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혼 증서 계명을 해석하시면서 예수님은, 남편은 아내가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아내를 버리지 말고, 아내는 남편이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반부는 당시 문화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버리는 데 어떤 합당한 조건이 있는지를 궁금해 했지만(마 19:3), 예수님은 그런 질문은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단호하게 질문 자체를 폐기하십니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또 이렇게 말해졌다. “누구든지 그의 아내를 내보내려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려는 모든 자는 그녀를 간음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보내진 사람과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게 된다. (마태복음 5:31-32)
아내를 내보내려 할 때 이혼 증서를 주라는 법은 신명기 24:1-4에 나옵니다. 이혼 증서는 쫓겨난 여자에게 재혼할 자유를 주는 증서입니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이혼 증서를 가진 여자는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으나, 재혼한 후에는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혼에 쌍방의 합의가 필요 없었고 재산권은 거의 대부분 남성에게 있었으므로, 쫓겨난 여인은 생계에 위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때는, 결혼 계약서에 따라서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여자가 가져온 결혼 지참금도 돌려주도록 했습니다.1) 그래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이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의 이혼 증서 법은 자주 오용되었고, 이 법을 핑계로 재산이 있는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로도 트집을 잡아서 아내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2)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행동을 하면서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의 오용을 피하려면, 성경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세의 법을 빙자하여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아예 금지하십니다.3) 그런데 한 가지 예외로서 음행이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이혼이 절대 불가한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4) 음행은 오늘날의 간통을 의미하며, 한쪽이 간통과 비슷한 수준으로 결혼 언약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깨뜨려 버렸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이혼이 최종적 선택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관계 안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있을 때, 교회는 신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도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음행은 죄이지만 이혼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며, 사회적 낙인을 받아야만 할 일도 아닙니다.
이어서 나오는 표현은 조금 해설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려는 모든 자는 그녀를 간음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보내진 사람과 결혼하도 자는 간음하게 된다. (마태복음 5:32)5)
첫 번째 수동형 동사(“간음 당하게”)의 의미는 일어난 이 간음의 책임이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남자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결혼 언약을 파기하고 아내를 내쫓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의 본질이 결혼 언약의 파괴라면, 그 죄책은 원인 제공자인 남자에게 돌아가며 여인은 책임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어서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경우 그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간음의 죄책은 누구에게로 돌아갈까요? 모세의 법에 의하면 이혼 증서를 가진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간음의 책임도 첫 번째 남자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책임이 면제될 것이지만, 첫 번째 남편은 두 사람 분량의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아내를 내쫓은 남자는 두 사람 분량의 간음죄로 두 번 사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 증서 계명을 해석하시면서 예수님은, 남편은 아내가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아내를 버리지 말고, 아내는 남편이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반부는 당시 문화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버리는 데 어떤 합당한 조건이 있는지를 궁금해 했지만(마 19:3), 예수님은 그런 질문은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단호하게 질문 자체를 폐기하십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삼위일체적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 언약 관계는 서로를 자발적으로, 상호적으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관계입니다. 결혼 언약에서 사랑의 ‘자발성’이 사라지면 결혼은 아름다운 빛을 잃고 묶어놓는 사슬이 됩니다. 또, 각자 사랑을 받고자 요구하고 사랑의 양을 계산하며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결혼의 ‘상호성’은 금방 사라지고 결혼은 불평등하고 견디기 힘든 의무가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상대방을 먼저 자발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사랑의 상호성이 성취되며, 삼위일체 관계에서처럼 세 번째 실체가 나타납니다.6) 혼합되지 않은 둘이면서도 또 온전히 한 몸이 된 새로운 삼위일체적 존재 양식으로부터, 즉, 두 사람의 하나 된 사랑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밖으로 흘러나가는 생명수의 강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에서 흘러넘친 성령님이 두 분으로부터 나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따로따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결혼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을 닮은 삼위일체적 언약 관계입니다.
1) 스캇 맥나이트, 『하나님의 이야기 성경주석: 산상수훈』, 최현만 옮김 (에클레시아북스, 2016), 119.
2)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1988), 463.
3) 참조: “그러니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한 육체다. 하나님이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게 하여라”(마 19:6).
4) 참고로 바울 사도는 조건을 달아서 불신자와 신자의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전 7:15).
5) 이 구절에서 ‘간음하다’(모이큐오)라는 동사가 한 번은 수동태로, 한 번은 중간태로 쓰였다. 버림받은 여자는 ‘간음을 당하게 된다’(수동태). 또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게 된다’(중간태: 능동태와 의미가 유사하지만 약화 됨).
6)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낳으신 분’(성부)과 ‘태어나신 분’(성자)과 그리고 두 분을 하나로 묶는 ‘사랑’(성령)으로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6:7; 15:27, 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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