측’한다. “아마 그 순간 그가 겁낸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아무런 일도 한 것 없이 빈손으로 하느님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좌절로 다가올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라는 것, 그건 바로 성인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타락한 사제였고, 그 점을 괴로워하면서도 사제로서의 역할이 요청될 때는 꾸역꾸역 그 일을 감당했다. 그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그가 사제로서 감당하는 모든 일은 효력을 발휘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것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정통적인 믿음이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 ‘도나투스파’라는 이단이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 행위가 부정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반대의 문제점이 따라올 수 있다. 메신저의 행태가 메시지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게 만들 가능성이다. 이런 사례는 널리고 널려서 따로 거론할 것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는 자신이 사제로서 감당하는 역할 자체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고,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그 일을 감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교회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본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할 수가 없다. 회개도 여의치가 않고, 내놓을 것도 없다. 애초에 그가 성인이라면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인이 아니고, 단시간 내에 성인이 될 가능성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하고도 중요한 것은, 그가 솔직히 인정하는 부족한 모습과 절망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철회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모든 고민과 절망은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잡히기 직전까지 그는 막막한 상황,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선택을 했다. 아니, 소설 전체가 그가 온갖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어김없이 한 방향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냈다. 그는 신자들 곁에 남는 선택을 통해 폭로된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 자신이 낳은 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 이런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에 따라오는 온갖 고민과 절망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꿋꿋이 사제로서 살아갔다. 사제로서의 역할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 사이의 갈림길에서 어김없이 ‘사제의 길’을 선택했다.

기존에 사제로 써나가던 이야기가 다 어그러진 절망적 상태에서도, 사제로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그의 선택을 미심쩍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가톨릭교회라는 ‘제도’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다. 스스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 연약한 종교인이 교회라는 ‘시스템’에 기대어 살길을 도모하는 나약함을 보여줄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제도와 매체들은 그 자체로 절대화되거나 우상화되어 하나님을 오히려 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탈출의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사제직에 충실하려는 모습은, 초심을 잃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애초에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이 순수한 믿음의 발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사제 역할에 끝까지 충실하려는 그의 노력을 신자로서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의 행태는 복음서에 나오는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는 외침을 가톨릭 사제 스타일로 번역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부족함을 절절히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절망을 고스란히 껴안는 자세와, 그러면서도 자괴감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명에 충실한 모습의 공존. 여기서 나는 한없이 추락하는 개신교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야 하는 모든 개신교 신자의 부담과, 그가 그래도 감당해야 할 역할이 겹쳐 보인다. 어디 신앙의 문제뿐이겠는가. 우리가 이미 수없이 실패하고 부족함을 드러내어 자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역할들, 부모나 자식, 교사, 어른,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역할들도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그 길로 꾸준히 걸어가라고 사제는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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