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삶을 품고 설명하는 이야기일수록 좋은 이야기이며, 우리가 낙태 서사에서 기대해야 할 것도 그런 이야기이다. 서사는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비껴서 서서히 다가가는 세련됨이 필요하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성경에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과연 비유로 말한다는 게 무엇인지 잘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비유는 예수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시라면, 예수님의 언어 또한 배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가 비유, 곧 이야기인데, 유진 피터슨은 『비유로 말하라』에서 이러한 이야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우선, 이야기는 듣는 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게 만들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동참시킨다. 나도 소설을 읽다가 밤을 새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무심하게 읽기 시작하다가 푹 빠져서는 작가가 짜놓은 이야기판에서 더 이상 무심한 독자가 되지 못하고 깊이 연루되어 버리곤 한다. 이처럼 이야기는 독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의 두 번째 특징은, 메시지를 정면으로 들이밀지 않으면서 서서히 비껴서 독자에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에서 비롯되는 즉각적 반응을 방지하고, 스테레오타입을 무너뜨린다. 독자 혹은 청자가 지레 방어막을 세우지 못하게 우회해서 다가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들에 대해서 피터슨은, 죽으러 가시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좀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언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덜 분명하고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언어를 사용하셨다고 말한다.
낙태 서사를 생각하면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마지막 부분이다. 피터슨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 틈에 있을 때 더 긴박함을 느끼고 언어도 더 강렬해지지만, 그러한 언어가 오히려 사람을 더 도구화한다고 말한다. 내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의 긴박함에만 온통 쏠려서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사람은 무시하고 비인격적인 반복 어구나 공식만 외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긴박함이 커질수록 들음의 관계는 위축되고, 결국 마른 뼈 더미의 죽은 언어만 양산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들은 마치 타락한 이방 문화에 둘러싸인 형국처럼 긴박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에 여성 운동이 이룬 성과가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고 느끼는 페미니스트 진영도 마찬가지의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언어를 사용하고 설교와 가르침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급급한데, 오히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가장 긴박한 상황에서 가장 여유로운 언어인 이야기를 택하셨다고 피터슨은 지적한다. 그것은 마치, ‘그래서 하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죄냐 아니냐’ 하며 빠른 답을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하는 태평스러움이다. 바른 답을 딱딱 찍고 옳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태평스러움은 죄악에 가까워 보이겠지만, 사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작은 자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심정일 것이다. 아군과 적군이 확실한 전쟁은 많은 사상자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야기의 언어, 이야기의 공간이 필요하다.
사실 낙태 이슈가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일면 곤혹스러운 일이다. 앞의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낙태는 곧 섹스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섹스보다 기도가 더 부끄럽고 사적인 일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에 벌거벗은 남녀가 뒹구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앉아 아무렇지 않게-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감상해도, 광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멸에 가깝다. 옛날 같으면 반대이지 않았을까.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19세기 영국의 배우 패트릭 캠벨 여사가 한 말을 빌려 섹스와 기도를 비교한다. 캠벨 여사는 공공장소에서의 진한 애정신에 대해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 안 한다. 다만 길거리에 지나가는 말들만 놀래키지 마라”라고 했다며, 파머는 기도 역시 말들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경건한 사람은 섹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극도의 금욕에서부터 요란한 기도까지, 경건을 자랑하는 방식은 많았다. 신적인 것들의 인간화를 대변하는 예수님이 ‘기도는 길거리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서 하라’고 하신 것은(마 6:5) 그렇게 경건을 전시하며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향한 뼈 있는 한마디이다.
하지만 기도는 그렇다 쳐도, 섹스는 원래 문 닫고 불 끄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가 공공장소로 나왔으니, 어떤 모양으로든 경건이 기독교인의 중요한 표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문을 더 붙잡고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럴수록 세상의 흐름과는 거리가 생길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처럼, 다르게 사는 것이 세상에 끼치는 선한 영향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처럼 다르게 사는 소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도 자녀가 16세가 되면 바깥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공동체에 남을지 떠날지를 선택하게 해 준다. 이러한 특수 공동체와 달리 교회는, 피터슨의 표현대로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를 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이다. 피터슨은 어느 날 여자 교인 하나가 자기를 찾아왔던 이야기를 한다. 여러 상담사를 거친 그 여자에게 누가 피터슨 목사를 소개해주면서 그를 한번 만나 보라 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대뜸 자신의 성생활부터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 듣던 피터슨은 당신의 성생활 말고, 기도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지금까지 누구를 찾아가도 다 성생활 이야기부터 물어보지 기도 생활 이야기를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내밀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길은 기도라고 믿어왔는데, 이제 우리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은 오직 섹스만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기독교 전통에는 기도 중에 뜨거운 오르가슴을 느낀 신비가들도 있으니, 이 두 가지는 사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굵직한 주제이므로 이 정도만 이야기하려 한다. 다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기독교인들이 현재 일어나는 문화적 변화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당혹스러움을 언급하고 싶어서이다. 특히, 인간과 짐승,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남녀가 아무 경계 없이 아무 데서나 엉키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던 유교 문화에서 자란 기독교인들에게 공공장소로 나온 섹스는 긴장을 일으키기 충분하다는 점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낙태 서사는 여러 층위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될 수 있다. 일례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프로라이프 소설은 낙태보다는 출산을 선택할 이유를 문학 서사를 통해 제시하는 한편, 이미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에게 치유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최근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일고 있는 프로라이프 수사학의 변화에 주목한 마거릿 D. 카미츠카(Margaret D. Kamitsuka)는, 낙태한 여성을 정죄하기보다는 여성과 태아 모두를 고려하면서 치유와 회개/회복의 길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낙태 서사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1) 특히 미국 사회에서도 낙태를 하는 과반수의 여성들이 낙태를 반대하는 진영에 있는 기독교인들인 상황에서, 낙태를 하는 여성들의 80% 정도가 목사나 교회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낙태 사실을 알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소설들은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그는 추정한다. 물론 이러한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프로라이프 입장이기 때문에 몇 가지 공유하는 주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임신한 여성들은 주변으로부터 낙태의 압력을 받으며, 낙태한 여성들은 심각한 심리적 영적 후유증을 겪으며, 낙태 클리닉은 돈 버는 데에 혈안이 된 곳이고, 낙태에 따르는 위험-불임이나 이후 임신에서의 유산 증가 등-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는 속설들이 그 세계에서는 유통되고 있다고 카미츠카는 주장한다. 즉, 전반적으로 낙태를 권하는 사회가 문제이며, 따라서 기독교인 여성은 출산을 택하는 도덕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암묵적 메시지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태 행위를 정죄하기보다는 낙태를 경험한 여성이 회개하고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성경의 근거 구절을 들이밀며 낙태를 반대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이러한 서사의 특징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물론, 처음부터 낙태가 죄라고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이 회개할 죄가 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교회로부터 그렇게 배워서 낙태 행위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공지영도 그렇게 고백했지만,2) 출산과 낙태를 다 경험해본 여성의 경우, 몇 달만 더 품으면 온전한 아기가 되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 행위는 그것이 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회한이든, 유감이든, 슬픔이든, 미안함이든, 마음에 이런저런 흔적을 남긴다. 그것을 잘 정리하고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은 중요하며, 그 또한 넓은 의미에서 회개가 뜻하는 ‘돌이킴’의 한 방식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처럼 ‘낙태는 곧 살인’이라는 공식이 영적 실천의 한 양상으로 토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낙태를 둘러싼 감정은 강한 죄책감보다는 출산하지 못한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더 가깝다. 한국의 경우 낙태에 대한 죄책감은 낙태 자체보다는 부적절한 성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기독교인 여성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한 경우, 부적절하다고 배운 성관계와 낙태에 대한 죄책감이 서로 분리되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있어 이후의 부부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첫 번째 글에서 논한 박완서의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에서, 강간의 폭력성이 상대적으로 묻힐 정도로 처녀가 섹스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유발하는 순결주의 성문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카미츠카가 논한 프로라이프 소설에서는 약혼자도 있는 여주인공이 강간으로 임신을 한 후, 자기 신앙 양심을 따라 아이를 출산하고 그 일을 통해 모두가 회개하고 회복되는 이야기인데, 이러한 낙태 서사는 일반 한국 문화에서는 물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낙태 대신 출산을 택하는 서사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한국 문화의 프레임 하나는, 공지영의 『착한 여자』(1997)가 보여주는 진보 정치의 프레임이다. 카미츠카가 논한 미국의 프로라이프 소설이 문학의 양식을 갖추면서도 복음주의의 언어를 쓴다는 점에서 문학과 종교적 변증의 경계를 오간다면, 공지영의 소설은 문단 작가의 문학 작품으로서 문학과 정치적 변증의 경계를 오가면서 교회 너머의 독자를 겨냥한다. 이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이 아이 하나를 낳고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한 후,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동거를 하다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후 주변의 압력에도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운동권 친구들과 함께 이혼 가정 아이를 돌보는 대안 가족 공동체를 꾸린다. 이들 그룹은 정상 가족 운동을 하는 강남의 중산층 여성들과 대립하는데,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진보 정치를 통해 남성도 함께 할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성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의 진보성은 운동권이라는 정치적 공간보다는, 여주인공의 과거 경력-이혼, 동거, 혼외 출산-을 문제 삼지 않고 오직 사랑 하나로 그녀를 택하는 상대 남자의 설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남자도 이혼 경력이 있지만, 둘 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처음부터 서로 연정을 품은 순수한 첫사랑인데 여러 가지 장애물로 맺어지지 못하다가 마침내 맺어진다는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의 각본 안에서 여자의 성적 과거(sexual history)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신경숙의 『깊은 슬픔』(1994)에서 그려지는 남녀 관계와 사뭇 대조적이다. 『깊은 슬픔』에서 여주인공은 과거에 사귀던 남자와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으로부터,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는 말을 듣고, 이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남편과의 단절된 관계에 절망하여 결국 자살을 한다. 읽은 지 20년이 넘게 지난 제법 긴 이 장편 소설에서 지금도 이 문구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즉, 여자의 과거는 흠이며, 그것은 절대로 남편이나 남편 될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사)친과 주고받았던 편지나 찍은 사진을 다 버리는 경우도 보았다. 요즘 여성들에게는 정말 감이 떨어지는 옛날이야기 같겠지만,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나 아내에 대한 보복 폭행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게 정말 옛날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러한 성문화 속에서, 성찰, 치유, 회복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낙태 서사를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탁월한데, 낙태를 옹호하지도, 누구를 특별히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치유와 성찰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낙태 서사는 여러 층위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될 수 있다고 했는데, 미국처럼 복음주의 문화가 분명한 곳에서는 앞서 논한 프로라이프 소설과 같은 경우, 문학적 가치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가치관과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특정 하위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라 인간 보편의 경험을 담는 좋은 이야기로서의 기능은 아무래도 약하다. 특히, 기독교의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가치가 배인 문학들에 대한 감수성이 창작 차원에서나 수용 차원에서나 아직 제대로 영글지 못한 한국 문화에서, 그와 같은 변증적 문학을 낙태 서사의 규범으로 삼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삶도 제한할 수 있다. 더 많은 삶을 품고 설명하는 이야기일수록 좋은 이야기이며, 우리가 낙태 서사에서 기대해야 할 것도 그런 이야기이다. 서사는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비껴서 서서히 다가가는 세련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참고할 수 있는 낙태 서사의 규범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되는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다”(시 139:13)와 같은 구절들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글에서 살펴보았듯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런 고백은 이미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 인생의 신비를 생각하면서 회고적으로 그 기원을 추적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낙태 대신 출산을 택하게 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낙태 통계도 말해 준다. 그것보다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더 참고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한국인들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지만, 그것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니라 제국의 총리가 된 구약의 요셉이다. 자기 아들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생각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붙여준다는 것은 그 인물처럼 되라는 염원이 담긴 것인데, 어떤 역경이 와도 끝내는 큰 사람, 즉, 제국의 총리가 되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 아마도 요셉일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요셉이 알파 메일(alpha male)이라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남성성이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데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키운 남성이다. 성경에서는 마리아의 첫 자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요셉도 천사를 통해 그렇게 듣고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만약 우리가 요셉과 천사의 그 대화를 모른다면, 요셉은 일반적 상식으로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것이다. 후대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알지만, 그를 키우는 요셉의 입장에서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는, 내 씨가 아닌 아이를 키운 셈이다.
앞에서 공지영의 소설이 운동권 친구들과 꾸리는 대안 가족을 제시했다고 했는데, 사실 대안 가족의 원조는 기독교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부계 혈통을 끊었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혈연 가족과 자신을 선택의 긴장 관계에 두었던 것도 기독교인에게는 혈연 가족 이상으로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남자의 정자 없이 태어난 예수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특수성이라면, 이러한 특수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연결 고리는 바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면 모든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관계에서 생겼건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수태고지를 받아들인 마리아의 능동적 수동성 옆에는, 마찬가지로 그것을 받아들인,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남성의 능동적 수동성이 있다.
이것을 좀 더 상황화해서 보자면, 만약에 내 아들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내 아들과의 사이에서 다른 아이를 더 낳지 않는다면? 물론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를 더 낳았지만, 요즘처럼 아이 하나 낳아 키우기도 힘든 사회에서 이런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한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더 힘들 것을 예상해서 그 아이 하나만 키우기로 할 수 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아들을 엄마들이 키우고, 아들이 그런 선택을 할 때 엄마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요셉은 오직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밖에 없고, 여자들도 그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정당한 욕망이 되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불의가 되는 이 시대에, 후대가 인용할 수 있는 발언 하나 글자 하나 성경에 남기지 않은, 심지어 마리아에 묻힌 요셉, 내 씨가 아닌 아이를 묵묵히 키운 요셉의 모델은 제법 전복적이다. 지금은 고3이 된 아들이 작년에 학교 과제로 친구들(남성)과 토론을 하는데 낙태를 주제로 할까 한다며 내게 물어왔을 때, 그것은 남자인 너희들이 쉽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며 이 문제의 복잡성만 나열했다. 아들의 나이도 있으니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하면서 서서히 비껴가 그를 사로잡는 한편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1) Margaret D. Kamitsuka, “Prolife Christian Romance Novels: A Sign that the Abortion-as-Murder Center Is Not Holding?” Christianity & Literature. Vol. 69, No. 1 (March 2020): 36-52.
2) 공지영,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오픈하우스, 개정 신판 2009),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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